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R. Popper: "역사에는 의미가 있는가?"
저는 여기서 ‘의미’의 의미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의 의미’라든가 ‘삶의 의미’ 등에 관해 말할 때 그들 자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충분하고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다시 말해 역사의 의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역사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기 위해, 사람들이 역사가 의미를 갖는가 하고 물을 때 염두에 두는 ‘역사’에 대해 먼저 설명해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역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역사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말하는 데에 대한 적어도 하나의 이유가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할까요? 사람들은 학교나 대학에서 역사에 대해 배웁니다. 역사에 관한 책들을 읽지요. 사람들은 ‘세계사’나 ‘인류의 역사’ 등과 같은 제목의 서적들이 다루는 것을 어느 정도는 특정한 사실들의 연속체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사실들이 인류의 역사를 구성한다고 믿습니다.
사실들의 영역은 무한히 풍부하며 그래서 선택이 불가피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심에 따라 예술의 역사를 집필하거나, 언어의 역사 혹은 식습관의 역사 혹은 발진티푸스의 역사(진서Zinsser의 『쥐, 벼룩 그리고 역사』 참고)를 집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인류의 역사는 아닙니다(이것들 모두를 모아도 마찬가지이구요).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를 말할 때 염두에 두는 것은 이집트, 바빌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제국 등등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역사일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들은 인류의 역사에 대해 말하기는 하지만, 이때 그들이 [실제로] 의미하고 또 학교에서 배운 것은 정치권력의 역사인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란 것은 없습니다. 인생의 온갖 측면들에 관한 다수의 역사들만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것들 가운데 하나가 정치권력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보편사로 둔갑한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것은 인류에 관한 모든 온당한 이해에 해악을 가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사기나 약탈, 독살 등의 역사를 인류의 역사로 취급하는 것보다 거의 나을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치사는 국제적인 범죄와 대량 학살의 역사 이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치사가 그러한 것들을 억제하려는 약간의 시도들 역시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기는 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역사가 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고 또 [그 과정에서] 엄청난 범죄자들이 영웅들로 간주됩니다.
그런데 정말 인류의 구체적인 역사라는 의미에서의 보편사 같은 것은 없는 걸까요? 그러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모든 인본주의자들의 대답이어야만 합니다. 저는 또한 특히 그것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대답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구체적인 역사,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인간들의 역사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희망, 투쟁, 고통의 역사일 것입니다. 어떠한 한 인간도 다른 인간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구체적인 역사는 기록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추출 작업을 해야만 하며, [어떤 것들을] 무시하거나 선택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여러 역사들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인류의 역사로 광고되어 온 국제적인 범죄와 대량 학살의 역사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왜 권력의 역사는 선택되어 왔는데 비해 [다른 역사] 예컨대 시의 역사는 그렇지 않은 걸까요?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한 가지 이유는, 권력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데 비해 시는 오직 소수에게만 그렇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사람들이 권력을 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권력 숭배가 인간적인 우상화와 인간 구속 내지 노예상태 시대의 유산 중에서도 최악의 종류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권력 숭배는 경멸되어야 마땅한 감정인 두려움의 산물입니다. 권력 정치를 ‘역사’의 핵심으로 만들어 온 세 번째 이유는, 바로 그 권력자들이 숭배를 원했고 또 그들의 소망[의도]을 강요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가들은 장군들과 독재자들의 지시 감독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저는 이러한 견해가 강력한 반대, 특히 몇몇 기독교 옹호론자들에 의한 반대에 직면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비록 신약 성경에는 그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어떠한 내용도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만, 신이 자신을 역사 속에서 드러낸다는 것이 종종 기독교 교리로 간주되곤 합니다. 역사가 의미를 지니며, 그 의미가 신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관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관점은 합리주의자나 인본주의자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기독교의 관점 자체에서 보아도 순전히 우상화이고 미신이라 생각합니다. (…)
After the Open Society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