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jamin Lee Whorf(1897-1941)는 MIT에서 화학 공학을 공부했고, 보험회사에서 화재 예방 전문가로서 일하기도 했는데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에 언어에 관련된 독특한 주장을 펼쳤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언어의 구조는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구조가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각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이 가설의 시원은 원래 18세기 독일의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그리고 역시 철학자였던 빌헬름 폰 훔볼트였다고. 내 기억으론 20세기 초 일본의 스즈키 같은 일부 철학자들도 비슷한 가설로 중국철학에 논리학이나 형이상학에 해당하는 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쳤다!]
워프의 주장은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데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모국어가 우리의 마음을 강요하여 어떤 특정 사고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어떤 한 언어에 다른 언어에는 있는 어떤 특정한 개념이 없을 경우, 그 전자의 언어 사용자는 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또 어느 언어가 미래 시제를 갖지 않을 경우 그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미래 시간에 관해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만일 이런 주장이 참이라면, "Schadenfreude"라는 독일어 단어를 들어본 일이 없는 영어 사용자는 "남의 불행을 고소해 하는 일"을 이해하기가 곤란하다는 얘기가 된다. 이처럼 정말 기존의 어휘들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개념들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어떤 새로운 사실을 배운다는 일이 어떻게 해서 가능할까?
언어학자 Roman Jakobson은 언어들 사이의 차이에 관한 핵심적인 사실을 “Languages differ essentially in what they must convey and not in what they may convey.”(언어들은 그것들이 전달할 수 있는 것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전달해야만 하는 것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다르다)라는 간결한 명제로 표현했다. 그러므로 만일 상이한 언어들이 우리의 마음에 상이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우리의 언어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생각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언어가 우리로 하여금 습관적으로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당신에게 영어로 “I spent yesterday evening with a neighbor.”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나의 이웃 친구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궁금해 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그건 당신 일이 아니니 관심을 끊어달라고 공손히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만일 불어나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면, 나는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지는 못할 것이다. 언어의 문법이 나로 하여금 "voisin"이나 "voisine" 또는 "Nachbar"나 "Nachbarin" 사이에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언어들은 내가 당신에게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내 친구의 성에 관한 사실을 당신에게 알리도록 강요한다. 물론 이것은 영어 사용자가 남성 이웃과 지낸 밤과 여성 이웃과 함께 보낸 밤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단지 영어 사용자들은 이웃이나 친구, 선생, 그 밖의 다른 여러 사람들이 대화에 등장할 때마다 그들의 성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독일어나 불어 같은 유럽의 다른 언어권 사람들의 경우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반면 만일 내가 영어로 내 이웃과 함께한 저녁에 대해 당신에게 설명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 이웃의 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 다른 사실, 예컨대 그 저녁 시간에 관한 어떤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는 없다. "whether we dined, have been dining, are dining, will be dining and so on"(우리가 저녁을 한번 먹었는지, 여러번 먹곤 했는지, 먹고 있는 중이었는지, 먹을 예정인지 등). 반면 중국인들은 이런 식으로 행위의 정확한 시점을 서술하지 않아도 된다. 동일한 동사형태를 과거나 현재, 미래의 행위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중국인들이 시간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어떤 행동을 묘사할 때마다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뜻한다.
당신의 언어가 당신으로 하여금 어떤 유형의 정보를 상술할 것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다른 언어 사용자들은 늘 생각하지는 않아도 될 세계의 어떤 부분이나 경험의 어떤 측면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우리가 그러한 언어 습관들에 어릴 때부터 익숙해져서 마음의 습관이 형성된다면, 이것은 당연히 언어 차원을 넘어서 당신의 경험, 지각, 연상, 느낌, 기억, 세계에 대한 태도 등에 영향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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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t 생각: 우리가 사용하는 모국어가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상이성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거기에 초점을 두다 보면 서로에 대한 이해의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될테니까. 그러나 외국어를 익힌다면 그대 사고의 지평을 확대시킬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