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둠의 문 앞에 도달하게 될 그 언젠가를 기다리며
꿀로 그득한 영원한 밀랍의 방들처럼 이 잔을 가득 채워
정원과 꽃이 만발한 들판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꿀벌들 같이
(에른스트 융어, '헬리오폴리스')
머리말
철학은 결코 곰팡내 나는 책 속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이미 죽은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의 인간 존재의 핵심에 관한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된 이래로 항상 문제가 되어 왔고 또 앞으로도 문제가 될 이른바 의미에 관한 물음이 그것이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으며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 죽음의 어두운 지평 너머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철학이라는 학문 체계를 직업적으로 연구할 의무가 없는 사람들은 각자가 알아서 삶의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이르러 뒤돌아본다면, 때로는 자신들이 진정한 정신적 양식을 발견한 적도 많지만, 그저 허접한 쓰레기나 도깨비불 같은 것을 만난 적도 적지 않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인생에 방향을 제시해 준 이정표를 만난 적도 있을 것이다. 정신세계의 위대한 인물들이 남긴 발자취를 더듬는 일은 우리가 버려야할 것과 불변의 진리로서 간직해야 할 것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기에서 우리가 떠나고자 하는 철학 여행은 위대한 사상가들이 밟아갔던 정신적 여정들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해석이 제공하는 불안정한 지반 위에서 의지할 수 있는 지지대를 발견하고자 한다.
우리가 다룰 인물들은 물론 데카르트나 칸트 같이 정신사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사상가들이다. 그밖에 인간성의 아주 깊은 부분을 인식하고 지적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사상가들, 예컨대 마틴 부버 같은 이도 언급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안 루이브뢱처럼 고요한 정신의 심연에서 잠수를 즐긴 사상가도 있다. 스피노자, 헤겔, 하이데거 등은 영롱한 빛으로 우리를 매혹하기도 하고 차가운 다이아몬드처럼 우리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밀기도 한다. 에디트 슈타인 같은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계 속에 빠져버려 허우적대며 고통당하면서도 마침내 확고한 지반을 발견한 경우이다. 시대정신에 맞서는 애매성의 추구와 저항의 몸짓으로 인하여 망각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요한 게오르그 하만 같은 이도 우리의 관심 대상이다. 거물급의 편파적 사상가들로는 피히테, 쇼펜하우어, 아도르노 등이, 비극적으로 좌절한 인물들로는 횔덜린과 니체가 등장한다. 라이프니쯔와 셸링은 대단히 사변적이면서도 폭넓은 정신을 소유했고 다양한 분야에서 자극제 역할을 수행했던 사상가들이다. 일생 동안 지칠 줄 모르게 정신적 보물들을 파헤치고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준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끝으로 우리에게서 먼 과거의 희미한 역사 속 인물들이지만 언제나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요소들을 매우 깊이 파악했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쿠자누스 등도 빠트릴 수 없다.
그들의 길을 따라가는 일은 한편으로는 사유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문자 그대로 그 사상가들의 삶과 실존적 배경을 가까이 접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들이 자신들의 흔적과 발자취를 남기고 또 죽어간 그 장소에서 말이다. 거기에서 그들은 결정적인 인상을 받았거나 혹은 그들의 사상과 삶을 시작했으니, 우리는 거기서 삶의 해석학이라는 의미에서 명상의 시간 여행을 시작할 수 있는 문을 발견한다. 여행하는 동안 찾아가는 장소들은 역사적 사실의 현장으로서 가끔은 깊이를 동반한 홀연한 깨달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상상력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 사람들의 역사적인 상황을 직접적인 감정이입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컨대 보이론의 에디트 슈타인이 걸었던 길이나, 니체가 기거했던 실스-마리아의 방이나, 하이데거의 산막, 토마스 아퀴나스 가문의 성들과 대저택 들을 둘러보고자 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먼저 걸어간 올바른 길과 그릇된 길은 모두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해답을 발견하게 해준다. 이때 철학은 인생의 교훈이자 지혜의 학문으로 다시 새롭게 탄생하게 되며, 우리를 시간 속에서 부침하는 것들의 밖으로 안내한다. 거기서 우리는 내면의 독자성과 자유를 유지한 채, 본질적이지 않은 것이거나, 원래 우리가 친구의 모습 또는 바닷물에 씻겨진 해안가의 아주 작은 조개껍질에서조차 쉽게 발견할 수 있을 본래적인 것을 못 보게 만드는 일체의 것들을, 무시할 수도 또 그것들로부터 거리를 둘 수도 있게 된다. 스스로 이러한 여행을 떠나는 독자는 자신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자신만의 만남을 갖게 될 것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을 위해 철학자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펼쳐보여질 진리는 언제나 하나이다.
