존 로크의 자연법이 갖는 지위 & 묵시적 동의
로크의 자연법의 갖는 지위
로크의 자연법 개념이 정합적(coherent)인가에 대해서는 그의 인식론적 입장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그의 자연법은 인간 행위가 그것에 따라서 일어나야 마땅한 법이지만, 인간이 늘 그것에 따라서 행동하지는 않는 법칙이다. 자연법이 지시하는 행동은 그러므로 인류가 확립해 온 관습이나 풍습과 다를 수 있으며, 그것들이 자연법을 정당화하는 기초도 아니다. 실정법이나 사회적 인습 역시 자연법이 요구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로크는 자연법을 이성의 법 또는 신의 명령이라고도 표현한다(통치론 II. 6). 이렇게 본다면 자연법이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이성을 사용하여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신의 의지, 즉 계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과 원칙적으로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로크에 의하면 신의 의지를 제대로 파악할 경우 그것이 이성과 대립할 수 없다고 본다.
자연법은 보편적이라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모든 인간은 자연법에 따라 대우받아야 마땅하며, 이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이라면 모든 타인 역시 자연법에 준하여 대우해야 한다. 모든 실정법, 사회 인습 규범, 공동체의 관습 등도 자연법에 상응해야 하지만, 국가, 사회, 공동체에 따라 실정법, 인습, 관습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자연법이 인간 행위의 모든 규범을 정확하게 규정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법이 실제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로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명료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그는 “기본적 자연법”(the fundamental law of nature)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II. 16, 134, 183, 149 등), 이것에서 이성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자연법들을 도출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기본적 자연법은 ‘인간 사회와 그 사회의 모든 개인들은—공공의 안녕과 양립할 수 있는 한—보존되어야 한다’ 정도로 표현된다. 이 기본적 자연법과, 잘 알려진 일상의 조건들로부터 이성에 의해 여타의 자연법규들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모든 인간들이 대지와 그 대지에서 얻은 수확물에 대한 권리를 지닌다'는 [도출된] 자연법은, 그러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인간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이성적 판단에 의해 도출 가능하다. 근본적 자연법은 가능한 한 모든 인간들이 보존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는데, 그 권한을 거부함은 곧 그 권한 상실자의 소멸을 뜻하기 때문이다.(II. 26, 183)
로크의 자연법은 인간 종족의 보존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을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이성적 고려를 통해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목적론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묵시적 동의(tacit consent)
로크는 인류가 최초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기 시작할 무렵에는 “가부장적” 지배가 불가피했는데, 자식들은 그 지배권에 대한 복종을—자신들이 자기 자신과 소유물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을만한 연령에 도달해서도—“구속”이 아니라 “보호”로 여겼을 것이라고 주장한다.(II. 74f.)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능력과 선함이 뛰어난 자가 “선행과 미덕”을 통해 자연스러운 권위를 증명해 보이고,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가족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시하기에 이르면,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중재할 수 있는 권리와 지배권까지 암묵적 동의에 의해 그에게 위임”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II. 110)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그 자에게는 “권위뿐만 아니라 신성함”까지도 따르게 될 수 있지만, 다른 후계자가 나타나고 원래의 통치 목적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은 “원로원이나 의회” 같은 집단에게 그들의 입법 권한을 넘겨주게 된다고 한다. (II. 94)
“모든 사람들은 어떠한 형태의 통치 체제 하에 태어나게 마련이므로 아무도 본래부터 자유롭게” 새로운 통치 체제를 선택할 수 없으리라는 지적에 대해, 로크는 만약 그러한 주장이 정당하다면 “과연 어떻게 그렇게도 많은 군주국가들이 합법적으로 이 세상에 출현할 수 있었단 말인가?”(II. 113)하고 반문한다. 간단히 말해 그러한 생각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로크에 따르면 비록 부모가 어떠한 계약에 의해서도 “자신의 자식이나 자손들까지 구속할 수는 없”으나, 어떤 정부 하에서든 그 사회의 일원이 되지 않고서는 소유물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 봐야한다. 부모의 자산을 상속하고 그 정부의 법이 지배하는 영토 안에서 그것을 이용하면서 생산물을 누리고 있는 동안에는 그 자손 역시 통치제의 구성원이 될 것에 묵시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II. 117)
때때로 로크는 명시적 동의만이 한 국가의 ‘완전한’ 시민권을 보장하는 것처럼 기술하기도 하지만, 그 동의가 꼭 서약이나 서명 형식으로 이뤄져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 듯하다.
참고자료
J. 로크, 『통치론 II』 (The Second Treatise of Government)
D. A. Lloyd Thomas, Routledge Philosophy Guidbook to Locke on Governemnt,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