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김선희 지음, "철학상담. 나의 가치를 찾아가는 대화"를 읽고

Kant 2016. 7. 6. 10:25

 

 

개별 차원에서 철학실천을 선구한 사례들을 제외한다면,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하면서 철학상담이 이 땅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한 지는 아직 채 십 년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동안 철학상담은 학계와 우리 사회에 만만치 않은 파장을 던지며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철학상담 인구의 증가나 활동 영역의 다양성 확대 등 외형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이와 평행해서 내적인 실질적 논의의 심화 과정 역시 가속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가 철학상담. 나의 가치를 찾아가는 대화(아카넷, 2015)이다. 저자 김선희교수는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의 전신인 철학상담연구회의 창립 멤버로서 또 학회의 연구이사로서, 그리고 철학상담전문가로서 철학상담이 국내에 소개되고 자리를 잡는 과정에 밑거름 같은 역할을 수행한 분이다. 이번 역작의 출간은 한국적 철학상담이 그 동안 축적해온 내공을 족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정말 반갑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42쪽에 달하는 분량의 저서에서 저자는 철학상담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자신의 상담 활동을 통해 직접 개발한 모델을 소개한다. 서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저자의 저술 동기는, 자신이 왜 자아정체성에 기초한 상담을 철학상담의 본령으로 간주하며,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데 있다. 저자는 철학상담(혹은 철학실천)”철학적 대화로 이루어지는 상담활동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오직 철학의 방법으로!”, “오직 철학적 대화로!”라는 구호에서 읽을 수 있듯, 철학상담 고유의 정체성을 여타 상담활동들과의 차별화를 통해 소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방식으로 확립하고자 한다. 저자가 밝히고 있는 철학상담 고유의 정체성은 철학적 대화 수단의 사용 비판적 사고와 창조적 해석의 구현 심리학적 법칙 등으로부터의 독립성 특정한 인간관으로부터의 독립성 등과 같은 네 가지 특징에 의해 드러난다.

 

먼저 철학적 대화는 여하한 치료 기법도 도입함이 없이 오직 철학적 대화로 이루어지는 철학의 () 실천이다.”(27)라는, 다소 과격해 보일 수도 있는 주장에 의해 저자는 심리치료 기법을 활용하거나 철학의 자산을 이용하는등의 이른바 융복합식또는 학제적상담이 철학실천의 고유한 가치를 훼손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저자는 철학실천철학상담을 의미 구분 없이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철학적 대화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는 철학적 대화의 중심은 비판적 사고와 창조적 해석이외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철학상담사는 내담자의 고민이나 문제에 마주하여, “내담자의 사고와 태도 및 선택과 행위의 전제조건들에 관해 ()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성찰하는 것이며, “내담자가 갖고 있는 가치와 세계관, 암묵적 가정과 전제조건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성찰하는 것이야말로 상담을 철학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라 주장한다.(28) 이런 과정은 무엇보다도 논리적, 철학적 사고 활동으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철학상담사는 내담자에 의해 파편화된 상태로 지각되어 유의미한 전체로서 파악되지 못하는 삶의 경험을 내담자 스스로 자신이 추구하는 정체성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그래서 내담자가 문제시하는 상황을 창조적인 삶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한다.(35)

 

저자가 자신이 어떤 이유와 방법으로 정체성 기반 상담을 추구하는가를 정성들여 해명하면서 제안하는 모델(이하 김선희 모델”), “철학적 대화라는 일반 내담자들에게 얼핏 느슨한 담론 정도로 비춰질 수도 있을 수단이 전문적인 절차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자못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더욱이 이 모델은 내담자의 문제를 내담자 자신의 문제로 재기술하는 정체성 기반 상담의 방법과 단계를 직관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이 모델이 자기 성찰과 자기 이해를 통한 자기 주도적 문제 해결이라는 철학상담의 정신을 실현할 가장 유력한 통로라는 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저서의 미덕은 저서 전체 분량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상담 사례 소개부분이라 여겨진다. 특히 저자는 철학상담의 사례를 기술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위치 지우며 명료화하고 해결해나가는지, () 철학적 대화 안에서 철학 사상과 실천적으로 만나는 것이 내담자의 사고에 어떤 영향과 자극을 주며 ()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도록 했는지에 대한 평가를 포함하여야 한다는 당찬 기준을 제안한다. 이 기준에 의해 서술된 사례들은, 철학상담이 구체적인 상담 상황과 과정 속에서 어떻게 성공적으로 적용 가능한지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철학상담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저자의 모델이 철학상담 고유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에도 설득력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서평자는 김선희 모델이 지닌 특징과 여러 장점들이 앞으로 철학상담 학계에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 수용의 대상이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주의 깊은 독자의 관심을 이끌만한 몇 가지 논점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물론 전문적인 철학상담에 뜻을 두고 있는 독자들의 사유를 자극하기 위한 것일 뿐 저서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먼저 철학상담의 본질에 관한 저자의 일관된 주장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그것이 심리상담의 기법뿐 아니라, “철학자의 사상을 도입하여 상담원리를 만들거나 철학의 자산들을 이용하는 것에서 성립할 수 없다(27 이하, 43, 68)는 매우 단호한 입장을 고수한다. 철학사상을 대자적인 실천적 진리로 만날 수 있도록 철학적 대화를 하는 것이 철학실천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철학상담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자명한 진실로 다가온다. 다만 일종의 본질주의의 한계에 빠질 수 있을 위험성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철학상담의 이를테면 일종의 순수주의’(purism)이 표현이 얼마나 적절할지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그 고유의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을 의식한 전략으로서 이해할 수 있겠으나, 철학상담을 위한 풍요로운 자산(예컨대 다양한 철학적 사고법이나 철학사상, 명상 수련법 등)을 스스로 내다버림으로써 자칫 상담활동 자신을 빈약하게 만들고 위축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비판적 사고와 창조적 해석의 구현이라는 철학적 대화의 방법도 논리적, 철학적 사고 활동임과 동시에 결국 철학적 자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철학적 대화의 과정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적으로든 현상학적 방법론이나 해석학적 방법론을 적용하지 않으면서 이루어진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나아가 내담자가 여하한 인간관이나 인간본성, 여성성 등에 대한 관점을 전제함이 없이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탐색해 가는 과정에서 어떤 독자는 자연스럽게 실존주의의 인간 이해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저자는 이 같은 관점에서 철학상담 과정이 별도의 철학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나아간다.(189 각주) 철학교육이 모든 내담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부분은 아니겠지만, 자기 문제 상황을 재구성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내담자가 철학적 사고의 능력까지도 덤으로(?) 습득하게 된다는 주장에는 선뜻 수긍하기가 어렵다.