내게 자주 걸림돌이 되었던 철학적 개념들의 험난한 절벽을 통과해 갈 수 있도록 30년 동안이나 나의 등반을 도와주신 은사 빈센트 베르닝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분의 지적들은 내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아내 헬가 역시 나의 여행을 대부분 함께 해주었다. 아내는 우리가 마주쳤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내가 주목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바드 호네프에서 2005년 1월에
신앙과 이성 - 토마스 아퀴나스가 살았던 로마와 라티움 지방
북쪽의 구릉지대로부터 리리 계곡을 향해 돌출해 있는 헐벗은 산등성이가 “로카세카”, 즉 건조한 암석바위로 불리는 것은 누가 봐도 당연한 일 같다. 올리브 나무들, 살지고 가시 많은 오프티에 선인장들이 같은 이름의,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다. 붉은 빛깔의 꽃을 피운 오를레안더 관목들은 황갈색 대지 이곳저곳에 반점처럼 흩어져 있고. 위쪽 마을에서 시작되는 좁은 도로가 갈색으로 타버린 원추형의 산기슭까지 휘감아 올라가며 삐죽삐죽 솟아나 있는 마끼아 [지중해 연안에 퍼져있는 늘 푸른 관목 숲 - 역자 주] 사이사이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옛날 그곳에는 아퀴나스 가문의 성채가 있었다. 도로는 아치 모양의 문 앞에서 끝난다. 그 문을 통과하여 아주 오래된, 이끼로 덮인 포석(鋪石)들 위를 걷노라면 가파르게 경사진 바위 위에 걸쳐진 테라스를 발견하게 된다. 그 위에 서면 리리 계곡의 평지에 펼쳐져 있는 과일 농장들과 마을들, 그리고 저 멀리 아래쪽에서 피어오르는 열 안개 위에 둥실 떠있는 듯 보이는 아우소니 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1669미터 높이의 카이로 산이 솟구쳐 있다. 이곳은 해안가를 따라 뻗어있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와 더불어 두 번째로 중요한 남동부 연결통로인 라티나 가도(Via Latina)에서도 전략적으로 훌륭한 지역이다. 로마의 영향권 내에 속하는 고대 문화의 중심 지대였던 라티움 지방에 접해 있는 이곳은 그곳으로부터 대략 일백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지만 나폴리의 세력권 안에 있는 곳이기도 하다.
테라스 위에 마을의 석조 교회가 걸려있다. 이 교회는 아퀴나스 가문의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봉헌된 건물이다. 그는 1224년(또는 1225년)에 이 로카세카 성에서 태어나 5살까지 여기서 성장했다. 어린 아이에 불과했던 때 그는 가까이, 카이로 산 뒤의 구릉에 자리하고 있던 몬테카시노 베네딕트 수도원에 보내져 교육 받았다. 토마스는 그의 부모 란덜프 아퀴나스와 테오도라 아퀴나스의 권력 게임의 수단이었다. 그들은 아퀴나스 가문의 영향력을 확장시키려 했다. 성문 앞에는 “아퀴나스 백작의 성”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으나, 사실 란덜프는 백작이 아니라 기사에 불과했다. 시칠리아의 슈타우펜 왕국과 교회국가의 권력이 서로 마주하는 요충 지역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판단은 토마스의 부모들로 하여금 그러한 갈등 상황이 내포하는 잠재 에너지를 그들 자신의 이익으로 만들어보고자 하는 야심을 갖게 만들었던 것이다. 토마스의 부모는 토마스를 영향력 강한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수도승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의 두 형제들, 아이모와 리날도는 슈타우펜 왕가의 프리드리히 2세 밑에 들어가 복무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다시 교황편에서 투쟁하기도 했다.
