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소크라테스]은 사랑하면서도 사랑에 빠지지 않은 사람처럼 한 젊은이에게 말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그가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바로 그 젊은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에게 연인의 페르소나를 부여해 본다면, 그는 자신이 행할 연설의 올바른 수신인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내가 대화하고자 하는 그 젊은이는 어디 있는가? 난 그 젊은 친구가 내 말을 듣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고 서둘러 떠나버려 사랑에 빠지지 않은 자에게 자신을 허락하는 일이 없도록.”(243 e)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연설을 받아들이는 자가 변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말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젊은이가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물음에 파이드로스가 대답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내 생각엔, 철학[적 저술의 역사]에서 가장 잊을 수 없고 인상깊은 순간을 제공해 준다. 아주 준수한 젊은이, 자기 보호적이며 [소크라테스 같이] 사랑에 빠지지 않는 사람을 흠모하는 젊은이 파이드로스는 이렇게 간결하게 대답한다. “저 여기, 선생님 곁에 있어요. 선생님께서 찾으려 하실 때면 언제나요.”
나는 이 귀기울임의 순간(moment of yielding)이야말로 철학의 순간이라고 말하겠다. 나는 이 장면이 철학에 그저 약간의 문학적 손질을 가미한 것뿐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플라톤이 그랬을 리 없다. 철학적 글쓰기의 천재인 플라톤은 여기서 사유와 행위가, 또 사랑의 [실제] 경험과 그 사랑에 대한 철학적 연설이, 그리고 열정에 대한 철학적 옹호와 개방성 및 수용성에 대한 개인적인 인정이 어떻게 서로 융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
플라톤은 삶과 논증[적 담론] 사이의 이 같은 융합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생각하기에 분명 아주 중대한 무언가를, 즉 심오한 진리의 일부, 즉 자기 철학의 일부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니 내가 나중에 다시 제안하겠지만, 이 융합이 플라톤 자신의 삶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자기 인생의 특정 경험에 의거하여 열정에 대해 <파이드로스>편을 쓴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고 이 대화편이 조금 덜 철학적인 글이 되는 걸까? 분명 그렇지 않다. 아마도 오히려 더 철학적인 성격을 갖춘 글이 되는 셈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더 철학적’이라는 표현이, 진리와 가치를 찾으려는 한 사상가의 헌신적인 작업의 더 깊은 부분에 관한 것이고, 또 그 사람 자신의 [경험] 선택과 어휘들이 논증 형식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면 말이다.
[<파이드로스>편에서도] 진리에 도달하는 능력은 지성이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닌 진리가 모두 중기 대화편들이 요구하는 종류의 일반적인 설명과 정의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배우는 것은 어떤 한 타인에 관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설명에 따르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각자가 각자에게 서로 복잡하게 반응하고 상호작용함으로써 상대방의 ‘신성함’(divinity)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려한다(252 d). 각 개인은 그 타자의 성격을 속속들이 알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은 다시 자기 이해를 증대시키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 안에서도 자신들이 신으로 여기는 대상의 본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에게 푹 빠진 상태에서(in his state of possesion, 252 e) 타자의 ‘습관과 [행동이나 사고] 방식’을 배우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의 그것을 배운다(252 e – 253 a). 이것이 어떤 종류의 이해이며, 또 사랑하는 자들이 말해 줄 수 있는 것이 어떤 진리일까라고 묻는다면, 이에 대한 대답은 복잡하다. 어떤 유형의 인물에 관한 몇몇 일반적인 진실[지식]을 얻게 되리라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얻는 진실 중 약간은 좀더 구체적이고 좀더 이야기와 닮은 [= 담론적인 성격의] 것일 수 있다. 습관과 [행동이나 사고] 방식에 관한 지식 중 일부는 연설보다는 다른 사람을 향해 행동하는 방식, 가르치고 반응하는 방식, 자신을 제어하는 방식 등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럼에도 그것이 통찰이며, 더욱이 도덕적이고 지적인 발달에 핵심적인 통찰이라고 주장한다. 사랑하는 자가 이 통찰을 얻게 되는 것은 사랑받는 자 덕분이며, 이때 감사하는 마음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다. 한때는 [= 소크라테스가 행한 첫 연설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철학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대립했었다(239 a). 그러나 이제 사랑하는 자의 영혼은, 일반적인 것이든 구체적인 것이든 그 통찰과 이해의 핵심적인 원천으로 여겨진다. …
<파이드로스>편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들은 에로스적인 열정과 타자에 대한 존중에 의해, 그리고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감정을 공유함에 의해 서로 결합하여 자신들의 삶을 살아간다. … 그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적극적이면서도 동시에 수용적이기도 하다. … 사랑하는 사람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열정을 가장하는 자가 아니라 실제로 그 열정을 경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가장 훌륭한 인간적 삶은 다른 개인에 대한 지속적인 헌신을 포함한다. 이런 삶은 지적인 활동을 공유하는 삶이다. 하지만 그런 삶은 지속적인 광기, 욕구와 정서적 느낌 또한 공유한다. …
<향연>편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 한 개인 또는 그 사람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곧 아름다움에 대한 더 일반적인 평가로 나아가면서, 한 개인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의 고삐를 늦추었다. <파이드로스>편의 연인은 결코 그렇지 않다. 이해와 좋은 것에 대한 연인들의 탐구는 어느 특정 개인과의 구체적인 관계의 맥락 속에서―이 개인의 고유한 성격 역시 이 관계의 맥락 안에서 영양을 공급받는 것인데―평생에 걸쳐 성취된다. 이들은 서로를 아름다움과 좋은 것의 범례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들이 그들 자신이 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상실할 수 있을 그런 속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상대방의 성격, 기억, 그리고 열정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하듯, 각 개인을 ‘생겨먹은 그 자체로’(in and of himself) 사랑한다는 얘기다. 선과 아름다운 것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배우는 것 중 어떠한 것도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고유의 유대 관계를 폄하하거나 회피하게 만들지 않으며, 그 관계를 비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 그들은 에로스적 광기를 초월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열정적인 삶 속에서 선과 진실된 것을 파악한다. …
여기서 [플라톤은] 사랑하는 사람의 광기 어린 삶을 신이나 기타 어떤 생명체에게 어울리는 가장 훌륭한 삶으로서 변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다시 말해 인간적인 인지적 한계와 전망을 지닌 존재에게 적합한 가장 훌륭한 삶으로서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점은, 플라톤이 여기서 스스로 (다른 후기 대화편들에서처럼) 가장 훌륭한 삶에 대한 물음을 이해관계, 필요의 관점에서,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놓여 있는 한계의 관점에서 판단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최고로 훌륭한 삶은 우리 인간의 복잡한 본성이 지닌 특수한 성질들을 도외시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본성 그리고 그 본성이 빚어내는 삶의 방식을 탐색함으로써 발견된다.
