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고증학'이 다시 밀려든다
김수배 교수의 '칸트철학에 대한 이해와 오해'를 읽고
2006년 02월 10일 강성민 기자
칸트라는 철학사적 주제는 매우 권력적이다. 칸트는 철학이라는 보편적 여로에서 만나게 되는 '조언자'가 아니다. 어떤 단계를 넘어서면서 다른 단계에 접어드는 사유의 전환을 확인케하는 지표석의 역할과도 거리가 멀다. 칸트는 푸코나 네그리처럼 실용적 차원에서 친근하게 인용되는 철학자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자 궁극적인 도달점으로 버티고 선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비판적 극복을 위한 대상화에서 멀찌감치 비켜선, 그럼으로써 사유의 물렁물렁한 대상이라기보다는, 그것과 동일화되려는 무수한 사유의 욕망체들에 의해 끊임없이 표준화되고, 문헌학적으로 바느질되는 대상이다.
이런 점을 최근 발표된 한편의 연구논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수배 충남대 교수가 '철학연구' 제70집(2005)에 발표한 '칸트 철학 연구에 나타난 칸트 철학에 대한 이해와 오해'라는 논문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듯 보인다.
서두에서 김 교수는 "칸트철학 연구 업적물에 드러나는 칸트 철학이해의 수준에 대한 평가"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힌다. 김 교수는 자신의 관심이 "칸트연구에 도대체 질적 진보가 있는지"라는 점임을 시사하면서, "내가 국내, 국외연구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이 글에서 다룬다고 해서 국내 연구수준의 국제화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함으로써, 국내 칸트연구가 '매우 멀었다'는 점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가슴이 벅차 오른다. 이 같은 호언장담에 이어서 국내 칸트연구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무엇인지가 지적될 것 같다는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켠으로는 김 교수가 한국 철학의 '유전자적 한계'를 꾸짖음으로써 "네, 잘못했습니다"는 식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근원적 승부수를 던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스쳐간다.
아쉽게도 결과는 후자에 가깝다. 김 교수가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것은 국내 학자들이 "신봉"하는 '칸트전집'이 무수한 오류를 품고 있으며, 그 전집을 인쇄했던 식자공의 실수도 만만치 않은 '문제본'이라는 점이다. △구두법상의 교정이 가해져서 칸트의 원래 의도가 왜곡됐다는 점, △칸트가 공직생활시 주고받은 서간문이 누락됐다는 점, △유고의 작성연대 분류가 잘못됐다는 점, △강의기록물을 실을 때의 오식, 상이본에 대한 고려의 미흡, 유고와의 연관성 무시 등이 2페이지에 걸쳐 지적되고 있다.
김 교수는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전집에 무비판적으로 의지함으로써 번역이나 논문의 권위를 포장하려는 시도는 무모한 일"이라고 비판한다. 기존 자료들을 무분별하게 활용하기 이전에 그것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평가의 절차를 거치라고 강조한다.
이어서 저자는 국내학계가 이런 문헌학적 평가를 거칠 수 있는 기초소양이 부족하다는 쪽으로 몰아간다. 가령 김영민 교수나 김상봉 교수가 예전에 칸트연구에 가한 비판은 "가독성을 철저히 무시한 원전중심주의", "불철저한 원전이해, 문법적 이해부족, 정확한 우리말 표현능력 부족" 등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18세기 독일 철학계의 논의나 당시 언어 사용법에 관한 충분한 지식이 없다는 지적을 가한다. 'Kultur'와 'Zivilisation'의 의미가 현재의 그것과 서로 바뀌어 사용되었다는 점, 전치사 'vor'가 현대어의 'fur'의 의미로 쓰였다는 점 등과 함께 한국칸트학회의 한 발표논문조차 "physische Geographie"를 "물리적 지리학"으로 번역된다고 비판한다.
다음은 칸트 철학이 양적으로 풍부함에도 비판철학 연작에만 몰려 칸트의 인간학, 자연철학, 교육학, 종교철학 등 다채로운 주제들이 다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칸트의 완숙기의 저작인 '도덕형이상학'의 번역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임에도 계속 이와 관련한 학위 논문이 나오고 있는 걸로 볼 때 "제목이 아무리 거창해도 제한된 원저들에만 의존하거나 엇비슷한 다른 논문들과 서로 복제"되는 비참한 상황에 머물러있을 것이라는 판단도 가한다.