아퀴나스 가의 권력 게임에 언제나 행운만 뒤따랐던 것은 아니다. 리날도는 프리드리히 2세를 공격하는 계획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1246년 사형당했다. 토마스 역시 1239년 몬테카시노 수도회가 정치 소용돌이에 휘말려 거의 붕괴되자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당시 그는 15세 정도의 소년이었고 그때까지는 세상을 아직 로카세카 성과 몬테카시노의 수도승들의 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기만 했었다. 계곡 밑의 세계는 그로부터 항상 멀리 떨어져 있었고 한눈으로 조망할 수 있는 장기판 위에 축소되어 있었다. 모든 것들은 개방되어 있었고 분명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그 위로는 별이 총총한 하늘이 거대한 천막처럼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미 여기서 후일 그의 철학 방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의 영혼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그것[철학]은 자신 위에 존재하는 것을 올려다보며 스스로를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는 것으로 경험했으며, 마찬가지로 이 세계의 사물들을 내려다보면서는 무한하고 보편적인 것으로서 경험했다.”(Lakebrink 430) 그의 위대한 철학서들 가운데 두 “대전들”(Summen)은 나중에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명료하고 정교한 구조를 통해 반영하게 된다. 그것은 일체를 질서 정연한 분류 속에서 조망하고 방대한 전체 구도에 의해 사유하고자 하는 시도로 나타났으며, 그러한 시도는 신앙과 이성에 기초하는 학문 사이의 균형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토마스가 베네딕트 수도회의 일원이 될 것을 채 서약하기도 전에 그곳을 떠나야만 하게 되자 그의 부모들은 그를 위해 다른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장의 충고에 따라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나폴리에 세워진 국립대학에 보내진다. 이 대학은 슈타우펜 왕조에서 일할 엘리트 행정 관료들의 교육을 맡고 있었다. 어린 토마스에게는 그곳의 생활이 이중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음에 틀림없다. 조용하고 균형 잡힌 수도사의 삶으로부터 갑자기 삶의 활기가 넘치는 항구 도시로 이사한 것도 그렇고, 나폴리 대학에서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고 가르쳐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비정통 사상을 대면하게 된 것도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특히 아랍 철학자 아베로이스의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들을 근본 물음들에 있어서 기독교 철학과 조화할 수 없는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우리는 5년 동안의 학문 연구가 그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는 많은 발전 과정을 겪었으리라. 귀족 아퀴나스 가문 사람으로서 그에게는 프리드리히 2세를 위해 공직에 몸담을 기회도 충분했을 것이다. 낙천적인 도시의 유혹과 세속적 즐거움들은 그러한 인생 설계를 강력하게 추천했을 수 있다. 수도사 경력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불과하지 않은가. 아베로이스가 일방적으로 해석한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를 신앙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아마도 그가 1244년 19살 때 내린 결정보다 그의 가족을 더 기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세속적인 모든 경력들을 포기하고 아퀴나스 가의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뒤로 한 채 그 당시 막 새로 생겨난 도미니크 탁발수도회에 들어갈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 당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탁발수도회 운동을 상상해본다면 토마스의 그러한 결심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운동은 영적인 감동에 사로잡힌 “청년운동”(Pieper 40)으로서 진정한 기독교 세계로의 복귀를 내세웠다. 자주 오로지 봉록과 외형만을 추구하던 교회 중심 기독교는 진실하고 깊이 있는 종교성을 추구하던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남편이 죽은 뒤에 가사를 꾸려가던 테오도라부인은 그의 아들이 탁발하고 설교하며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아들 리날도로 하여금 이미 수도회 총감독 요하네스 폰 빌데수하우젠과 함께 파리를 향해 로마 북쪽에 머물던 토마스를 데려오도록 했다. 수도회의 규칙은 탁발수도사들이 말과 같은 짐승의 힘을 빌려 이동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리날도와 그가 인솔하는 군인들은 북으로 향하던 수도승들을 곧 따라잡을 수 있었고 토마스를 붙들 수 있었다. 로카세카로 되돌아가는 도중에 그들은 아퀴나스 가의 원거리 성채인 몽테 상 지오반니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리날도는 짓궂은 장난을 치는데, 토마스가 기거하는 방에 매춘부를 집어넣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일도 또 그 후 일 년 간 어머니의 감시를 받으며 로카세카 성에서 보냈던 기간도 토마스를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방에 틀어박혀 성경을 공부하고 당시 신학자들의 교과서였던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글들을 연구했다.
