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류 or 너스바움의 오류?(hexis vs tyche/energeia)

Kant 2024. 6. 14. 17:50

너스바움의 해석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치들 사이의 갈등 상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견을 피력했다. 어떤 가치에 관련한 탁월함, 예컨대 비범한 용기, 정치적 사안에 대한 헌신적인 참여, 친구들에 대한 사랑 등과 같은 덕목들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결함을 지닌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자주 그와 같은 품성적 요건들로 말미암아 삶 자체를 지속하는 일과 갈등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장의 근거는 대체로 이러하다.

 

훌륭한 품성을 지닌 행위자는 가치들 사이의 갈등 상황에서 비록 자신이 악한 행위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그 상황을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선택 상황으로 간주한다. 탁월한 [유덕한] 사람은 우정이나 사랑과 같은 무언가 고상한 일을 위해 희생할 때, 자신의 안전이나 돈 같은 것들은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친구나 국가에 대한 사랑은 때로는 훌륭한 삶과 좀더 긴밀하게 연관된 희생을 요구한다. 훌륭하게 활동할 수 있는 기회나 심지어 삶 자체를 [친구나 조국을 위해] 희생시키는 등과 같은 것들을 말한다(1169a18-b2).

 

훌륭한 품성을 지닌 사람의 경우에는 우연적인 충돌 상황으로 인해 훌륭한 삶이 감소될 수는 없으며, 실제적인 상실이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론가들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훌륭한 사람의 훌륭함은 우연적인 일들에 의해 영향받을 일이 없으며, 그 사람이 선택하는 고귀한 가치는 그가 에우다이모니아의 감소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게 해 준다고 말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연의 개입으로 초래될 수 있는 활동 상실이나 삶의 박탈이 비루한 사람보다는 탁월한 사람에게 더 큰 손실이 된다(a1)고 주장한다. 그 사람이 더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그의 삶은 가치면에서 더 풍요로우며(b), 따라서 그것의 상실에 이르게 하는 선택도 그만큼 더 고통을 준다는 것(a2).

 

용기 있는 사람이 온갖 탁월함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좀더 에우다이몬에 가까이 이른 상태라면, 그런 사람은 죽음을 전망하며 그만큼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살아갈 가치를 더 많이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고, 또 자신이 가장 좋은 것들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통스런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용기를 낼 것이고, 아마도 더욱 그렇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좋은 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전쟁에서 더 고귀한 것을 선택할 것(c1)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탁월함에 관한 모든 일에서 늘 유쾌한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일들이 목적에 도달하는 경우(d)를 제외하면 말이다.(1117b10-16)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곳에서도 탁월성이 자기 충족성은 감소시키는 반면 취약성(vulnerability)은 오히려 증가시킨다고 생각했다. 탁월성은 고도의 가치를 지닌 무언가를 주기도 하지만, 운이 관련되는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을 포기하라고 명령하기도 한다. 탁월성이 반드시 좋은 시간을 향유하는 것과 연결된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만 않다면, 그것이 위험과 고통을 수반한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고귀한 활동이 목적을 성취할 경우에는 쾌가 따르게 된다. 하지만 세상이 이 같은 성취를 방해한다고 해도 훌륭한 사람은 여전히 고귀하게 행동하는 편을 택할 것(c2)이다(1174a4-8).

 

 

너스바움의 해석은 그다지 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 역시 별 어려움 없이 a2나 b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a2에 동의할 수 있다고 할 때, c1, c2 같은 결과가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나는 b를 주장할 수 있는 이유를 좀더 세심하게 고려해 본다면, 죽음조차도 탁월한 심성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서 박탈해갈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꼭 d가 아니더라도 a1은 그 근거가 부족하다고 믿고 싶다.

 

너스바움을 읽다 보니 마침 유학 시절 라틴어 시간에 읽었던 텍스트가 떠올랐다.

 

[우리가 그곳에 앉아서 술잔으로 목을 축이고 있을 때 사단 의무대에 배속되어 있던 나이 어린 사관후보생이 전출신고를 하러 왔다. 그는 전출 명령을 받아 다음날 비행기로 적에게 포위된 채 우리가 주둔해 있던 크림반도 지역을 벗어나 자신의 고향 부근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친구를 훑어보았다. 음, 그러니까 이 금발의 젊은이가 구원을 받는 거로군. 이 친군 독일행 비행기를 타고, 우리는 트로이전쟁 같은 이 전란 틈새에 끼여 야전에서 죽게 된단 말이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의무대 군의관이 그 젊은이에게 마시고 있던 소주를 한잔 권했다. 그 시각이 술을 마시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하튼 그 어린 친구는 그 이른 시간에도 자신의 소속 대대 군의관이 권한 축배를 사양하지 않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눈에 뜨일 정도로 거부감을 나타내면서도 그는 잔을 받아 들었다. 동시에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조국이 위태로운 그때 그 상황에 그곳에 모여 소주나 마시고 있던 나이 든 자들 모두를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작센지방 출신의 인문주의자였던 군법무관이 그 상황을 그 젊은 친구에게 세련된 방식으로 가르침을 베풀 기회로 삼았다. 그는 테르모필레 지협에 세워져 있는 페르시아전투의 스파르타 영웅을 기리는 비석에 새겨진 저 유명한 비문을 인용했다.

 

“이보게, 독일에 돌아가면 ... Αγγέλλειν Λακεδαιμονίοις ότι τήδε κείμεθα τοις κείνων ρήμασι πειθόμενοι.”(이곳에 우리가 누워 있다고 라케다이몬 사람들에게 전해주게. 우리가 그들의 명령에 따라 여기서 죽었노라고)

 

그 생도는 뭔 말인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법무관을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 “모르겠습니다, 법무관님.” 그러자 법무관이 자기 잔을 들어 올리며 같은 문장을 라틴어로 반복했다.

 

 

“Dic, hospes, Spartae, nos te hic vidisse iacentes, dum sanctis patriae legibus obsequimur.”(길손이여, 스파르타에 가면 우리가 여기서 쉬고 있는 걸 보았다고 전해주게. 조국의 신성한 법이 명령한 것에 따르다 보니 그리 되었다고.)

 

하지만 그 젊은이는 라틴어도 이해하지 못했다. 작센 출신의 인문주의자는 이렇게 말하며 그 상황을 끝냈다. “헐, 이자는 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목숨을 부지하게 되는 걸까?”]

 

위의 법무관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전쟁이라는 불운을 피할 수 없던 상황이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에게 더 큰 고통을 준다고 한탄하며 더 극심하게 슬픈 죽음을 맞이했을까? 하기사 고전어 좀 할 줄 안다고 탁월한 [유덕한] 사람이라는 보장이 있겠는가. 또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쯤은 한낱 필부라도 익히 알고도 남을 일 아니겠는가.

굳이 아리스토텔레스[너스바움?] 주장에 기대지 않더라도, 살 기회를 그저 평범하게 누리고 있는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역사 속 탁월한 인물들의 희생에 빚을 진 찌질한(?) 인간들일 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