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철학 관련 지문은 수능은 물론이고 법학적성시험에도 단골로 등장한다. 헌데 칸트 사상의 기본 의도나 구조를 무시하는 문제를 출제해도 괜찮은 걸까? 지난번 LEET의 출제 지문(언어이해 홀수형 28-30번) 같은 경우는 이런 의문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지문에 따르면 칸트의 법규범은 "규정성", "외면성", "무조건성"이라는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규정성은 법이 윤리규범과 공유하는 특징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지시해 주는 처방"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외면성은 사람들의 외적 행위가 법규범에 일치할 것만을 요구할 뿐 그 행위의 이유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무조건성은 법규범이 "그 관할 아래 놓여 있는 모든 사람을 구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문에 의하면 이 셋 가운데 특히 둘째 특징인 외면성에서 칸트 설명 체계의 "심각한 역설"이 발생한다. 역설은 법규범이 "어떤 종류[성격]의 명령"인가를 따지는 과정에서 드러난다는 것인데, 법규범은 그것을 준수하는 사람들의 "실질적인 목적이나 필요를 전제로 하지 않으며, 오로지 외적인 자유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이고 단적"인 효력을 지니고, 이런 의미에서 "정언명령"의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내면적 동기를 도외시하는 외면성에만 주목하므로, 법규범에 대한 복종이 그저 형벌의 위험을 피하려는 의도[조건]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가언적 명령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가언적 명령이라면 그것은 특정 행동을 지시, 명령, 요구할 수 없는, 다시 말해 규정성의 특성 역시 상실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주장한다.
얼핏 이 같은 설명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적지 않은 문제점을 포함한다.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칸트가 주장하는 법규범의 특징에 대한 설명이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칸트 법철학 논의의 기본 구조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지문은 법규범이 윤리규범과 공유하는 특징으로 규정성을 언급하면서 두 규범 모두 행위를, 즉 행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시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칸트 실천철학의 기본에 관한 무지에서 비롯한 주장이다. 법규범은 외부로 드러나는 행위를 문제삼는데 비해 윤리규범은 내면의 태도, Gesinnung, 즉 심정 또는 마음씀에 관여한다. 이것이 우리가 칸트 윤리학을 '심정의 윤리학' 또는 '동기주의 윤리학' 그리고 '준칙의 윤리학' 등으로 부르는 까닭이다. 실천이성이 파악하는 도덕명령은 행위에 직접 관여하는 명령이 아니라 주관적 원칙, 즉 준칙에 관여한다. 준칙 자체도 구체적 행위를 지시하기보다는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할 것을 자신의 원칙으로 삼으려는 주관의 결의에 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