이 지역에서는 전통에 따라 로카세카 성 아래에 있는 마을의 한 중세식 건물을 “Casa di San Tommaso”(토마스의 집?)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우리는 토마스가 성채에 머물렀을 것이고 테라스에서 나와 마끼아 사이를 걸어 올라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가파른 산허리에는 성벽들과 보루 등이 줄지어 서있는데 이제는 많이 무너져 내리고 망가져버려 농부들이 건축 자재로 쓰기 위해 떼어내 가기도 한다. 어떤 것이 성벽이고 어떤 것이 본래의 바위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리는 야생 펜헬 [향료와 차로 쓰이는 회향]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도마뱀이 암석 밑으로 재빨리 기어들어가고 나비들이 바위에 핀 꽃들 위로 날아다니는 모습 또한 목도할 수 있다. 마을로부터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올 뿐, 가끔씩 멀리서 사람들 소리와 작은 소음들이 들려오는 것 말고는 조용한 곳이다. ......
신의 필연성 - 스피노자와 레인스뷔르흐, 헤이그, 그리고 암스테르담
북해로부터 불어온 신선한 바람은 잿빛 구름띠를 걷어내고, 짙푸른 히아신스 꽃밭이 우윳빛 태양 아래에서 반짝이며 펼쳐져 있는 광경이 마치 모든 형체를 초월한 것처럼 보인다. 힐러홈과 노르트바이크 사이의 네덜란드 화초 재배단지인 “볼렌스트레이크”에는 지금 봄이 한창이다. 희고 노란 별 모양의 수선화가 히아신스, 튤립 등과 어우러져 아주 다채로운 색채를 뽐내며 들판을 물들이고 있다. 야생으로 자라난 꽃들은 경사진 언덕들과 심지어 고속국도의 중앙선에까지 피어나 있다. 생기가 넘치는 녹색 초원 위에는 어린 양들이 아직 어색한 몸짓으로 뛰어다닌다. 작은 도시 레인스뷔르흐는 “볼렌스트레이크”의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데, 실용적인 현대식 건물들과 밀집상가들이 이 도시의 특징을 이룬다. ......
스피노자가 1660년부터 1663년까지 살았던 단순한 농가식 벽돌 건물은 도시 교외에 줄지어 서있는 현대식 건물들과 거주단지의 모습과는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스피노자가 이곳에 피신해 지내던 당시의 레인스뷔르흐는 모래언덕과 숲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었다. 네덜란드 상인 귀족 사회에서 힘깨나 쓰던 후원자들은 모든 존재자들을 포함하는 전일성에 대한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사상이 정통 유대교뿐 아니라 캘빈교와도 점점더 충돌을 빚자 그의 안전을 위해 그를 이 외진 장소에 머물게 해주었던 것이다. 스피노자는 1632년에 포르투갈 유대인 이민 가족에서 태어나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구역에서 성장했다.
