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권리가 양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인간은 그의 생명을 빼앗아 가기 위해 폭력으로 그를 공격하는 자들에게 저항하는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에 대한 어떤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해, 구류, 투옥에 대해서도 같은 것이 말해질 수 있다."
"어떤 사람도 그 자신을 죽음이나 상해, 투옥으로부터 보호하는 그의 권리를 양도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그런 것들을 피하는 것이 모든 권리 포기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어떤 신약에 있어서도 폭력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약속은 어떤 권리를 양도하는 것이 아니며 의무를 지우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표현은, 얼핏 보면 특히 생존에 대한 권리만큼은 covenant[pact, 신약]를 통해 양도해야 할 권리 가운데 예외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생존 가능성을 높이고자 맺는 계약이 생명에 대한 권리를 무조건적으로 포기할 것을 전제로 삼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이 ‘내가 그렇게 하지 않거나 또는 그렇게 한다면, 나를 죽이라’라고 신약을 맺을 수는 있으나, ‘나는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 올 때 당신에게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와 같이 신약을 맺을 수는 없다. 인간은 본성상 현재의 확실한 죽음과 같은 더 커다란 해악에 저항하지 않기보다는, 차라리 저항하다가 죽음을 맞게 될 수 있는 작은 해악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일은, 범죄자가 그들을 처벌하는 법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범죄자들을 형장과 감옥으로 데리고 갈 때 무장한 사람들로 경비를 하게 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모든 사람에 의해 진리로 인정된다."
자연상태에서 여하한 대가와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지키려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포기를 전제로 하는 신약은 "공허한" 계약, 즉 하나마나한 계약이라는 말로 들린다.
"주권자의 권력에 대한 신민의 동의는, ‘나는 모든 그의 행위를 승인한다’라는 말에 존재하며, 거기에는 그 자신의 이전의 선천적 자유에 대한 어떠한 제약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나를 죽일 것을 허용함으로써 그가 내게 명령할 때, 내가 나 자신을 죽일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원한다면 나 또는 내 친구를 죽이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나는 나 자신이나 내 친구를 죽이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홉스는 주권자의 명령에 대한 거부가 정당화되는 않는 경우를, 그 명령에 대한 불복종이 "주권을 정립한 목적을 좌절시킬 경우"라고 못박고 있다. 그래서 예컨대, "적과 싸우도록 명령받은" 병사라 할지라도 "자기 말고도 충분한 병사로 대체할 수 있을 경우에는, 부정의함 없이 거절할 수가 있다"고 한다. 비록 그러한 행위가 "비겁"하기는 해도 "부정의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일단 시민사회로 들어가면, 주권자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의 정당화 여부를 규정하는 최고 조건은, 그 불복종이 국가 제도의 "유지"(preserve), 즉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실질적으로는 그것에 대한 주권자의 판단인 것이다.
신약을 체결하여 시민사회로 진입하는 유일한 목적이 "죽음으나 상해, 투옥으로부터의 보호"인데, 그것의 포기가 전제 조건이라면 이는 순환론적인 오류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홉스는 생존권의 포기에 대해서도 매우 현실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에 대한 권리 같은 기본적 권리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자연상태를 떠나려는 결정으로 간단히 포기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비록 그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이 주권자의 손아귀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더라도 말이다. 홉스의 관점이 현실적이었다면, 자연상태와 시민상태의 연속성에 주목한 칸트의 관점에는 좀 더 논리적인 구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