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ellaneous/etc. 94

Krebs 3 (2024.12.9~10 & 2025.5.10)

2024.12.9피터 씨, 오랜만입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건강은 어떠하신가요? 당신의 한국어 번역서는 이미 아시다시피 기대에 비해 반응이 그다지 좋지는 않아서 안타까워요. 우리나라에서의 철학상담에 대한 관심도 10여년 전만 못하다고 느껴집니다.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닐 거 같지만 정확하게 특정하기는 어렵군요. 진중한 자세로 배우려는 태도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게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나도 이제 정년까지 한 학기만 남겨놓았는데, 최근에 암진단을 받고 보니 당신이 2016년에 항암치료 받았던 게 기억이 나서 안부 확인 겸 메일을 보냅니다. 지금은 완치된 상태인가요? 그 당시 “a foggy brain”이라는 표현을 쓰셨었는데, 이제 나 자신이 그런 치료를 앞두고 있다 보니 새삼 ..

Miscellaneous/etc. 2025.05.10

Krebs 9 (2025.4.29)

방사선 종양학과 치료를 위해 옷을 갈아입는 탈의실에서 마주치게 되는 환우들의 모습은 크게 두 카테고리로 나눠볼 수 있다.첫째 그룹은 가장 빈번하게 접하는 케이스로, 어두운 안색에 누가 봐도 화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다른 사람의 존재는 아예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몸짓으로 대충 환자복이나 사복을 뚝딱 갈아 입고 나가버리는 경우다. 난 처음에 조금 어색하고 뻘쭘했던 게, 그래도 비슷한 처지의 환자들이니 다른 건 몰라도 뭔가 병력이나 치료 또는 병원, 의사 등에 관한 짤막한 정보 정도는 예의상 서로 주고받을 수 있겠거니 싶었는데, 목례 같은 간단한 인사조차 교환할 틈도 주지 않고 대부분 밖으로 휙~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이해 못할 현상은 아니다. Krebs 진단 받고 방사선 치료 때문에 온 사람..

Miscellaneous/etc. 2025.04.29

Krebs 8 (2025.4.27)

세상에서 가장 흔한 조언을 꼽으라면 단연 건강에 관한 것이리라. "질병에 걸리는 것은 갑자기 산이 무너져 내리듯이 오지만, 병이 낫는 것은 가는 실을 뽑는 것처럼 조금씩 나아간다." 몇몇 블로거의 글이 출처 언급 없이 인용하고 있는데 나름 인생 경험을 반영한 말 같다. "건강은 유일무이의 보배이며, 이것을 얻기 위해 인간은 생명 자체까지 내던진다." 이건 몽테뉴가 한 말이라는데 에세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내 독서 시력이 나빠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난, "모든 인간은 행복하기를 추구한다. 예외란 없다. 그들이 어떤 다른 방법을 쓰든 [심지어 자신의 목을 매달려는 자도] 모두 이 목표를 향한다"라는 파스칼의 문장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기이하다면 기이하다고 할 수 있는 사실은 그렇게나 많은 건..

Miscellaneous/etc. 2025.04.27

허세 빼기 전문가 몽테뉴의 노년에 대한 경고

[노화와] 병 덕택에 갖게 되는 영혼의 건강이라니, 치사한 치료법 아닌가! ... 기쁨을 맛볼 때보다는 고통을 소화시켜야 할 때 나의 이성은 더 산만해지고 힘들어 한다. 맑은 날 나는 더 또렷하게 세상을 본다. 건강은 질병보다 나를 더 유쾌하게, 그러므로 더 유익하게 깨우쳐 준다. 즐길 수 있는 건강이 있을 때야말로 나는 가장 많이 개선과 절제 쪽으로 나아갔다. 건강하고 발랄하며 활력 넘치던 시절보다 노쇠의 비참과 역경이 더 나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생각할 때 그 동안의 [즉, 젊고 건강하던 시절의] 내 모습이 아니라 그 상태가 멈춘 모습으로 기억한다면, 나는 부끄럽고 분할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인간의 행복을 만드는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 [견유학파의 창시자] 안티스..

Miscellaneous/etc. 2025.04.16

맥아더와 아이크

"맥아더와 식사를 할 때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알게 되지요. 그러나 아이크(아이젠하우어)와 식사를 같이 하면 제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게 된답니다." 두 사람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던 뉴욕 타임즈 기자가 한 말이란다.모르긴 해도 어설픈 리더십 강의의 단골 소재 정도는 될만도 하긋다.그런 강의를 통해서라도 - 대개는 인맥쌓기가 목적이겠다마는 - 꼭 리더가 되겠다는 또는 리더의 눈에 띄어보겠다는 욕망을 지닌 사람이라면 난 되려 아이크 류의 인간과는 조금(!) 거리를 두라고 조언하겠다. 아이크 같은 사람은 내 이익과 무관하게 내게서 어쨌든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가고야 말테니까.

