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철학 안에서의 철학실천 - 노르웨이 트롬쇠 대학 의학부에서 얻은 경험
8년 전 저는 노르웨이 트롬쇠 시(市) 정신병원 근무자들을 위해 이틀 동안 윤리학 세미나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독일에서 트롬쇠로 귀국해서 세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그곳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개인 철학상담소를 열었습니다. 그 세미나 참가자들은 제가 통상적인 대학 수업에서와 같은 윤리학 수업을 진행해 주기를 원했기에 저 역시 그렇게 해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 세미나에서 얻은 경험은 이론적인 가르침보다는 철학실천이 더 요구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미나 둘째 날이자 마지막 날 병원 심리학 주임이 다음과 같은 윤리적 딜레마를 소개했습니다. 장기 입원환자 병동의 70세 정도 된 여성 환자가 몸을 씻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가끔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한 개인 위생 활동에 대한 거부가 그 병동 내에 갈등까지 야기했다는 것입니다. 병실 근무자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고 했는데, 이제 저는 그 그룹들을 각각 “강제 목욕당(黨)”과 “설득당”이라 칭하겠습니다.
각 당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논거를 제시했다고 합니다. 강제 목욕당은 환자가 그러한 불결한 위생 상태에서 지내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걸맞지 않는 일이라 주장했습니다. 그 여성에게 최선의 것은 몸을 씻겨 주는 일이라는 겁니다. 윤리적인 논거와 비슷한 이러한 주장 이외에도 그들은 두 개의 논거들을 더 동원했습니다. 하나는 치료에 관한 논거이고 다른 하나는 주변 분위기에 관한 논거였습니다. 그 여성은 정신병자이고 자신의 행동을 자제하지 못하며, 따라서 특히 개인 위생과 같이 중요한 영역에서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한 도움이 어느 정도 완력을 수반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여성의 악취로 가득한 방이 병동의 분위기를 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득당도 역시 윤리적인 논거, 치료적인 논거, 분위기 관련 논거를 제시했습니다. 첫째, 그 여성을 강제로 씻기는 것은 자율성의 원리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동료 인간에게 신체적인 강제를 행사하는 일은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것이죠. 둘째, 그 여성은 사력을 다해 저항하는데, 그것을 완력으로 무력화시킨다면 치료에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그 여성의 행동이 병동 직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에 대한 나름 분별 있는 반응이라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강제로 목욕을 시킬 경우 그 여성은 근무자들이 그들 사이에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 문제들로 인해 희생당하는 셈이라는 겁니다.
이상에서 기술한 상황은 하나의 윤리적 딜레마를 보여줍니다. 근무자들은 허용될 수 없는 (또는 매우 문제의 여지가 많은) 두 가지 행위 대안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여성이 씻도록 강제하거나 (또는 그녀를 누군가가 씻기거나), 아니면 그대로 두든가 중에서 말이지요. 그 상황은 그러므로 신통한 해결 방안이 있을 수 없는 듯 보이는 문제를 제시합니다. 게다가 두 개의 행위 대안들에 관한 논거들은 대단히 복잡하게 뒤얽히고 명쾌하게 들여다보기 어려운 문제 상황을 보여줍니다. 대체 어떻게 불쌍한, 한 대학 윤리학 교수가 이런 문제를 해명하고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이 딜레마를 대면했을 때 많이 불편했었다고 고백한다 해도 여러분은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진 다음 먼저 저는 그 딜레마가 공공 기관에서만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러한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람들(man)은 정신과 시설에서 씻으려 하지 않는 환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우리는 사례에 관한 설명을 통해서는 어떠한 인간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현재 [문제에 관여되어 있는] 인간들 사이에서 성립하고 있는 관계와 관련해서도 아무것도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딜레마는 이른바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그저 일반적인 취급방식의 하나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예컨대 만일 그 여성이 집에 거주하고 있었다면, 그녀의 수발을 드는 따님에게는 그 딜레마가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따님은 엄마의 청결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할 거라는 겁니다. 물론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고요. 아마 어느 날이 되었든 언젠가는 따님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겠지요. “엄마 오늘 손님 오잖아. 엄마 조카 힐데하고 힐데 서방말야. 그러니까 지금 꼭 씻어야 해. 씻는 거 내가 도와줄게.” 그리고 나서 그녀는 어머니가 다소 저항하더라도, 약간의 완력을 동원해서 어머니를 욕실로 데려가겠지요. 그리고 어머니가 다시 깨끗하게 하고 나오는가 점검할 겁니다. 위생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는 것이 정신과 시설의 “해법”보다 무조건 더 나은 것은 아닐 겁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참담한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공공 기관의 해법과는 다를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적어도 자신이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는 알 겁니다. 만일 기관 시설이 그녀를 씻기기로 결정한다면, 기관의 그러한 강제조치는 비인격적인 성격으로 인해 아주 불유쾌한 것이 되리라고 봅니다.