그는 유대계 자유사상가 델메디고의 저서들을 통해 수학과 자연과학에 자극받은 르네상스 철학에 접할 수 있었다.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가계 일을 도우면서도 스피노자는 라틴어를 배웠고 독학으로 마이모니데스, 아리스토텔레스, 아베로이스 등의 작품들을 섭렵했다. 그는 또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꿈을 가졌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사상에 몰두하기도 했다. 한 발짝 한 발짝 유대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가기 시작하던 그는 마침내 유대인 공동체와 갈등을 겪게 된다. 자유사상가적인 기독교 분파였던 콜레기안파 사람들과 교우하며 지내던 터라 그러한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마침내 아버지의 사망과 더불어 그동안 가족을 배려하여 피해왔던 유대인 교회와의 직접적인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포르투갈 유대인 교회는 일단 스피노자에게 30일간의 반성 기간을 허용하는 임시 추방을 명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드디어 1656년 7월 완전한 추방을 명하는 “헤렘”[파문]에 의해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축출당하게 된다.
모든 등을 끄고 양의 뿔로 만든 호각을 부는 동안 저주문을 읽어 내려가는 그 음침한 의식에 스피노자는 당연히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유대 세계와의 모든 인연을 단호하게 끊었다. 아버지의 가게에 대해 갖고 있던 자신의 상속분을 동생에게 처분한 스피노자는 그 후 여러 해 동안 자유분방한 인본주의 사상가였던 프란키스쿠스 반 덴 엔덴에게 은둔해 있었는데, 이 자는 암스테르담 교외에 라틴어 학교를 열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거기서 반 덴 엔덴의 히브리어 선생으로 일하면서 동시에 그의 제자로서 자신의 지식을 심화시켜 갔다. 그는 물리학의 실험을 수행했는가 하면 토마스 홉스의 저서들을 읽었던 바, 홉스의 기계론적이고 수학적인 사상은 스피노자가 이미 내딛었던 방향에 더욱 탄력을 주었다. 이외에도 스피노자는 나중에 생계를 꾸려나가는 확실한 수단이 되었던 기술, 즉 광학 렌즈를 만드는 방법을 익혔다. 그 자신의 철학적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를 주었으며 르네상스 철학의 최신 업적이기도 한 데카르트주의와의 만남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실체 개념의 정의를 받아들였으나 데카르트가 억지로 도입한 실체 개념, 즉 창조된 유한한 실체들의 개념은 수용하지 않았다. 데카르트의 급진적인 실체 개념은 그의 수학적 방법, 그리고 고대 아랍-유대의 사상들과 조르다노 부르노의 전일성 이론 등으로부터 받은 자극과 함께 반 덴 엔덴에게 체류하던 1656년부터 1660년 사이의 스피노자의 체계 안에 녹아들었다. 그는 그가 수용한 모든 이론들보다 더 일관된 방식으로 신, 세계 그리고 인간을 자신 안에 포함하는 유일무이한 실체의 개념을 고안해 냈다. 모든 존재가 그에게는 신과 동일한 이 실체의 양태와 속성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사물들은 신 안에서 그 신의 일부로서 생겨나되 기하학의 명제들이 그 전제들로부터 도출되는 것과 동일한 필연성에 의하여 생겨난다. 그러므로 인간존재의 개체성은 극복되는데, “인간 정신은 무한한 신적 지성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2/179). 인간 정신은 신 안의 산출 운동이 그것을 유지시키는 동안만 성립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신 안의 필연성에 의해 유래하므로 의지의 자유는 가능하지 않으며, 신 자신조차 자유롭지 않다.