 

철학적 자산이나 이론의 사용과 관련된 저자의 소극적인 태도는 응용윤리의 무기력함에 대한 지적에도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응용윤리도 마찬가지겠지만 윤리학이라는 학문이 개인의 구체적인 상황에 딱 어울리는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제공하는 학문이라 간주할 만큼 소박한 생각을 가진 철학도는 없을 것이다. 규칙(일반)성을 추구하는 모든 활동은 상황의 구체성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작업, 특히 윤리학적인 작업이 무기력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우리가 지향하는 행동 방식이나 선택 가능한 대안들 각각이 내포하고 있거나 그 배후에 놓여있는 가치들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른바 ‘top-down approach’뿐만 아니라 ‘bottom-up approach’reflective equilibrium’ 등의 방법을 지지하는 현대의 응용윤리학자들은 단순히 주어진 원리를 연역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도 구체적인 삶의 구체적인 맥락에 대한 행위 당사자의 판단, 그리고 그것과 지배적인 배경 원리 사이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문제 삼는다. 이 같은 문제의식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리고 내담자들로 하여금 그들 앞에 놓여 있는 대안 가능성들을 검토하고 그 선택지에 따르는 가치를 명료화할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그들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 철학상담의 역할에 속한다고 보면, 응용윤리학과 철학상담 사이에는 분명 본질적인 중첩 부분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고민해보고 싶은 부분은 인간관내지 인간 본성”, “성별”(gender) 등의 개념과 철학상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내담자의 자아 정체성 탐색 과정은 가급적 개방적이고 무전제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기존의 모든 가치관, 인간관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상담이 가능할까 하는 의심은 정당하다고 본다. “내가 아는 것못지않게 내가 알 수 있는보편적인 가치나, 기존의 철학사를 통해 보편성을 인정받은 인간의 사명을 묻는 것도 철학하는 본연의 태도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 보편성에 대한 앎을 대자화하는 것이 개인의 몫임은 물론이다. 이와 관련하여 여성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은 형이상학적 물음이 아니라 윤리적, 규범적 물음이라는 견해(162 각주) 역시 서평자에게는 무거운 주제로 다가온다. 어떤 식으로든 여성 고유의 본성(또는 목소리’!)에 대한 가정 없이 내담자의 갈등문제의 원인으로서 가부장적 사회구조나 문화를 언급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린스팬을 인용하면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넓은 문맥으로 확장할 경우, 여성 내담자 문제의 본질적인 부분이 사회·문화의 구조적 모순에 기인하는 것으로 새롭게 드러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예컨대 나에 대한 엄마의 학대 원인은 엄마에 대한 할머니의 학대, 그리고 그것은 다시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학대 등으로 밝혀지면서 의식 전면에 나타나 있지 않던 사회구조적 모순의 영향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관점과 해석에서는 개인이 자율적 존재라는 근본 가정이 들어설 여지가 별로 없을 듯하다. 혹시 이 같은 설명 방식을 산 자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죽은 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방식과 닮았다고 하면 억지가 될까 모르겠다. 서평자는 그와 같은 원인 탐구 방식이 내담자의 정서적 불안의 뿌리를 유아기에 관한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찾아 헤매는 정신분석적 심리치료와 닮았다는 인상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정체성은 사회문화적 요소의 영향을 받으며 부분적으로 정치적 힘에 의해 구성된다”(184 각주)는 주장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지만, 따라서 사회가 요구하는 선입견이나 가치”(182)를 내담자가 신중히 재검토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그 검토 과정이 나의 책임을 남 또는 어떤 구조적 모순에 떠넘기는 식이라면, 이는 심층적 자기 이해를 구실로 우리 모두를 무의식적인 사회화의 산물로 바라보는 방식과 유사할 뿐, 자율적인 자아실현이라는 상담 목적을 위한 발전적 대안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나의 정체성, 특히 여성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사회화의 범위와 한계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기 위해서는 저자가 거부하는 인간관 또는 여성성 등의 전제가 어떤 식으로든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탄탄한 논리와 풍부한 사례를 장착한 김선희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이 저서는 반드시 철학상담 분야의 필독서 중 한 권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문학계의 수많은 서적들이 오히려 인문학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는 우울한 국내 출판 현실을 고려할 때, 저자가 보여준 역량과 노고에 고마움을 넘어 숙연한 마음까지 든다.

 

 

<철학 실천과 상담> 6집(2016.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