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2022 법학적성시험 언어이해 칸트 지문

Kant 2021. 12. 3. 17:07

 

칸트철학 관련 지문은 수능은 물론이고 법학적성시험에도 단골로 등장한다. 헌데 칸트 사상의 기본 의도나 구조를 무시하는 문제를 출제해도 괜찮은 걸까? 지난번 LEET의 출제 지문(언어이해 홀수형 28-30번) 같은 경우는 이런 의문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지문에 따르면 칸트의 법규범은 "규정성", "외면성", "무조건성"이라는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규정성은 법이 윤리규범과 공유하는 특징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지시해 주는 처방"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외면성은 사람들의 외적 행위가 법규범에 일치할 것만을 요구할 뿐 그 행위의 이유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무조건성은 법규범이 "그 관할 아래 놓여 있는 모든 사람을 구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문에 의하면 이 셋 가운데 특히 둘째 특징인 외면성에서 칸트 설명 체계의 "심각한 역설"이 발생한다. 역설은 법규범이 "어떤 종류[성격]의 명령"인가를 따지는 과정에서 드러난다는 것인데, 법규범은 그것을 준수하는 사람들의 "실질적인 목적이나 필요를 전제로 하지 않으며, 오로지 외적인 자유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이고 단적"인 효력을 지니고, 이런 의미에서 "정언명령"의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내면적 동기를 도외시하는 외면성에만 주목하므로, 법규범에 대한 복종이 그저 형벌의 위험을 피하려는 의도[조건]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가언적 명령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가언적 명령이라면 그것은 특정 행동을 지시, 명령, 요구할 수 없는, 다시 말해 규정성의 특성 역시 상실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주장한다.  

 

얼핏 이 같은 설명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적지 않은 문제점을 포함한다.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칸트가 주장하는 법규범의 특징에 대한 설명이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칸트 법철학 논의의 기본 구조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지문은 법규범이 윤리규범과 공유하는 특징으로 규정성을 언급하면서 두 규범 모두 행위를, 즉 행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시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칸트 실천철학의 기본에 관한 무지에서 비롯한 주장이다. 법규범은 외부로 드러나는 행위를 문제삼는데 비해 윤리규범은 내면의 태도, Gesinnung, 즉 심정 또는 마음씀에 관여한다. 이것이 우리가 칸트 윤리학을 '심정의 윤리학' 또는 '동기주의 윤리학' 그리고 '준칙의 윤리학' 등으로 부르는 까닭이다. 실천이성이 파악하는 도덕명령은 행위에 직접 관여하는 명령이 아니라 주관적 원칙, 즉 준칙에 관여한다. 준칙 자체도 구체적 행위를 지시하기보다는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할 것을 자신의 원칙으로 삼으려는 주관의 결의에 관한 것이다.

 

법규범의 외면성과 무조건성을 연결짓는 논리 또한 칸트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칸트에 따르면, 법이란 한 사람의 자유로운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행위와 병존할 수 있는 방식[조건]의 총체를 규정해 놓은 것이다.(법론 VI 230) 그 규정에 합치하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모든 행위는 합법적 행위다. 법규범은 일차적으로 이 같은 합법성에만 주목한다. 즉, 외면적 행위와 관련해서만 강제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법은 그 자체로 무조건적인 규범이라기보다 도덕성에 부합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한에서 타당한 것이다.  '너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행위와 병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위하라'는 법의 원리가 정언적 성격의 명령인 까닭은, 지문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것이 사람들의  "실질적인 목적이나 필요를 전제로 하지 않으며, 오로지 외적인 자유를 전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 사이의 그 외적인 자유의 상태가 법규범이 지향하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외적인 자유의 상태가 법규범이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인 까닭은, 그것이 현실 세계 속에서 인간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조건적 효력을 지니는 것은 법규범 자체가 아니다. 법규범은 인간 삶의 조건과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고 수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올바른 절차를 거쳐 법규범으로 확정되고 공포된 것을 준수할 것을 명령하는 법의 원리가 무조건적인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가 법규범의 준수를 무조건적 명령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배하는 체제, 즉 시민사회 체제에로의 진입이 곧 이성이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칸트의 "이성주의"의 법 개념은 이른바 자연상태와 시민상태의 연속성 테제를 통해 정당화된다. 

 

이성은 자연상태의 인간(이성적 존재)에게도 타자 권리(생득권)에 대한 불침해를 법칙으로 명령한다. 그런데 자연상태의 인간에게는 타자 권리의 불침해 법칙을 준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개인의 모든 외적 행위가 곧바로 타자 권리를 가능적으로 침해하는, 즉 상호 영향이 불가피한 상태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상태에서는 이성이 준수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는 법칙을 입법한다는 부조리를 낳는 셈이 된다. 그런데 이성(법칙) 자체를 폐기할 수는 없으므로 그러한 법칙 준수가 가능한 새로운 상태를 창출할 것이 명령될 수밖에 없으니 그 상태가 시민상태인 것이다.(VI 312)

 

그러므로 시민상태란 자연상태의 인간이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보아 마땅한 권리를 타자로부터 보호하고 행사하기 위해 진입해야 할 의무가 있는 법적 지배 상태를 뜻한다. 이성이 이 의무를 아프리오리하게, 즉 필연적 타당성을 지닌 것으로서 명령하는 것이 법의 원리다. 반면 지문에서, "그[법규범] 관할 아래 놓여 있는 모든 사람을 구속"하며 그들이 지닌 "실질적인 목적이나 필요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이며 단적으로 효력을 지닌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법규범 적용에서의 "무차별성"을 지적한 것이라 추측된다. 무조건적 타당성을 지닌 것은 시민상태에로의 진입 요구를 담고 있는 법의 원리이지 [실정법적] 법규범 자체는 아니다. 전자는 이성적 존재자의 권리 존중 확보라는 도덕적 목적, 따라서 도덕성에서 기원하지만, 후자는 얼마든지 수정이나 보완, 심지어 폐기 처분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법규범이 행사하는 효력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도덕규범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서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이제 28번 문제의 선택지를 보자. ①은 칸트의 입장에 상응한다. ② 역시 그 자체로 맞는 주장이다. ③은 지문이 내세우는 주장이라 여겨지지만, 법규범의 무조건성은 법 원리의 무조건성을 오해한 것이고, 이것은 외면성과 무관하게 법원리가 도덕원리에 기반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또 만일 규정성을, 법규범이 도덕적 당위에 기반함으로써 가능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사실[법규범의 도덕적 quality]이 오히려 외면성에 국한해서나마 효력을 발생시킬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④ 역시 지문이 내세우는 주장이지만,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도덕적 당위에 기초하는 규정성이 법규범의 외면성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나아가 그것은 법원리의 무조건성의 근거와도 합치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⑤지문의 주장으로 보아도 그렇고 칸트의 원래 의도로 보아서도 잘못된 주장이다. 법규범이 외적 행위에 국한하여 가지는 효력이 윤리규범의 의무가 강제력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될 수는 없고 오히려 그 역이 맞다. 결국 칸트의 입장을 잘못 전달하고 있는 지문의 서술을 수용한다면 5번을 정답으로 간주할 수 있긴 하겠으나, 첫 두 선택지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분명 칸트의 본래 입장과는 거리가 있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