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슐츠, 『직업으로서의 철학』 중에서.
앞의 인터뷰 (“실천가로서의 철학자”)를 접하고 계속해서 철학적 실천에 관한 상세한 이론이 소개되리라는 기대를 가졌던 사람은 이제 그 약속을 지키려는 시도로서 “식사 후 철학”이라는 에세이식의 제목을 발견하고는 금방 실망했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쉴러의 [『발렌슈타인』2부인] “피콜로미니”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명대사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식사하기 전에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읽었다네”. 이것은 4막에서 회의적인 티펜바흐가 콜랄토에게 던진 대사이다.
사실 “식사 후 철학”이라는 제목은 학문적인 규명이나 “이론”보다는 신문 문예면에 더 잘 어울리는 일화, 신변잡기, 풍자문, 비평문 등을 기대하게 만든다. 실제로도 내가 이 제목의 표제어와 더불어 처음 머릿속에 떠올렸던 것은 한 철학 학회 기간 중에 그것도 바로 “식사 후”에 일어난 작은 에피소드였다. 동료 학자들과 담소를 나누던 중 Z교수가 그가 어쩌다가 새로 “윤리학”을 출판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그의 아내였는데, 어느 날 그녀가 그에게 왜 당신은 한번도 “윤리학에 대해” 무언가를 “쓰지 않느냐”하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아내가 정말 옳았어요 - 왜 다시 윤리학을 펴내면 안 되는 거지?”
그리고 그는 새로 나온 그 소책자에 의거해서 윤리학과 관련된 강연을 했다.
<14> 이상이 내게 떠오른 기억이었는데 이제부터는 대체 왜 내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지를 설명하겠다.
[다른 때가 아니라] 바로 “식사 후”(만일 전문 학자가 일을 하고 나서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기 전에 휴식을 취해도 좋다면, 모든 집회나 학술 행사 참가자들에게 익숙한 중간 휴식 시간이야말로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시간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는 시간이다. - 그 사람 자신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다른 사람들[의 사람 됨됨이 말이다])라고 하는 아주 특별한 분위기에서는 누가 그저 전문가로서 자신의 과목을 다룰 뿐이고, 또 누가 그것을 넘어서서 철학자가 되었는지가 가장 먼저 드러난다. 이것은 내가 확신하건대 대단히 미묘한 구분이며 아마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것이 더 영리한 주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본능적이지 못하거나 아니면 어떤 긴박한 동기가 그로 하여금 그러한 모험을 감행하도록 강요했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이든 그가 이 주제를 다룬다면 그는 사람들로부터 주제넘은 놈이라고 비난 받거나, 어쩌면 자기 자신의 인격에 대한 곤혹스런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 [자신의 인격과 관련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스런 부분이 있다면 그의 인격은 그러한 관심을 분명 견디지 못하고 말 것이다. 금기를 깨뜨리는 일은 그 당사자에게 반드시 보복을 불러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처지가 바로 그와 같다. 나는 철학적 실천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그와 같은 민감한 주제를 내버려 둘 수 없는 바,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위험하지 않은 물음 대신에 곤란한 질문이자 또 그래서 어렵사리 회피되어 온, “철학자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억제되기 일쑤였던 질문이 철학적 실천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구체적인 형성물이 철학자이다: 그리고 그가, 즉 철학의 제도화의 한 사례로서의 철학자가 곧 철학적 실천이다.
어쨌거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철학은 그러한 것이 되고자 하며 또 되고자 해야만 한다. 혹은 그러한 것이 철학의 자기 평가의 척도이고, 또 철학은 이 기준에 의하여 자신이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바로 그것[즉, 철학적 실천]을 평가한다.
