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카시러의 상징

Kant 2008. 3. 10. 08:46
교수님께


오래 전에 칸트의 "상징"에 관해 문의 드린 P 입니다
그간 좋은 일들 많으셨는지요?

다름이 아니옵고. 김상환 교수님의 <우리말 철학사전>의 "상징" 편을 보았는데...

김상환 교수님은 <우리말 철학사전>에서 .
<상징형식의 철학> 제3권 109p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정신의 본성은 기호를 만들고 그 기호에 의미를 내면화하는 활동적 형식, 상징적 형식에 있다
(카시러에게서 상징과 기호는 같은 의미를 지니며 언어와 이미지, 숫자, 제스처, 개념 등을
모두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감성적인 것을 통해서 어떤 정신적 의미가 지시되거나 표현되고
있다면 어느 것이나 상징 혹은 기호이다제3권 109p)

그런데 제가 알기로, 카시러는 1944년의 <인간론>에서는 “상징은 지시자이고 사인은 조작자”
라고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사인”을 “기호”의 범주로 카시러가 생각하였다면, 상징과 기호(=사인)는 같은 것이 아니므로,

“카시러에게서 상징과 기호는 같은 의미를 지니며…감성적인 것을 통해서 어떤 정신적 의미가
지시되거나 표현되고 있다면 어느 것이나 상징 혹은 기호이다

라는 위 표현은 모순이 아닌지요?
뿐만 아니라, 카시러는 “상징은 ‘의미세계의 것’이고, 사인은 ‘물질적 세계의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상징과 사인(=기호)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닌지요?

그리고, 왜 김상환 교수님은 <우리말 철학사전>의 “상징” 편을 작성하시면서 카시러의 1923~9년의
<상징형식의 철학>만을 인용하시고 20여년 뒤의 <인간론>의 상징 개념에 관해선 인용을 하시지 않았을까요?

오래전부터 궁금했는데 교수님께 이제야 여쭈어보게 되었습니다. 바쁘시더라도 혹시 짐작이
가신다면 가르쳐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그럼...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춘천에서 P 드림



P선생님,
오랫만입니다.
여전히 공부에 진력하고 계시네요. ㅎ..
청주에서 춘천으로 거처가 바뀌셨나요?

카시러의 <상징형식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옛날에 오르트(W. Orth)라는 교수의 '신칸트학파'강의를
통해 접한 적이 있습니다만 솔직히 너무 오래 전이라 별로 생각나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 당시 강의필기를 다시 뒤져보긴 했는데..

김상환교수의 아티클은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직접 그 분께 질문드려보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합니다만..
제가 필기한 내용 가운데 도움이 될까 해서 몇자 적습니다.


카시러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근대 인식이론의 정점에 도달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인식의 문제는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면 의미 문제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게
카시러의 견해인 것 같습니다. 외부 세계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들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우리 인간 정신의 반응이 상징이라는 형식을 통해 나타나는데 그 총체가 문화라는 것입니다.
인간 의식 내지 정신이 자신에게 주어진 경험 내용을 조직하고 의미화하여(상징기능) 만들어진 결과물들이  
문화의 여러 산물들(언어, 종교, 예술, 신화, 학적 인식 ..)이고, 그것들이 결국 세계 이해의 상이한 방식들이 되겠지요.

상징은 인간이 세계를 해석하며 이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직접적인 강요(자극?)로부터
인간 자신을 자유롭게 해준다고 봅니다. 그래서 문화의 전개는 "인간의 자기 해방의 과정"(Prozess menschlicher Selbstbefreiung)이라는 것.

그런데 이런 상징은 인간의 정신적 작용이 들어간 현상을 말하며, 동물의 경우 상징기능의 뿌리를 찾아볼 수는 있으나,
기호의 차원에 그치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호는 자연적 존재 세계의 일부에 속하는 것으로서 특수하며, 일의적이고 경직된 것(speziell, eindeutig, starr)인 반면, 상징은 의미 세계에 속하며 보편적이고, 가변적이라고(universell, variabel) 합니다.
언어에 있어서도 인간은 정서적 언어와 명제적 언어를 모두 사용하나, 동물들은 전자의 언어에 유사한 것만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정서적 언어는 외부 세계의 자극에 대한 반동에 불과한 것이고, 명제적 언어는 반성을 통한 반응의 산물이라 합니다. 이 후자를 통해 비로소 사물 자체와 그 사물에 대한 표현이 구분되어 객관적인 경험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화의 가능성인셈이겠지요.