… 사랑하는 사람들은 부적절한 경향성에 맞서기 위해 분투하고, 적절한 경향성을 발견하기 위해 정신적인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들은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달리 가변적인 대상에 대한 배타적인 애착 속에서 헤어짐, 변심, 또는 불가피한 죽음 등에 기인하는 비탄에 빠질 수도 있을 위험을 감수한다. …
어떤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리더이자 선생이지만, 우리가 [<파이드로스>편에서] 만나는 교육 과정은 선생과 제자 모두의 광기와 수용성을 [그 기반으로] 포함한다. 소크라테스가 평소 자신이 자주 다니던 장소를 벗어나게 된 것이 파이드로스의 영향 때문이듯이, 파이드로스 또한 [소크라테스의 진심 어린 충고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의 연약한 지위를 수용하고자 자신을 보호해 주던 절제라는 구조물을 버리게 되었다. 우리는 양편 모두에게서 경이로움과 경외의 감정, 즉 타자의 개별적인 필요와 열망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관심을 발견한다. 이때 각자는 자신의 목표가 타자의 영혼에 더 많이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루시아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파이드로스의 생각이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합리성의 더욱 복합적인 이상에 대해 오래도록 설파하게 만든 것 아니겠는가? 또 소크라테스가 영감을 받아 행한 시적인 철회의 연설은 파이드로스로 하여금 자신이 그것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게 만든 것 아니겠는가?) 둘 중 아무도 상대방에게 미리 고정되어 있는 관점을 부과하지는 않는다. 각자 상대방의 영혼에 대해 경외감으로 반응하면서 자기 자신의 더 깊은 아름다움을 길어낸다.
The Fragility of Goodness 중에서
[2003년 6월 19일, 옥스포드의 한 특강 행사장에서 만난 적 있는 너스바움 선생은 조금 단순하고 강직한 여성 같다는 인상을 내게 심어 주었다. 당신 책을 들이 밀고 서명해주실 수 있겠느냐고 묻자 대뜸, “당신 이름 철자부터 대시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번 학기 그녀의 저서들, 특히 The Fragility of Goodness를 제대로 읽다보니 오히려 대단히 섬세한 학자겠구나 하는 판단이 선다. 뒤늦게 유선생[YouTube]에서 검색해보니 동영상도 수두룩허네! ㅎ
한 가지 분명한 점은 scharfe Augen을 가진 학자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 플라톤의 대화편을 마치 이(蝨) 찾아내듯, 아니면 신학자나 목회자 지망생(?)이 성경 공부하듯 [특히 243 e에 대한 해석을 보면!] 읽어 내려가며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하니 중간중간 나도 모르게 감탄이 새어나온다. 물론 이 분의 고전 해석 방식이 자의적이라는 비판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칸트철학 해석에도 Kantphilologe 말고 Kantianer의 해석이 있으니, 아니 압도적으로 더 많으니,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물 해석에 엄격한, 이를테면 ‘축자적’ 해석만이 바람직하다거나 옳다고 우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물론 고전어 공부에 들인 노력에 대한 보상심리가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건 해석이 지닌 실천적 설득력 아니겠는가. 나 역시 어설픈 Kantphilologe 흉내내며 논문이랍시고 끄적거려 왔다만 뭐가 남았는지 원 …
“가장 훌륭한 인간의 삶”은 이를테면 인류애를 구현해보겠다는 거창한 외침으로 점철된 삶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개인에 대한 지속적인 [평생에 걸친] 헌신을 포함하는 삶”이라는 저자의 해석이 가장 큰 울림을 준다. ‘治國平天下’보다는 ‘修身齊家’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 같기도 하고, 뜬금없이 2014년 어느 공직 출마 후보자의 퍼포먼스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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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책 내용에 함축되어 있기는 하지만, 저자가 미처 좀더 충분히 또렷하게 서술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그런 헌신이 개인의 큰 용기, 나아가 외로움 또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견디는 맷집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