이 같은 척도를 세우는 사람은 그러한 일을 심각한 고민 없이 행하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이 철학에 관한 물음으로부터 철학자에 관한 물음을 이끌어 내면서 [결과적으로] 억제되었던 것을 건드리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사실상 “철학자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강력하게 억제되어 온 질문이며, 단순한 (즉, 비교적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금기가 아니다. 금기는 주지하다시피 배제를 인정하며 심지어 일부러 강조하기도 한다. 반면 억제는 망각하게 하는 것 자체를 망각하게 한다. - 그래서 철학자에 대한 물음은 해결되지도 극복되지도 않으면서 무시될 뿐만 아니라 “사라져버린 물음”으로서 다시 한 번 철저하게 잊혀진다. 간단히 말해, 물음 자체가 상실되고, 아무도 그 물음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
“철학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내포한 곤혹스러움은 그러니까 위에서 말한 부끄러움, 즉 우리가 스스로에게 또 타인에게 “나는 철학자이다”라고 인정할 때 엄습하는 그 부끄러움과 대단히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제 여기서 등장하는 본래적인 물음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17> 헤르만 륍베는 철학자들이 보여주는 이렇게 명백한 자기불신(Selbstunsicherheit)이 “철학 공부를 통해 아무런 세속적인 의미의 전문 자격”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무엇을 위해 철학하는가?”라는 물음은 틀림없이 전형적으로 독일적인 특징을 지니는 바, 이는 최근의 독일 교육사에서 두드러진, 대학 교육과 직업 사이의 긴밀한 관계가 야기한 것이다. 통상 “무슨 전공을 공부하는가?” 라고 물었을 때 독일의 많은 철학 전공 학생들은 “철학”이라 답하기를 꺼린다. 대신 그들의 부전공을 알려준다. 나 역시 철학도로서 부담을 느끼던 시절을 기억한다.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일까? 대답은 명백하다. 철학 공부를 통해서는 아무런 세속적인 전문 자격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륍베는 바로 뒤이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철학 전공 학생들이 이러한 결핍을 시민으로서의 결함으로 느낀다는 것은 독일적이다”.
나는 이와 같은 시민자격 결여에 관한 논증이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견해는, 륍베가 말하듯이 대답이 아주 “명백하다”고 해서 어떤 물음이 해결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인데, 이 견해만 더 강화되었을 뿐이다.
철학 공부가 확실하게 “세속적인 전문 자격”을 가져온 경우, 예컨대 철학 선생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의심할 바 없이 앞에서 본 바와 같은 곤란함, 즉 직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해야만 할 때 “철학자”가 체험했던 것과 같은 곤혹스러움이 선생들에게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자신들의 사유 능력으로 의도했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까?
오히려 그들에게서 철학자의 부끄러움을 불필요하게 만든 것이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닐까? 그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일할 수 있다면, 그 까닭은 혹시 그들이 선생이기는 하지만 철학자는 아니라서가 아닐까? -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그러한 [철학자라는] 참칭을 전혀 기대하지 않기 때문 아닐까? 만일 사정이 이러하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선생이 자신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간단히 말하자면, 그의 스스로 철학자이지 않아도 됨(Nicht-selbst-Philosoph-sein-Müssen)이 그에게 “유사-철학자-실존”(Quasi-Philosophen-Existenz)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이것이 다시 철학자에게 전형적인 수치감을 [그에게서] 효과적으로 제거해버렸다는 것 아닐까? 만일 선생이 자신을 “철학자”라고 소개할 때, 그 역시 상대방이 경우에 따라 보일 수 있는 반응, 예컨대 “그래서 지가 ‘철학자’ 행세하겠다는 거야...?” 하는 식의 고약한 반응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까? 이것은 물론 국가가 [그의 일의 대가로] 지불하는 보수와는 무관한 일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륍베가 생각하듯 우리에게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직업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인가? 그러한 “이유”는 선생뿐 아니라 실천하는 철학자[즉, 철학 상담가]에게도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그 원인을 설명해야 하는 주저함은 모두에게 해당된다.
<18>나는 그렇게 쉽사리 없앨 수 없는 우리의 부끄러움에 대한 원인이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스스로 충족시킬 수 없는, 그래서 거부해야만 하고, 그렇지만 우리가 철학에 “종사하는” 한 놓치려 하지 않는 요구(Anspruch)가 그것이다. 이 요구로 인해 우리는 우리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어쨌거나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이 요구를 진실되게 적용할 때 금방 발가벗긴 채로 서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러한 테제의 의미에서 아마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게 될 것만 같다: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철학 자신이라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부끄러워한다고?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전혀 원할 수도 없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면서도 숨겨야만 한다고?
만일 사정이 이러하다면 이것은 장점이자 숙명이라 할 수 있다.
장점: [이 같은 사정은] 철학이 지니는 생동감과 삶에의 근접성을 증명한다. 이 생동감과 근접성은, 철학이 학문으로서 우리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기가 아주 쉬움에도 불구하고, 또 학문적으로 사물화됨과도 무관하게 철학에서 제거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숙명: 우리에게 계속 관여하며 동시에 우리를 배제시키는 철학은, 과거의, 잘못 다루어진, 결국 위태롭게 남겨진, 그리고 아직 극복되지 못한 철학이다.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과대평가요, 다른 하나는 과소평가이다. 하나는 가치를 존중함이요, 다른 하나는 무가치를 인정함이다. 가치 존중은 “바로 그” 철학에, 그리고 무가치 인정은 우리 자신에게 해당한다.