<인간론>에서 “상징은 지시자이고 사인은 조작자”라고 한 것은 잘은 모르겠으나, 사인(기호)이 자연적 세계에 속한 실체적 존재로서 변동 불가능한 고정된 무엇인 반면, 상징은 인간정신의 이해, 해석 내지 조작 능력이 만들어낸 기능적인 무엇이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결론은
“카시러에게서 상징과 기호는 같은 의미를 지니며…감성적인 것을 통해서 어떤 정신적 의미가
지시되거나 표현되고 있다면 어느 것이나 상징 혹은 기호이다 "라는 주장은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여겨집니다.

카시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관계로 더 도움을 못드리겠습니다.
그럼..



교수님께


교수님의 답신, 너무 고맙고 반갑습니다!

교수님의 노트와 진술은 최명관 선생님의 <인간론> 번역본보다 훨씬 부드럽습니다

예일대의 <상징형식의 철학> 영역본(1952년)에는‘정신’이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고
"의식”이라는 용어만 있는 것 같았고, 김상환 교수님의 <상징>편에는‘의식’이라는 표현은 없고
"정신”이라는 표현만 있어서, 서구에서는 ‘의식’과 ‘정신’을 거의 유사하게 여기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교수님의 메일에서 “인간 의식 내지 정신”이라는 표현을 보니
번역본에 따라 ‘의식’ 또는 ‘정신’으로 달리 쓰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것도 같아 기쁩니다.

...교수님도 카시러가 <인간론>에서 상징과 기호를 구별하였다는 점은 인지하고 계십니다만...

저는, ①카시러가 상징이 인간의 정신작용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였으면서도
왜‘상징’을 의식의 작용으로 이해하였는지. (저는 상징작용은‘비의식’에서 생성된다고 봅니다만...)
② 김상환 교수님은 <상징>편에서 왜, 상징을 기호의 관점에서 다루었는지,
상징이 기호가 아닌 인간의 정신작용이고, 따라서 상징은 심리학과 뇌신경과학, 인지과학 등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때, 사실 카시러와 김상환 교수님의 상징에 관한 이해는
아쉬운 점이 있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아가...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오늘날 기호학자들은 상징을 기호의 한 유형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 또한 잘못된 견해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수님께 제 생각을 너무 단정적으로 얘기 드린 것 같습니다...
아무튼, 토요일에도 철학을 저희 일반인들에게까지 자상히 알려주시는 교수님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럼 오늘 오후도 좋은 시간되시기 바라며 행운이 가득 하시길 기원드립니다.

P 드림.




P선생님,
도움 된 듯해 다행입니다.

저는 카시러 번역본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갖고 있는 철학저서 사전에는 카시러가 <상징형식..> 2부에서 '직접적인 정신' 내지 '감각적 의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짐작컨데 카시러는 헤겔의 영향으로 정신의 발전 단계를 전제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참고로, 제 노트에도 카시러 철학이 "헤겔주의" 또는 "Kryptopositivismus"(숨어 있는 실증주의? 아마도
생물학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게 아닐지..)로 비난 받는다고 되어 있네요.

상징과 기호 사이에 얼마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봐야할지, 상징을 심리학이나 뇌신경과학 등에서 다룬다면
그 또한 불가피하게 여러 의미화 작용들 중 하나로(경험과학적 접근이라는) 다루는 것이라는 한계가 있는 건 아닌지..

평소 생각해보지 않아서 뭐라 더 드릴 말이 없습니다.

불편하지 않으시면 선생님 메일과 제 메일 내용을 제 블로그에 올려도 될지요?

그럼..



교수님께


교수님의 언급은 여러모로 제 미약한 인식을 밝게 해줍니다
그리고...저의 궁금사항에 대한 물음들과 교수님의 언급들이 교수님의 블로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호와 상징의 관계에 관해서 입니다만...
저는 시를 쓰면서 인식하길,
상징의 실체는 인간의 정신작용 그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칸트와 카시러는 상징을 정신작용에 의한 의미 전달의 한 “수단”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고
봅니다만...저는 상징을 전달의 한 ‘형식’이나 ‘수단’이라는 생각에 머무르기 보단
‘정신작용’ 그 자체로 간주하려 합니다.
베르그송의 직관 같은 것-인간의 정신작용 그것을 ‘상징’ 그것으로 보고자 해왔습니다
크리스테바가 생각한 ‘기호계 le sémiotique’ 같은 것이 모두 그 유사한 연구들이라 생각
해보았습니다
그러한 까닭에서 저는, 카시러가 <인간론>에서 상징을 기호와 구별하여 ‘의미작용 세계의
것’으로 특정지은 것을 매우 의미있는 일로 여겼습니다.
카시러는 상징을 정신작용 그것으로 간주치는 않았지만,
저의 입장에서는, 상징을 자연(인간정신)의 작용 그것으로 여기는 한편, 기호는 그 표상물로
여긴다는 점에서 볼 때, 카시러의 상징과 기호의 구분은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상징과 기호를 구분하는 이유는,
저의 입장에서 볼 때...상징은 주체와 가까울 뿐 아니라 그 본질을 규명해 들어갈 때 주체의
정신작용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물론, 기호는 주체(정신작용)에 관한 간접적
표상체에 불과한 것이겠습니다.

