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최재천교수의 “연구와 교육의 패러다임 전환 — 범학문적 접근”을 듣고

Kant 2008. 10. 18. 16:56

저는 지난 주 한 TV 퀴즈프로그램에서 바로 오늘의 주제어라 할 수 있는 ‘통섭’ 개념을 알아맞히는 문제가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토론자 한 사람으로서 반가웠고, 이제 이 개념이 함축하고 지향하거나 의도하는 바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이미 우리 사회의 일반교양 차원에서도 이 개념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서가에 꽂혀만 있던 윌슨의 저서를 빼어서 읽고, 또 최교수님(이하 “발제자”)의 발표문을 듣고서 서양근세철학 전공자로서 제게 떠오른 몇 가지 단편적인 생각들을 옮겨보겠습니다.


①먼저 ‘현재의 학문적 수준과 상황에서 가능한 한도 내에서’ 라는 조건이 붙어야 하겠지만, 학문들의 “많은 분야들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하도록 지혜를 모으자는 근본취지에 저는 매우 공감합니다. ‘Fachidiot’(전공의 백치)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이 21세기나 20세기도 아니고 19세기였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개별과학 종사자들의 좁은 시야가 가지는 문제성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이미 수세기 전부터 퍼져있었던 듯합니다. 제 얕은 지식으로도 18세기 계몽 사상가들이 추구했던, 특히 백과전서파가 지녔던 학문적 파토스 역시 통섭이 추구하는 바와 그리 멀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지하다시피 근세 유럽 학문에서 ‘체계’라는 것은 학문적 지식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고 중세의 ‘summa’ 개념을 대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체계는 학문들 사이의 경계를 허물거나 넘나든다는 의도보다는 지식이 단순한 요소들의 나열이나 집합이 아니라 그 낱낱의 지식 요소들이 특정한 목적
을 지향하는 전체 안에서 차지해야 하는 고유의 위치가 정해져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유럽 근대 철학자들은 학문적 작업을 “건축술”(architectonics)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벽돌 한 장, 기둥 하나도 모두 다 자기 고유의 위치에서 제 기능을 제대로 떠맡고 있어야 전체가, 즉 그 건축물이 특정한 용도를 위해 지어질 수 있고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학문 역시 그 학문적 지식의 목적이 무엇인가가 결정되어 주어지고, 개별 지식 요소들이 기초적인 것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응용되는 것 등으로서 제 위치에서 제 소임을 다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구축되는 지식의 성장은 칸트 같은 철학자의 표현에 따르면, 단순 “coacervatio(누적)”이 아니라, 생명체의 성장과 같은 “articulatio(마디자람)”이라고 합니다.1)

여기서 저는 지식의 “퓨전”이나 “범학문적”(transdisciplinary) 접근과는 사뭇 다른 강조점을 발견합니다. 다시 말해 학자들이 다양한 전문지식을 양산하는 데에 급급할 일이 아니라, 수시로 다른 학문 분야를 돌아보고 그 학문들과 자신의 학문 분야가 어떤 연관 속에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지식을 통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통섭주의자들은 여기에 만족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②두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점은 윌슨 자신이 부정하고 있으나 “과학은 철학도 아니고 하나의 신념체계도 아니다. 과학은 실제 세계를 탐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Science is neither philosophy nor a belief system. It is … the most effective way of learning about the real world ever conceived)2)라는 주장이나, 21세기의 학문이 “자연과학과 창조적 예술을 기본으로 하는 인문학으로 양분될 것”이라는 주장에서 “과학주의”나 “환원주의”의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발제자는 발표문에서 “사회과학은 이미 (…) 상당 부분 생물학과 연계되거나 큰 의미의 인문학으로 흡수될 것이라 예견”합니다.3)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C. F. v. Weizsäcker는 과학주의를 과학을 단순히 참으로 여기는 의식적이고 지적인 태도 정도가 아니라 의식된 사유에 제한 받지 않으면서 과학에 보내는 “전인격(全人格)”적인 “신뢰” 내지 “속성”으로 정의한 바 있습니다.4) 저는 과학이 “실제 세계를 탐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단언하는 태도에서도 바이체커가 보았던 과학주의나 과학종교적 자기도취와 유사한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우려를 하게 됩니다. 신화에서 형이상학 그리고 자연과학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근본적으로 불연속적인 것은 아니며,5) 또 어느 하나가 나머지 것들보다 반드시 모든 점에서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는 세계 이해의 한 방식들로 보는 것이 건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6)