요약: 우리는 철학을 너무 높이 평가함으로 해서 부끄러움 없이는 우리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부르지 못한다. 또 이러한 관점에 의해 조종당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 너무 나쁘게 생각한다.
나의 다음 테제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이러한 자기 분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한, 실천으로 가는 길목은 차단되어 있다. [자기 분열 상태에서는] 우리 자신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렇게 묻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철학자”의 귀환으로 간주할 수 있는 철학적 실천이 대체 가능하며, 그리하여 철학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갱신하는 일이 정말 절박한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우리 스스로를 “계몽시킨다”는 조건 하에서 말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움의 이유를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해하기가 불가능한 철학은 어떤 특정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분열시키고 우리가 우리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게 하며,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우리를 거부한다.
<19> 나는 이러한 철학을 요구-철학이라 부르고 싶다. 이것으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저 철학, 즉 진리의 발견자, 주재자, 집행자로서의 철학이다. 이것은 먼저 “참된 명제들”을 만들고 일단 그것들을 소유하게 되면 바리새인들처럼 인간에게 부과[하려] 한다. 니체를 빌어 말하자면, 존재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며, 인정하는 것은 현실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른바] 낡은 “세계 부정의 철학”, “형이상학적 허무주의”이다. 헤겔은 또 이러한 철학을 “불행한 의식”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현실을 형이상학적으로 [즉, 억지로] 둘로 나누는 [즉,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며, 이중성(Verdoppelung)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중성은 모순을 불공정하게 “실증주의적으로” 해소시키려는 시도를 제외한다면, 다시 말해 현실적인 것을 고발함을 [다시] 제멋대로 고발하려는 시도를 제외한다면, 비현실적인 현실을 현실로 가공하는 방법만을 허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행동하는 철학자들을 늘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알아차리게 된다. 즉,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생각하면서 그 생각해 낸 것을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요구-철학이 유일한 철학이라면, 철학적 실천은 불가능하거나 위태롭게 될 것이다. 철학적 실천은 무책임한 것이 되고 말리라. 우리가 자신한테는 부과하지 않아야만 하는 요구를 타인들에게 부과할 수 있다면, 이는 결국 우리가 자신을 “철학자”라고 부르기를 겁낸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꼴이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같은 요구-철학이 유일한 철학은 아니다. 그것은 철학자들의 수치감 가운데 그저 과거의 것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바대로 혹은 “철학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바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통해, 우리를 우리 자신과의 갈등 속으로 몰아넣었던 실체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잔여물들은 - 즉, 현실적인 것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어떤 다른 세계로부터 유래한 진리들은 이미 오래 전에 그 물음에게서 소진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철학의 종말”이 아니라 철학적 실천으로서의 시작을 뜻한다. 어느 정도까지 [어떠한 의미에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설명을 위해 칸트가 행한 유명한 구분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구분은 철학적인 작업의 실천적인 의미에 대해 말할 때마다 늘 언급되곤 하는 구분인데, “학문 개념”으로서의 철학과 “세속 개념”으로서의 철학 사이의 구분이다. 발터 슐츠는 매우 잘 알려진 칸트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철학의 필요성을 긍정하고 싶다. 그런데 이러한 필요성의 긍정은 분별력 있는 근거를 수반해야만 한다. 이러한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과 논리학 강의에서 제시한 구분을 거론하고자 한다. 칸트는 거기에서 학문 개념으로서의 철학과 세속 개념으로서의 철학을 구별하였다.
학문 개념에 따른 철학은 특수한 능력들의 교육에 관한 것이다 ... <20> 반면에 세속 개념에 따른 철학은 칸트에 의하면,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는 일반적인 물음들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저 위대한 근본 물음들이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가? 내가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이 질문들은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으로 요약된다. 칸트가 말하기를, 이 질문들을 제기하고 가능한 한 그것들에 대답하는 것이 비로소 철학에 가치를 부여한다. 칸트에 따르면, 이때 철학은 인간의 최종목적들을 보여주어야 하는 완전한 지혜의 이념 아래에 놓여있게 된다.