스피노자는 먼저 자신의 사상을 기독교 자유사상가 모임의 지지자들과 대화하며 발전시켰다가 나중에 “신 그리고 인간 및 인간의 행복에 관한 소고”라는 처녀작에 담아내었다. 그의 이론이 가지는 본질적인 특징들은 이미 그 작품의 다음 문장들에서 압축되어 잘 표현되어 있다: “자연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인식되며 다른 사물들에 의해서는 인식되지 않는다. 자연은 무한한 속성들로 성립하는데 그 각각의 유(類)에 있어서 무한하고 완전하다. 그리고 그 본질적 성질에는 존재가 속하므로 그 자신 외부에는 어떠한 본질적 성질이나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그 자연은 유일한 지배자이자 최고의 찬양을 받는 신의 본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
레인스뷔르흐는 스피노자의 은둔처로서 적합한데다가 헤이그에 인접해 있어서 영향력 있는 그의 지인들이 방문하기 쉬웠다. 자유사상가적인 콜레기안파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그곳은 특별한 관대함이 지배하는 곳이기도 했다. 스피노자는 레인스뷔르흐에서 외부로 표가 나지 않게 그를 돕는 후원자들의 보호 하에 지냈다. 그들은 한밤중이나 안개 낀 날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를 방문하곤 하였다. 당시 스피노자는 렌즈를 갈아 얻은 수입으로 지내기 위해 금욕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한편 그는 활발하게 서신을 교환하던 암스테르담의 지기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레인스뷔르흐에서 스피노자는 자신의 체계를 계속 발전시켜 나아갔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주저인 윤리학을 저술하기 시작했으며, 그는 이 저서를 엄밀한 기하학의 방법에 따라 구성하고자 했다. ......
스피노자가 살았던 레인스뷔르흐의 작은 집은 그의 가난했던 삶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목욕탕 주인 후만에게 세를 내어 살던 두 개의 작은 방들은 그의 작업실이자, 그가 그 안에서 잠자고 공부하던 거실이기도 했다. 거의 퇴락했던 이 건물은 1896년 한 옛 그림에 묘사된 건물 머리 장식 글에 의거해 스피노자의 집으로 판명되었고 특별히 설립된 기념사업회에 의해 정성스레 복원되었다. 이 작은 박물관에는 서신들과 기록물들의 사본 이외에, 유고에 기록된 내용에 따라 거의 완벽하게 복원시킬 수 있었던 스피노자 자신의 장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증축된 건물 천정의 어두운 경사면 아래에는 가공하지 않은 목재로 만든 렌즈 연마기가 동력발판과 함께 스피노자가 사용하던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쇠로 만든 문고리를 두드리면 이 집에 거주하고 있는 여성 관리인이 문을 열어준다. 그녀는 약간의 입장료를 받으며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당신이 네덜란드어를 약간이라도 할 수 있다면, 이 여인으로부터 이 집이 벌판 한 가운데에 서있었던 당시의 레인스뷔르흐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친숙한 사이가 되면 아마도 옛날에는 스피노자의 집주인이 살았을 법한, 그러나 지금은 한 마리의 살찐 검정색 페르시아 고양이가 소파의 우단 자락과 뜨개로 만든 쿠션 사이에서 졸고 있는, 그녀의 거실을 들여다보는 것도 허락받을 수 있을 것이다.
1663년 스피노자는 레인스뷔르흐를 떠나 포르뷔르흐로 이주한다. 그리고 1669년에는 다시 헤이그로 간다. 이때 이미 그는 인기 많은 대화 상대자가 되어 있어서 유명 인사들이 그를 방문했다. 예를 들면 천재 수학자이자 자연과학자로서 토성의 띠를 발견한 크리스탄 하외헌스(이하, 호이겐스)라든가, 윤리학의 신 개념에 대해 토론을 벌였던 라이프니츠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스피노자는 아마 후원자들 가운데 공화제를 지지했던 통치자들의 자극에 의해서 윤리학 작업을 중단하고 “신학-정치 논고”를 집필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그의 국가 철학을 담고 있으며, 여기서 스피노자는 사상의 자유 및 그것을 보장하는 국가체제를 옹호했다. 1670년에 익명으로 출판된 이 작품은 “상인귀족주의의 고매한 국가선언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스피노자는 그러나 대중들이 ‘비이성적이고 선동적이며 방종으로 치닫기 쉽다’는 이유로 민중에 의한 지배를 거부했으며, 군주제 또한 거부했다”. (de Vries 108)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공적인 분노를 야기한 것은 유대-기독교적 신앙 이론을 겨냥한 주장들이었다.