이렇게 그 딜레마가 가지는 비인격적인 성격을 지적한 다음, 저는 일반적인 해법이 기대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환기시켰습니다. 그 딜레마는 그러니까 마치 하나의 일반적인 해법이 가능한 것처럼 소개되었던 거죠. “만일 어떤 정신과 병원에서 남성 환자나 여성 환자가 씻으려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즉 근무자들)은 이러이러하게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숙고해 본다면, 도무지 그러한 딜레마에 대한 일반적인 해법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놀라게 됩니다. 정신병 환자들이 씻으려 하지 않는다거나 다른 강제 조치를 유발시킬 수 있는 많은 경우들은 각양각색이기 때문입니다. 환자들도 제각기이고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이유들도 제각기이며, 근무자들의 능력이나 병동 내의 인간관계들도 제각기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동일한 해법이 모든 곳에서 적용될 수 있단 말입니까?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 딜레마가 조치에 관한 일반적인 문제로서 기술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 소견으로는 그 이유는 어떤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을 분명한 원리와 지침들로 지배하려는, 근무자들의 소망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딜레마에 빠지게 되면 하나의 해결책을 발견하여 근거를 세우고 자신을 전진시켜 줄 행위 대안을 정당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진에 대한 이러한 소망이 아무리 합리적인 것이라 해도, 복잡성을 원리적인 해법들로 환원시키는 일은 분명 허용되지 않는 단순화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행위를 원리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근무자들이 환자를 희생시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꼴이 됩니다. 결국 환자에게 최선의 것을 원하는 도덕은 (만일 그러한 것이 대체 있을 수 있다면), 원리적인 것을 인간보다 앞에 세우는 도덕주의로 전락하게 됩니다. “도덕을 도덕 자체를 위해” 설정하는 이러한 도덕주의에서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크누드 E. 로이스트뤂(1972/ 1989, 59)은 “비도덕적인 도덕”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방식”을 발견합니다.
당시 트롬쇠의 정신병원 세미나 상황에서 제가 즉시 분명하게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 딜레마는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자극했습니다. 제 자신 윤리학 수업에서 가르쳤던, 널리 알려진 윤리적인 사고방식이 쉽게 비윤리적인 것으로 변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저는 그 사고방식을 이렇게 표현하고자 합니다. 자주 윤리적인 딜레마를 보여주는 윤리적인 문제가 하나의 사례로서 기술된다. 상황 묘사를 통해 사실들과 논거들을 명료하게 만들고 분명한 행위 대안들이 제시될 수 있도록 한다. 그러고 나면 윤리 이론들이나 모델들이 동원되는데, 이것들은 윤리학적인 원리들을 적용하거나 다양한 행위 대안들이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는 결과들을 각별히 고찰하여 어느 행위 대안이 더 낫고 따라서 선택되어야 하는가 하는 결론으로 나아가야 한다. - 저는 앞에서 소개한 윤리적 딜레마가 이러한 윤리적 사고방식의 위험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문제 상황이 불충분하게 드러난다는 위험 말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은 일종의 결단의 윤리로 쉽게 귀착할 수 있는 그러한 결단을 내리도록 압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윤리는 그 상황 속에서 그리고 그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주인공들이 어떠한 도전과 요구에 직면해 있는지를 충분히 숙고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숙고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결단의 윤리는 비윤리적인 것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그러한 윤리는 주의력도 부족하고 신중하지도 못합니다.
저는 세미나 참가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가지 행위 대안들 가운데 하나를 논증을 통해 관철하려 드는 것이 오히려 비윤리적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입니다. 저는 문제 상황을 본질적으로 좀 더 자세히 고찰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제가 문제 해결에 기여해야 한다면 그 병동에 직접 가서 사정을 살펴보아야만 할 거라고 말입니다. 그 환자가 왜 씻으려 하지 않을까? 무엇이 두려운 걸까? 그 병동은 그 여성의 행동의 어떠한 맥락을 기술하고 있는가? 근무자들 중 누가 그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가? 예컨대 강제조치에 관한 일반적인 딜레마를 야기하지 않고서도 어렵지 않게 그녀를 욕조나 샤워실로 가서 씻게 만들 수 있는 관계에 있는 사람은 누굴까? (설득당 사람들이 간접적으로 암시했듯이) 혹시 시설 근무자들 중 몇 사람들은 그 여성에게 접근하지 말아야 할까? 그 여성을 돕고자 한다면 상황을 더 확대시켜서 인간관계까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미나실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고자 하는 것은 기껏해야 근무자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일에 불과할 것입니다. 심지어 그러한 결정은 그 여성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그 여성 또한 아마도 실제로 근무자들에게 협조하지 않게 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