우리는 물론 칸트의 이러한 구분을 우리 자신을 위해 세세한 부분들까지 재구성할 수는 없다. 이성에 대한 칸트의 신뢰는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강조 아헨바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칸트의 구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열려져 있는 철학의 가능성에 대한 암시를 제시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발터 슐츠와 다르게 생각한다는 점을 고백해야만 하겠다. 특히 우리가 위의 인용문에 소심하게 삽입된 문장으로부터, 이성에 대한 칸트의 신뢰가 우리에게는 생소하게 되어버렸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한 결론보다는 철학이 전통적으로 과감하게 제기할 수 있었던 “세속 개념에 따른” 질문들에게, 정확히 말해 이제 더 이상 스스로 그 해답을 제시할 수 없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겠는가? 철학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으며,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지, 또 마지막 질문이 의미하는 바, 실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러한 결과가 딜레마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칸트의 물음들을 과감히 바꾸도록 자극한다. 그것들을 철학적 실천에 관한 물음들로 바꾸도록 말이다.
칸트의 물음들 - 즉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가? 내가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 대신, 이제 이러한 물음들이 제기될 수 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무엇을 행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로써 철학에게 다른 과제가 부여된다: 철학은 더 이상 앞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생각한다.
그리고 철학자인 우리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더 이상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바대로 살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바를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내가 아는 것, 행하는 것, 희망하는 것을 내가 생각하고, 또 내가 누구인가를 내가 성찰하는 가운데 나의 삶이 내게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삶이 생동하며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이 실천적 철학자가 자신이 상담해주는 사람과 더불어 걸어가는 길이다. 길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삶이 사상을 방어함으로써 자신을 구하게 될 때까지 그 삶을 버겁게 만드는 바로 그 사상이 아니라, 사상을 강요하는 삶이다.
<21> 그리고 이것이 철학자로 하여금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철학자로서의 자신을 재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다. 철학자를 철학과 결합시키는 것이야말로 철학자를 찾는 사람들이 철학으로부터 기대하는 바이다. 그들의 수수께끼는 철학이 아니고, 그들 자신인 것이다. 이것이 양자를, 즉 철학적 실천가와 그의 내담자를 하나로 묶어주며, “식탁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식사 후 철학 - 혹은 철학자란 누구인가?
아르놀트 K. 로렌첸 (“실천가로서의 철학자”)과의 대화에서 나는 때때로 아르놀트 겔렌을 인용했다: 철학자는 살기 위하여 인식해야만 하는 자, 바로 그 자일뿐이다.[] 철학적 실천은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철학자는 살기 때문에 인식해야만 하는 자이다.
이제 이러한 생각에 반론이, 즉 그것은 불구속성(Unverbindlichkeit)에로의 도피를 시도하는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겠다. 그러한 반론에서 올바른 점은, 그것이[즉, 앞의 생각이] 실제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그저 숭배하기만 할 수 있는 “순수한” 사유와 결별함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자신이 진실되지 않음이 없이는 그것 [순수한 사유]이 참일 수 없다는 것을 뜻하고, 이미 보았듯이 우리를 우리 자신과 분열시키는 저 철학적 요구-사유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러한 자기 분열의 우스운 변종은 “식사 후” 철학자들의 모퉁이에서 연구될 수 있다. 철학자이고자 하는 이러한 주제넘은 태도를 완강히 거절하거나 비웃는 자들 역시 그들이 무엇을 부정하는지를 그들의 휴식 시간에 보여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구속성은 그들의 생각의 구속성이 아니다. 생각은 감추어져 있고 나중에야 드러난다. 오히려 그들의 구속성은 그들이 “거기에 속함”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누가? 어디에? 무엇을? 등과 같은 세부지식을 통해 드러낸다. 즉 식사 후 끝나지 않는 대화를 통해서 ...
그리하여 [예컨대] 어떻게 해서 누군가가 자신의 윤리학 관련 소책자를 출판하게 되었는지가 드러난다. 그때 한편으로는 전문적인 사유꾼이자 개념관리자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평범한 개인들만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즉, 만일 소크라테스가 [함께] 식사 하면서 그 Z교수에게 대체 그 자신이 가진 “윤리적인 문제들”이 있는지를 물었다면, 그가 당황했을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왜냐하면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그 교수가 기껏해야 “윤리학에 관한” 문제들만을 가졌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철학자-식탁에는 그러한 소크라테스가 없다.
“삼십여 년 전에 출판된 어느 노 칸트주의자의 ‘철학자들의 모퉁이에서’라는 책 제목에 관한 아주 희미한 흔적이라도 철학에 남아있는 한, 그만큼 철학은 철학을 업신여기는 자들이 철학과 더불어 추구하는 즐거움이 된다.”(테오도어 W. 아도르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