스피노자는 1671년부터 헤이그의 빠리륜스흐라흐트에 살았다. 그런데 1672년 그곳에서 일어난 한 사건은 그 자신이 만들어 낸 체계가 지닌 실천적인 모순을 드러내 주었다. 대표적인 공화주의 정치지도자였던 데 비트 형제가 광적으로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그것이다. 크게 분개한 스피노자는 “극단적인 야만”이라고 쓴 대자보를 들고 피의 현장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다행히 이때 그의 집주인이 문을 걸어 잠금으로써 그는 자신의 생명을 폭도들에게 넘겨줄 수도 있었을 위기를 피했던 것이다.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인간 [즉, 스피노자 자신] 안에서 작동하는 양심과, 살해자들이 다르게 행동할 수도 즉, 도덕적으로 선하게도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그 자신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움직이는 필연성에 관한 그 자신의 이론에 대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1675년 윤리학을 완성했으나 그것이 야기시킬 수 있는 곤란을 피하기 위하여 출판을 포기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곧 복사본으로 그의 친구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1677년 2월 21일 마침내 스피노자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던 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한다. 그를 후원하던 통치자들의 허가에 따라 그는 헤이그 스빠외에 있는 신교회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스피노자가 1671년부터 살았고 1677년 사망한 헤이그 빠리륜스흐라흐트에 있는 그의 집에는 스피노자학회에 의해 연구소가 들어섰으며, 스피노자의 작품들과 중요 참고문헌들이 갖추어져 있다. 거기서 도보로 15분이면 우리는 스빠외의 신교회를 방문할 수 있다. 우리는 황금 사자가 그려진 깃발이 흰색의 고층 건물들 사이에서 휘날리고 있는 멋진 종탑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로 붐비는 스빠외의 반대편 극장 건물의 어두운 유리창은 그 고층 건물들을 반사시키고 있다. 스피노자의 무덤은 이제 얼마간 잊혀진 채 교회의 뒤편 마당 가운데 놓여있다. 비석에는 스피노자의 모습을 담은 부조물이 박혀있으며 그 아래에 “조심하라”(Caute)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는 이 경구로 편지들을 봉인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것에 따라 살았다고 할 수 있으니, 비교적 위험한 내용을 다루지 않은 단 한 권의 저서만을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던 것이다. 또 은둔처에 조용히 머물며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직도 거절했던 일은 유명하다. 비석 위에 얹혀진 현무암 판에는 히브리어로 “너의 민족”이라는 글이 새겨 있다. 이 판은 이스라엘의 초대 국무총리 벤 구리온의 제안으로 설치된 것이라고 한다.
스피노자의 흔적을 가장 잘 찾아가기 위해서는 암스테르담의 시청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다. 시청은 2차대전 시기까지 유대인 거주 지역이었던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약 10분의 1 정도만이 독일 점령기의 박해를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버려진 집들은 약탈의 대상이 되었고 파손되었다. 전후에는 건물 파쇄기가 그 잔해마저 해체해버렸다. 오늘날에는 “요든브레이스트라트” 같은 거리 이름만이 이 지역이 유대인 거주 지역이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스피노자의 생가는 새 시청 건물에서 스바넌뷔르흐스발이 암스텔과 만나는 곳에 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옛날에 유대인 거주지와 도시 중심을 이어주던 푸른 다리 즉, “블라우 브뤼흐”를 지나서 모제스 엔 아론 교회로 갈 수 있다. 1837년부터 1841년까지 신고전주의식으로 지어진 이 옛 가톨릭교회 건물의 전면은 그리스 신전의 회랑을 모방한 것이다. 이 건물은 요즘 문화센터로 이용되고 있다. 스피노자는 아마 이 건물을 지었을 때 헐렸을 옛 건물들 가운데 한 곳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암 바떼루플라인의 벼룩시장은 이미 유대인 거주 당시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직도 활발한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옷, 가재도구, 서적, 화장품, 신, 중고 전기제품 등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낡은 고물들과 함께 진열대 위에서 구매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시장의 북쪽 끝에는 각각 두 개의 커다랗고 자그마한 유대인 교회들을 하나로 이어 만든 유대인 역사 박물관 (Joods Historisch Museum)이 자리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유대인들의 문화 유품들과 네덜란드 유대인의 역사를 기록한 전시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반대편, 암 요나스 다니엘 마이에르플라인에는 1675년 봉헌된 포르투갈 유대인 교회의 큰 강당 건물이 서있다. 스피노자는 바로 그 봉헌식이 이뤄지던 시기에 자신의 윤리학을 출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머물렀다. 교회당 앞의 자갈밭에는 수문장 기념 조형물이 유대인 추방에 항거해 항구 노동자들이 벌였던 파업을 기리고 있다. 요든브레이스트라트의 끝에 위치한 렘브란트하우스는 전후 이 지역 재개발을 견디어 낸 몇 안 되는 건축물들 중 하나이다.