지금까지의 김 교수의 지적은 비록 구체적 사례를 들거나, 원전 불철저 이해가 어떻게 칸트 철학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나름대로의 경종을 울릴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는 더 나아가서 지금껏 나온 '칸트주의' 연구들에 대한 비판으로 계속 거침없이 나아간다.
즉, 문헌학적 정확성이 결여된 칸트에 대한 '독창적 해석'은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이다. 그는 노르베르트 힌스케를 인용하며 "칸트에 대한 고증학은 온전한 칸트학일 수 있지만, 칸트주의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칸트고증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독자적 학문분야를 이룰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관점에 따르면 백종현 서울대 교수가 칸트 서거 2백주년을 맞은 2004년에 "칸트연구가 소개나 해설을 넘어 독자적인 '재생산'의 시기로 접어들었다"고 한 건 다시 백 교수의 입으로 불려 들어가야 마땅하다. 그런데 한국 칸트 연구가 정말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김 교수는 계속 진단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언제나 "자신의 도구인 개념적 사유와 논리를 정비함으로써 그 위기를 넘어왔다"고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의 허위적 수사에 엄밀한 사유와 객관적 논증으로 맞섰다는 점을 예로 들기도 한다.
김 교수는 칸트 철학은 이제 문헌학적 연구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그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번역서, 주석서, 사전, 색인집 등 각종 보조자료에 대한 평가와 활용법도 다시 공부해 숙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디지털화해서 인터넷에 탑재하는 노력도 경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칸트의 전 작품에 대한 재번역을 해야 한다고도 지적한다. 이 작업에 김 교수는 "1세기"의 시간도 모자라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에게 칸트는 1세기는 더 넘게 동일화의 과정을 밟아서 도달해야 할 멀고도 먼 아프리카 킬리만자로의 봉우리인 것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2006 Kyosu.net
Updated: 2006-02-10 02:12
김수배 교수의 '칸트철학에 대한 이해와 오해'를 읽고
2006년 02월 10일 강성민 기자
칸트라는 철학사적 주제는 매우 권력적이다. 칸트는 철학이라는 보편적 여로에서 만나게 되는 '조언자'가 아니다. 어떤 단계를 넘어서면서 다른 단계에 접어드는 사유의 전환을 확인케하는 지표석의 역할과도 거리가 멀다. 칸트는 푸코나 네그리처럼 실용적 차원에서 친근하게 인용되는 철학자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자 궁극적인 도달점으로 버티고 선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비판적 극복을 위한 대상화에서 멀찌감치 비켜선, 그럼으로써 사유의 물렁물렁한 대상이라기보다는, 그것과 동일화되려는 무수한 사유의 욕망체들에 의해 끊임없이 표준화되고, 문헌학적으로 바느질되는 대상이다.
이런 점을 최근 발표된 한편의 연구논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수배 충남대 교수가 '철학연구' 제70집(2005)에 발표한 '칸트 철학 연구에 나타난 칸트 철학에 대한 이해와 오해'라는 논문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듯 보인다.
서두에서 김 교수는 "칸트철학 연구 업적물에 드러나는 칸트 철학이해의 수준에 대한 평가"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힌다. 김 교수는 자신의 관심이 "칸트연구에 도대체 질적 진보가 있는지"라는 점임을 시사하면서, "내가 국내, 국외연구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이 글에서 다룬다고 해서 국내 연구수준의 국제화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함으로써, 국내 칸트연구가 '매우 멀었다'는 점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가슴이 벅차 오른다. 이 같은 호언장담에 이어서 국내 칸트연구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무엇인지가 지적될 것 같다는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켠으로는 김 교수가 한국 철학의 '유전자적 한계'를 꾸짖음으로써 "네, 잘못했습니다"는 식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근원적 승부수를 던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스쳐간다.
