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저서 중 대학생들에게 추천되고 있는 ‘도덕형이상학의 기초’ 국역본은 7여종 된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새 번역본이 2종이나 출간돼 60~70년대 번역본들과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평가가 필요하다. 김수배 교수가 2000년 이후 출간된 번역본을 중심으로 비교·검토해보았다. |
서양윤리학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두 권의 저서를 꼽으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칸트의 ‘도덕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를 거명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후자는 칸트의 또 다른 윤리학 저서 ‘실천이성비판’과 함께 행위의 동기와 의무를 강조하는 윤리 이론의 대표작으로서 서양철학사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이런 지위에 걸맞게 이 작품은 여타의 칸트 저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러 번 우리말로 옮겨졌다. 지금까지 확인 가능한 것만 해도 7종이나 된다; ‘윤리형이상학 정초’(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5),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이원봉 옮김, 책세상, 2002), ‘실천이성비판’(‘도덕철학서론’을 포함, 최재희 옮김, 박영사, 1975), ‘도덕형이상학원론’(이규호 옮김, 박영사, 1974), ‘도덕형이상학의 기초’(서동익 옮김, 휘문출판, 1972), ‘도덕철학원론’(정진 옮김, 을유문화사, 1970), ‘도덕형이상학’(박태흔 옮김, 형설출판, 1965).
이 가운데 대부분의 역서들은 이미 절판됐거나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이므로 이 글에서는 백종현 역과 이원봉 역을 검토해본다.
번역 대본과 형식상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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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봉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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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현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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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봉은 학술원판을, 백종현 역은 원전 재판을 각각 대본으로 삼았다. 학술원판이 번역 대본으로서 갖는 한계점은 이미 칸트 연구자들에 의해 자주 지적된 사항이므로 여기서는 굳이 장황한 설명을 하지 않겠다(칸트가 직접 출판한 작품들을 편집과정에서 충실하게 실어내지 못했음). 백종현은 18세기에 출판된 원전재판을 직접 대본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면 어떤 전집에 수록된 재판본인지를 밝혔어야 했다. 전집에 따라서 원전에 대한 충실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자가 참조했다고 밝힌 바이셰델판도 바이셰델 사후에 다름슈타트 학술도서회에서 나온 버전은 1956년 인젤 출판사의 버전과 차이날 수 있다. 다름슈타트 버전은 60년대 이후 발견된 텍스트 상의 오류들을 지속적으로 수정했기 때문이다.
백종현은 원서(재판본)의 면수뿐 아니라 학술원판의 면수까지 표기하는 친절함을 보여줬으나 이원봉은 학술원판의 면수만을 표기했다. 전공자가 원본을 대조해가며 읽을 경우, 전자에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두 번역서 모두 역자의 해제를 싣고 있는데, 백종현은 부록으로 칸트 윤리학 관련 주요문헌들뿐 아니라 국내외의 칸트철학 관련 석·박사 학위논문 목록까지 소개한다. 당연히 부피가 커졌고 그에 상응해 책가격도 비싸다. (이원봉 역의 가격의 두 배가 넘는다.) 이원봉은 원저자의 주와 역자 주를 책 말미에 함께 배열했다. 비록 괄호 안에 ‘저자주’와 ‘옮긴이주’를 구분해주긴 했으나 원문에 포함된 원저자의 주의 위치를 바꾸어 역자의 주와 같은 차원으로 처리한 사례는 처음 본다. 뿐더러 불행하게도 인명이나 사항에 관한 ‘찾아보기’(색인)를 빠뜨리는 치명적인 잘못을 범했다. 전문연구가는 ‘찾아보기’만을 훑어봐도 그 책의 학문적 수준을 판단할 수 있다. 애초에 학술 번역서로 인정받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던 걸까. 더욱이 초판본과 재판본이 보여주는 원문상의 차이까지 번역에서 무시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번역자가 기본적으로 고려해야할 ‘conjectio’(추정)나 ‘emendatio’(교정)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 같은 우려는, B 13 (학술원판 399쪽 끝부분)의 “두 번째 명제는 이렇다”로 시작하는 단락에서 역자가, 칸트가 어느 곳에서도 언급하지 않은 ‘첫째 명제’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음으로써 사실로서 확인된다.
가독성 개선됐지만 아쉬움 여전해
주지하다시피 칸트의 저서는 난해하기로 악명 높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아무리 수세기 전에 사용된 독일어임을 감안한다 해도 그의 문체 자체는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당연히 번역자의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자 어휘·어투에 익숙한 세대의 번역서들은 칸트가 젊은 세대들로부터 푸대접을 받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 당연한 얘기지만 고전은 그래서 계속 새로운 옷, 새로운 번역 감각을 요구한다.
가독성의 측면에서 볼 때 두 번역본은 한자어에 많이 의존했던 이전 번역서들에 비해 많이 나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번역서만으로 칸트의 생각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지면 제약상 모든 곳을 검토할 순 없으므로 B IX(학술원판 389쪽)에 나오는 다음 내용의 번역만을 음미해 보자. “Gesetze a priori, die freilich noch durch Erfahrung gesch?rfte Urteilskraft erfodern, um teils zu unterscheiden, in welchen F?llen sie ihre Anwendung haben, teils ihnen Eingang in den Willen des Menschen und Nachdruck zur Aus?bung zu verschaffen”. “물론 이 법칙들은, 부분적으로는 어떤 경우들에 그것이 적용되는지를 판별하고, 또 부분적으로는 그것들에게 인간의 의지로 들어갈 입구를 만들어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통해 날카로워진 판단력이 필요하긴 하다.”(백종현 역) “물론 그 선험적인 법칙도 여전히 경험을 통해 날카로워진 판단력을 요구하는데, 한편으로는 어떤 경우에 그 법칙을 적용해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의지가 그 법칙을 실행하는 데 힘이 되기 위해서이다.”(이원봉 역) 밑줄 부분에 대한 정진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것이 인간의 의지에 작용하여 실행을 강조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백종현은 원문을 문자 그대로 옮겨 의미 이해가 어려워졌고, 이원봉은 해당 부분을 슬그머니 얼버무렸다. 이 부분만 본다면 두 번역 모두 정진의 번역에 비해 진보했다고 보기 어렵다.