스피노자의 이론은 19세기 관념론적 일원론과 자연주의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신과 세계를 동일시하는 그의 범신론은 마침내 물질의 신격화를 야기하기에 이르렀고,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세계관에 의해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의 가능성을 은폐하는 데 기여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적절하게도 유물론의 시조를 범신론적 전통에서 발견한 바 있다. 아비켄나 및 그 자신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좌파”로 명명한 자들에 관한 짧은 글에서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토마스와 피안의 정신세계로 이르지 않고 조르다노 브루노와 번성하는 전(全)물질에로 이르는 전통이 존재한다.” 일원론적이고 범신론적인 세계해석은 두 가지 매우 상이한 원천으로부터 유래한다. 하나는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자연법칙들 내지는 수학적인 질서와 기술을 통한 자연지배 사상이다. 이것은 자연주의적인 사상가들로 하여금 자연을 영원하며 스스로를 산출하는 자족적인 실재로 간주하게 했다. 다른 하나는 측정 불가능하며 무제한적인 실재에로 고양되어 있는 상태에 대한 신비 체험이다. 이 체험은 인격신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전능한 자연과의 동일성으로서 해석되었다. 블로흐는 신비주의의 전일성 사상이 범신론적인 성향에 의해 행사한 특정한 영향에 대해 올바로 지적하였다. 그러한 범신론적 성향은 자연주의적 입장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범신론적 철학이 지니는 비극적인 측면은, 우리가 자족적인 세계에 대해 체험하면서 스스로가 내동댕이쳐져 있다거나 무상하다고 많이 느낄 때, 또는 세계의 풍요로운 자기 산출이라는 것이 무규칙적이고 맹목적이며 사악할 수도 있다고 느낄 때 잘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쇼펜하우어와 사르트르가 그랬던 것처럼 씁쓸하게 인생을 부정하거나 그것에 넌덜머리를 내거나 구토를 경험하게 된다. 이 정도 되면 우리는 다양함과 변화와 고통을 신 안에서 수용해야 하는 범신론의 내적인 모순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암스테르담을 여행하는 도중에는 데카르트가 죽기 한 해 전까지 마지막 창작의 시기를 보냈던 베스터마르크트 6번지의 집을 방문할 것을 권한다. 베스터마르크트는 그 자체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렘브란트의 묘가 있는 베스터케르크(베스터 교회)의 프린젠흐라흐트와 카이제르스흐라흐트 사이에 있다. 헤이그의 포르뷔르흐에 있는 호이겐스의 옛 농가에는 스피노자의 위대한 동시대인이자 대화 상대자였던 그의 생애와 작품들뿐만 아니라 라이프니츠의 생애와 작품들 역시 전시되어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가 번역해서 나올 책, Harmut Sommer: Der philosophische Reiseführer. Auf den Spuren großer Denker (철학 여행을 위한 안내서. 위대한 사상가들의 흔적을 찾아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