아쉽게도 결과는 후자에 가깝다. 김 교수가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것은 국내 학자들이 "신봉"하는 '칸트전집'이 무수한 오류를 품고 있으며, 그 전집을 인쇄했던 식자공의 실수도 만만치 않은 '문제본'이라는 점이다. △구두법상의 교정이 가해져서 칸트의 원래 의도가 왜곡됐다는 점, △칸트가 공직생활시 주고받은 서간문이 누락됐다는 점, △유고의 작성연대 분류가 잘못됐다는 점, △강의기록물을 실을 때의 오식, 상이본에 대한 고려의 미흡, 유고와의 연관성 무시 등이 2페이지에 걸쳐 지적되고 있다.
김 교수는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전집에 무비판적으로 의지함으로써 번역이나 논문의 권위를 포장하려는 시도는 무모한 일"이라고 비판한다. 기존 자료들을 무분별하게 활용하기 이전에 그것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평가의 절차를 거치라고 강조한다.
이어서 저자는 국내학계가 이런 문헌학적 평가를 거칠 수 있는 기초소양이 부족하다는 쪽으로 몰아간다. 가령 김영민 교수나 김상봉 교수가 예전에 칸트연구에 가한 비판은 "가독성을 철저히 무시한 원전중심주의", "불철저한 원전이해, 문법적 이해부족, 정확한 우리말 표현능력 부족" 등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18세기 독일 철학계의 논의나 당시 언어 사용법에 관한 충분한 지식이 없다는 지적을 가한다. 'Kultur'와 'Zivilisation'의 의미가 현재의 그것과 서로 바뀌어 사용되었다는 점, 전치사 'vor'가 현대어의 'fur'의 의미로 쓰였다는 점 등과 함께 한국칸트학회의 한 발표논문조차 "physische Geographie"를 "물리적 지리학"으로 번역된다고 비판한다.
다음은 칸트 철학이 양적으로 풍부함에도 비판철학 연작에만 몰려 칸트의 인간학, 자연철학, 교육학, 종교철학 등 다채로운 주제들이 다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칸트의 완숙기의 저작인 '도덕형이상학'의 번역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임에도 계속 이와 관련한 학위 논문이 나오고 있는 걸로 볼 때 "제목이 아무리 거창해도 제한된 원저들에만 의존하거나 엇비슷한 다른 논문들과 서로 복제"되는 비참한 상황에 머물러있을 것이라는 판단도 가한다.
지금까지의 김 교수의 지적은 비록 구체적 사례를 들거나, 원전 불철저 이해가 어떻게 칸트 철학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나름대로의 경종을 울릴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는 더 나아가서 지금껏 나온 '칸트주의' 연구들에 대한 비판으로 계속 거침없이 나아간다.
즉, 문헌학적 정확성이 결여된 칸트에 대한 '독창적 해석'은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이다. 그는 노르베르트 힌스케를 인용하며 "칸트에 대한 고증학은 온전한 칸트학일 수 있지만, 칸트주의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칸트고증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독자적 학문분야를 이룰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관점에 따르면 백종현 서울대 교수가 칸트 서거 2백주년을 맞은 2004년에 "칸트연구가 소개나 해설을 넘어 독자적인 '재생산'의 시기로 접어들었다"고 한 건 다시 백 교수의 입으로 불려 들어가야 마땅하다. 그런데 한국 칸트 연구가 정말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김 교수는 계속 진단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언제나 "자신의 도구인 개념적 사유와 논리를 정비함으로써 그 위기를 넘어왔다"고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의 허위적 수사에 엄밀한 사유와 객관적 논증으로 맞섰다는 점을 예로 들기도 한다.
김 교수는 칸트 철학은 이제 문헌학적 연구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그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번역서, 주석서, 사전, 색인집 등 각종 보조자료에 대한 평가와 활용법도 다시 공부해 숙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디지털화해서 인터넷에 탑재하는 노력도 경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칸트의 전 작품에 대한 재번역을 해야 한다고도 지적한다. 이 작업에 김 교수는 "1세기"의 시간도 모자라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에게 칸트는 1세기는 더 넘게 동일화의 과정을 밟아서 도달해야 할 멀고도 먼 아프리카 킬리만자로의 봉우리인 것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2006 Kyosu.net
Updated: 2006-02-10 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