백종현은 “유사한 또는 동일한 뜻을 가진 낱말이라도 칸트 자신이 번갈아가면서 쓰는 말은 가능한 한 우리말로도 번갈아 쓴다”(27쪽)는 원칙에 따라 의미 차이가 없는 ‘Sittlichkeit’와 ‘Moralit?t’를 각각 ‘윤리성’ ‘도덕성’으로 옮겼으며, ‘Philosophie’와 같은 의미로 쓰인 ‘Weltweisheit’를 ‘세계지혜’로 옮겼다. 그 결과 책 제목 역시 ‘윤리형이상학 정초’가 됐고, ‘sittliche Weltweisheit’는 ‘도덕 철학’이 아니라 ‘윤리적 세계지혜’로 번역됐다. 칸트는 자신이 당시까지도 사용되던 라틴어나 희랍어의 철학 용어들을 독일어로 바꿔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자국어와 외래어의 혼용은 그러한 과도기적 상황에서 연유한 것일 뿐 사상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진 않는다. 굳이 서로 다른 우리말로 옮겨야만 했다면 서로 다른 낱말들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는 모국어, 다른 하나는 외래어라는 점을 반영했어야 한다. 물론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다.
머리말에 등장하는 ‘Physik’이란 단어는 고대 그리스의 학문 개념에 따른 것으로서 ‘자연의 법칙’에 대한 이론적 학문을 의미하므로 ‘물리학’보다는 ‘자연학’으로 옮겨야 뒤이어 나오는 ‘Naturlehre’(자연이론)과도 상응한다. 이 점은 ‘실천이성비판’ A 252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칸트가 ‘Physik’을 좁은 의미로, 즉 심리학에 대립해 ‘물체적 자연법칙에 대한 학문’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곳도 있다. (‘순수이성비판’ B 874 이하, ‘프롤레고메나’ A 24 등에서)
번역어나 표현상의 사소한 이견은 접어두더라도 다음의 내용들은 백종현 교수가 반드시 검토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지적한다. “그것은 학술 산업 전체를 위해 더 좋을 게 없다”(B VII, “더 좋을 것이다”); “도대체가 모든 경험에 독립해 있지 않으면서 순전히 순수 이성에 의거해 있을 수밖에 없을 터인, 윤리성의 진정한 최상 원칙”(B 30, 이중 부정의 독일어 표현으로서 “경험으로부터 독립해서”); “보통 그렇게 되듯이 철학적 가치 판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뿐만 아니라”(B 36, “다른 곳, 즉 제1절에서 그랬듯이”)
이원봉 역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들도 몇 군데만 지적해 본다. “다른 이성적인 존재자들은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다”(B VIII, “존재자들도 그것에 구애받지 않을 수 없다”); “또는 단호함, 뜻한 바에 대한 끈기”(B 1, “용기”가 빠졌다.); “모든 경험에서 독립해 있지 않으면서도 순수한 이성에서 기인해야 하는[경험적이면서도 순수한]”(B 30, 이미 백종현 역의 해당 부분 번역에서 지적한 내용 참조. [] 안의 내용은 무슨 뜻으로 적은 것인지 모르겠다.); “선험적으로 확실히 추측할 수 있는 의도에 필연적인 것이다” (B 42, “의도에 대해서도 필연적인 것이라고 진술해도 좋다”)
두 번역서의 모든 부분을 상세히 살펴보진 않았기에 단정적으로 판단을 내리긴 무리지만, 이상의 검토내용만으로도 이원봉 역은 저렴한 가격 외에는 별로 추천할만한 장점을 지니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남의 번역을 문제 삼고 비판하기는 쉽다. 어깨를 짓누르는 타산지석의 무게를 느끼는 이유다.
김수배 / 충남대·철학
필자는 트리어대에서 ‘칸트 인간학의 성립과 그것이 볼프의 경험심리학과 가지는 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약동하는 자유’ 등의 역서가 있다.
[바로잡습니다] 교수신문 지면신문(제418호, 11월6일자)에 필자가 원래 보낸 원고의 제목과 달리 "원전 옮긴 백종현 譯 추천...모국어와 외래어 구분해야"라고 잘못 나가 원래 제목 "원전 옮긴 백종현 역의 성과...모국어와 외래어 구분해야 하나"로 바로잡습니다. 필자 김수배 교수는 "백종현 역은 현재로서 볼 수 있는 가장 나은 번역본일 수 있으나, 이전 번역본들과 비교해 딱히 추천할만하지는 않다"고 했으며, 교수신문의 입장은 "비록 문제가 있더라도 독자들이 골라볼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으나 필자의 본의를 왜곡할 우려가 있어 바로잡습니다. 또한 "모국어와 외래어 구분할 필요 있나"라는 의도였는데, 뒷부분이 삭제되어 반대의 뜻으로 나갔습니다. 이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