Miscellaneous/etc. 2025.04.01

Krebs 7 (2025.3.7)

https://youtu.be/Az-MGC8JPWg?si=rLHsTdppDLPhMWhJ "출발지에서 종점까지 빤히 보이는 길이 있다면 어떨까? 아마 그런 길이 있다면 질려서 운전하는 맛이 없을 겁니다."유학시절 독일 아우토반 위에서 내가 간파했던 독일 고속도로와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차이가 바로 이거였다! 난 운전할 차가 없어 얻어 타는 게 전부였지만, 언덕과 고개, 산맥으로 가득한 한반도와 달리 드넓은 평지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굳이 완만한 곡선으로 뚫은 이유는 십분 짐작되고도 남았다. "[인간은] 앞날을 미리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겁니다. ...만약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앞날을 예측할 수 있다면 살맛이 안 날 것입니다. ...인생은 모르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태어나..

Miscellaneous/etc. 2025.03.08

Krebs 6 (2025.2.27)

방사선 조사 후유증은 상당히 늦게서야 나타난다고들 하는데, 벌써 통증 사흘째. 대낮부터 누워있자니 기분이 여간 착잡한 게 아니다. 비몽사몽 진입 중에 별안간 휴대폰이 울린다. ”요새 출근 안 해? 이사 전에 보자더니 왜 감감 무소식이야?“ 한줌도 안 되는 친구 중 한 녀석이 안부 전화다. 최후까지 내곁에 남는 건 누굴까? 뜬금없이 떠오르는 생각이다.어쩌면 마누라나 자식이 아니라 친구일지도. 이도 저도 아니면 반려동물이라도 키워야 할라나? 아니지. 말년에 갸들 개모차나 밀고 다니는 집사 노릇은 할 짓이 아니라고 본다. 차라리 저번에 애니매이션에서 봤던 것 같은 약간 어수룩한 AI 장착 로봇이 낫지. "대체 어떻게 산 거냐? 암에나 걸리고." 헉, 이건 얼마 전 인터넷에서 어떤 암 환우가 암환자에게 가장 ..

Miscellaneous/etc. 2025.03.07

Krebs 5 (2025.2.17)

방사선 치료 담당의사는 아들 녀석 나이 정도나 되었을까, 앳된 여의사다. 눈빛이 초롱초롱… '사이버나이프'라는 정말 생소한 이름의 치료법으로 결정되었단다. 여전히 잠이 안 와서 뒤척이다가 ㅡ 평소 잘 꾸지도 않던 요상한 꿈은 비몽사몽간에 또 왜 그리 자주 꾸는지! ㅡ 포기하고, 대신 큰 병원 외래로 가기 전까지 원래 다니던 대전 병원 어플 게시판에 글을 남겼다. 생검 확인 작업 시스템을 개선하는 게 좋겠다는 취지로. 잠이 들긴 했었나? 새벽에 눈이 떠져 폰으로 이리저리 검색해보니 암 전문 기관 의사들이 공동 집필한 논문을 찾을 수 있었다. 국내엔 2002년경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시술되기 시작한 것 같으니 아직 보급된 지 20여 년밖에 안 된 새로운 방사선치료기법인가 보다. 금침을 체내에 영구적으로 삽입하..

Miscellaneous/etc. 2025.03.07

Krebs 4 (2025.1.21)

방사선 종양학과 대기실은 머리에 두건 쓴 여성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부작용 때문이리라. 나야 여차하면 집에서 머리카락을 밀어내면 되니 그 사람들보다야 특권을 누리는 셈이다.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어떤 여성 환자가 간호사에게 잔뜩 불만을 털어놓았다. 몸이 무척 불편하고 보호자도 없는 듯 보였다. 나중에 병원 관계자가 와서 진정시키는 걸 보고서야 내 마음도 평정을 되찾았다. 새벽에 깨어 폰 들여다보다 우연히 어느 암 환자 블로거의 글을 발견했다. 어차피 공동주택인 아파트 단지 내에서 지들이 데리고 아니 모시고(!) 다니는 반려동물 똥오줌도 분간 못해 치우지도 못하는 인간들이 천지 삐까리인데, 그들한테 뭔 제대로 된 위로를 받아내겠다고 ㅎ."Quid desideras, quod consolatus es ab..

Miscellaneous/etc. 2025.03.07

예술, 철학 그리고 호크니의 봄

>는 예술비평가 게이포드(Martin Gayford)가 화가 호크니(David Hockney)와 오랜 기간에 걸쳐 나누었던 대화를 바탕으로 엮은 책이다. 우리말 번역이 나온지는 좀 오래됐는데 난 최근 어느 FM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되었다. 방송 작가도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원제는 Spring cannot be cancelled이니 번역서(주은정 옮김, 시공사, 2021)의 제목과는 약간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림을 잘 몰라서 그런가 책 곳곳에 삽입되어 있는 호크니의 그림들이 별다른 감흥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무식하니 용감하게 평하자면, 그저 조금 단순한 터치로 그려낸 풍경화와 정물화가 대부분이며, 첫인상으로는 사물에 대한 표피적인 묘사에 불과하고 뭔가 깊이가 부족해 보인다. 내가 갖..

Miscellaneous/etc. 2025.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