분명 현대는 과학주의의 시대요, ‘과학적 세계관’이라 불리는 것에 대항할만한 관점이 부재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계관의 통일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게 제가 아는 한 철학사의 교훈입니다. 이는 생명체가 지니는 다양성이 적응과 진화에 유리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물질(원소)조차도 변화하고 끊임없이 진화한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없거나 다르게 존재하던 것들을 그때까지 인간이 도달한 정신적 수준에 맞게 이해하는 도구인 학문이 계속 분화 과정을 밟고 새로운 분야가 출현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통섭』은 “창발성”이나 “유전자․문화 공진화”에 대해 언급하되 “복잡성과 창발성의 근본법칙들”이 확실히 드러날 것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7) 그래서 여타 학문들이 특정 학문에로 “편입”된다는 예측까지 나오는 것이겠지요. 진정한 의미의 창발적 진화, 그러니까 원칙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형질이나 변화의 출현은 없다는 것인데, 인류의 후손이 그런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맥 빠지는 사람이 저뿐일까요?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학문 분야가 유행의 힘을 등에 업고 다른 학문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야기된 불행의 역사를 인류가 잘 안다는 사실입니다. 나치 시기의 진화생물학과 사회과학 이론의 잘못된 만남이 그 한 예일 것입니다.


③interdisciplinary 연구가 여태껏 한갓 “multidisciplinary적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는 지적에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실제 학제적인 연구가 성과를 거두고 있는 분야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며, 또 학제적인 연구가 어려운 이유는 진지한 “범학문적 접근”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전문 분야들 사이의 개념상의 의사소통이 가지는 곤란 때문이 아닌가요? 이러한 어려움은 자기 분야 이외의 다양한 분야들(최소한 자기 전공 인접 분야)에 흥미를 가지고 공부하는 딜레탕트한 전문가들을 장려하고 학문교육 단계에서부터 그러한 관심을 유도할 때 극복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학제적 연구 과정에서 개념 사용에 강한 철학자들을 활용하는 방안도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비록 많이 시들해진 전통이기는 해도 철학자들은 보편적인 것을 다루는 전문가로서 자처해 왔으니 개별 학문들의 경계를 넘는 문제들 (예컨대 지식의 의미나 우선순위나 중첩 문제 등에 관한)과 관련해서 귀 기울여볼만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④『통섭』을 읽으면서 특히 아쉬웠던 점은, 아무리 아둔한 머리를 채찍질해가며 찾아보아도 통섭의 당위성을 외치는 프로파간다식 구호를 넘어서는 구체적인 방법론이나 행동 지침 - 예컨대 유전 생물학자는 어떤 식으로 연구하고, 한국 현대사 전공자는 어떻게 연구해야 된다고 하는 - 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받은 인상으로는 윌슨 자신의 지적 성장 과정을 자전적으로 기록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여겨집니다.


마지막으로 제 전공분야인 철학에서의 경험에 국한시켜 볼 때 한국에서의 학문은 아직 넓이를 논할 때라기보다는 좁고 깊고 치밀하게 천착해 들어가는 연구 태도를 더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철학 전공 논문 한 편에서조차 플라톤부터 시작해 칸트 헤겔을 거쳐 하이데거까지 거론해야 대가 다운 면모를 갖춘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아직은 남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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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B 861.

2) E. O. Wilson,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1998, 45쪽;『통섭. 지식의 대통합』, 100쪽

3) 윌슨은 “생물학으로 편입되거나 생물학의 연장선 위에 있게 될 것”이라는 좀더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통섭』, 45쪽 참조.

4)『과학의 한계. 창조와 우주 생성, 두 개념의 역사』(송병옥 옮김, 민음사 1996, 17쪽 참고)

5) 이 점에서 저는 논리실증주의자들에 반대하여 형이상학적 상상력이나 믿음, 꿈, 명상, 종교적인 가르침 등도 과학이론 형성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 포퍼에 동의합니다. K. R. Popper, 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 1983, 190쪽 이하 참고.

6) 비코(G. B. Vico)에 의하면, 신화란 “인간이 보편성을 지닌 지식 체계를 구성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상상으로써 구성한 일종의 지식 체계이며, 순수 정신을 가지고 반성할 수 있기 이전에 감정으로 혼란되고 동요된 상태에서 사물들을 의식하여 얻은 지식이며, 그 표현 형식”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사정은 형이상학이나 경험과학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합니다. “그것들 간의 차이는 그것들이 서로 상이한 역사상의 단계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점일 뿐, 진리 자체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형식에 있어서만 구별될 뿐이라는 겁니다.” (김수배, 『역사 속의 이성, 이성 안의 역사』 95쪽 이하 참고)

7) 예컨대 Consilience, 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