한편 이러한 생각은, 칸트가 상징과 상징물을 구분한 것과 그리고, 콜링우드가 예술작품을
작가의 상상의 구현물인 질료적 구조물들과 구별한 것과 유사한 생각의 방식이기도 하겠습니다.

상징과 기호의 본질적 차이의 유의미성에 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리다 보니 길어졌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시를 쓰면서 사유와 상상의 근원에 관해 생각하다보니 떠오른 단상들인 것 같습니다.
저의 이러한 짧은 소견들이 교수님의 사유와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교수님의 도움에 여러모로 감사하다는 말씀 다시 한번 드립니다.
오늘 오후도 행복한 시간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춘천에서 P 드림




선생님 답신이 자꾸만 저를 가만 놔두지 않네요.ㅎ..

상징을 정신작용에 의한 의미 전달의 한 ‘형식’이나 ‘수단’으로 간주하기보단
‘정신작용’ 그 자체로 간주한다는 것과 관련해서...
그럴 경우 상징이 아니라 상징작용에 초점이 두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상징은 인간 주체의 능력(의식이든 정신이든)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가공된(해석된)
현상들이고, 그 일차적인 목적은 인간 정신의 발달(결국 문화수준에 각 단계를 반영하는)에 상응하여 인간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표현하는 데 있는 것이라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이 문화철학의 성격을 갖는다고 보았구요.
(제가 카시러를 비코의 시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 인상으론 선생님은 인간 정신의 상징 작용과 그 기능성을 강조하려는 것 같습니다.
기호는 일의적이고 자연적(물리적) 세계에 속하는 것이니 임의의 의도에 따라 조작되기도 할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하나 상징 (작용)은 그 자체가 자기에게 주어지는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주체의
활동성이라 보시는 게 아닌가요?
그렇다면 언급하신 베르그송이나 (제가 보기엔) 헤겔 등과 유사한 생각 같습니다.
다만 그때의 주체는 인간 개개인이라기보다는 더 근원적인 힘이나 존재 자체로서, 그러한 존재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세계나 존재 자체의 본질을 규명하여 이해하는 것은 유한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고
인간 정신이 적어도 그 가능성의 일부를 꿈꾼다는 것은 자신 안에 무한성의 계기를
전제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정리되지 않은 글이 되려 혼란을 드린 건 아닌지?

건강하시구요.



교수님의 관심에 감사 드립니다


- 저는 상징을 1). 정신작용, 2). 심상 3). 표상체 그 세 부면을 지닌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 셋의 중심엔 상징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동일화의 표상”이 자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상징이 기호학의 기호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게 상징은, 1) 동일화를 생성해내고 있는 정신작용, 2) 동일화를 이룬‘심상, 3) 심상과
동일화를 이룬 모사체인 기호 - 그 셋이 모두 상징의 한 유형들입니다. 그 셋의 공통된 성질이
’동일화‘입니다. 그래서 저는 상징의 본질은 “동일화”라고 생각합니다.

- “동일화를 생성하는 정신작용”이 가닿고자 하는 곳이 ‘완전 知’이냐, ‘절대 知’이냐 하는
건 저는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상징과 기호(세미오시스)의 궁극적 지향처는 일종의‘절대 知’(칸트의 물자체)같은 것이겠지만...
그것은 인류 공동의 작업으로 점진적으로 도달하는 곳까지 도달할 것이겠지요.
살아 있는 현 시대인들에게 정작 중요한 건, “상징의 실행”이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자연과 자아, 기호는 상징이란 매개항을 통해서 볼 때 동일체이며, 특히, 인간은 자연
(우주 또는 세계) 속에서 수평적 균형을 이룬다는 마음(동일화)을 가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 저는 상징에 관한 詩論을 3~4월 중 출간할 생각입니다(한국학술정보주식회사, 현재 편집교정 완료).
그리고, 향후, <비의식의 상징론>이라는 “상징 이론”을 이론서 형태로 낼 생각입니다.
교수님의 지적이 제게는 다음 책을 내기 전에 좋은 검증의 기회가 될 수 있겠습니다.
교수님의 관심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P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