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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브란트(김재철 옮김), 『철학실천. 철학실천의 개념과 심리치료와의 관계』 중에서

Kant 2021. 1. 15. 17:47

누군가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의 현존재로 인해, 또는 실존의 부자유함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일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가 어떤 양상으로 존재하는지, 자기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겪을 수 있도록 하는 인간의 특수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많은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

인간 현존재(Dasein)모든 규정된 존재처럼그렇게 있음(Sosein), 즉 다르게 있지 않고 그렇게 있음(So-und-nicht-anders-sein), 다시 말해 다시 말해 다른 존재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이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저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현존재의 특수함은 그가 다른 존재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연관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현존재는 자신의 부정성을 의식하고 있다. 이 의식은 그때마다 자신의 존재가 정확히 다른 존재를 통한 부정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다시 말해 비존재의 계기를 포함하고, 그때마다 이러한 자신의 비존재와 연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앎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의 본질은 자신의 무화에 대한 (긍정적) , 즉 부정성에 대한 의식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인간 현존재는 의식된 부정성이다. 또는사실상 동어반복처럼 보이지만인간 존재는 현존재로서 (긍정적으로) 존재하는 한에서 부정적으로 존재한다. 의식된 (-)존재의 긍정적 규정은 자신의 부정성이다.

의식된 부정성부정성에 대한 의식은 본래 고통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의미하는 것을 다시 추상적으로 정식화한 것일 뿐이다.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다.

 

인간은 의식하는 자로서 고통을 겪는 자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s)*이기도 하지만 무조건으로 아파하기만 하는 동물은 아니다. 왜냐하면 병에 걸리지 않고서도 고통을 겪을 수 있는 자가 바로 심리적으로 건강한 자로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고통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은 현실적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Gadamer61990, Wahrheit und MethodeGrundzüge einer philisophischen Hermeneutik, Tübingen, 362] 마음, 정신, 정서는 우리가 의미를 경험하는 기관이다. 이 기관은 우리를 외적인 영역과 연결하는 내적인 심급으로서 거기에서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의 현존재와 본질에 대한 ’, ‘무엇을 위해를 위한 암시를 받아들인다. 이런 점에서 왜 홀츠하이-쿤츠가 심리적 질병을 의미의 장애로 표현하려 했는지가 보다 분명해진다. 현존재를 위한 의미가 사라졌거나, 아니면 무한한 것과 불가능한 것으로 뻗어가면서 과도하게필연적으로 기만당하거나 광기로 채워질 수 있는의미를 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 Frankl, Homo patiens Vesuch einer Pathidizee, Wien 1950, Sloterdijk 1993, Weltfremdheit, Frankfurt a.M., 63 / Nietzsche 1999[1887], Zur Genealogie der Moral, In Kritische Studienausgabe(KSA) hg. v. Giorgio Colli & Mazzino Montinari,München, Bd.5, 367] 프랭클은 이 개념을 고통의 변론”(Pathodizee)으로 고양시킨다.

 

고통은 주체에게 고유한 반성적 능력과 자기연관성을 통해 병으로 고양되는 주체성의 필연적 계기로서 인식된다. 그러므로 마음의 치유를 위한 진료에서는 주체로서의 인간인간 자체이 치료를 위한 노력의 중심에 있다. 클라우스 그라베도 심리치료의 정수가 자신의 삶과 삶의 상황에 대해 의식적으로 반성하는 것에, 고통을 주는 자이자 동시에 고통을 겪는 자로서 자신을 보는 법을 배우는주체의 능력 배양에 있다고 본다.[Grawe(52001), Psychotherapy im WandelVon der Konfession zur Profession, Göttingen/Bern/Toronto/Seattle,9] 그러므로 주체가 자신의 객관적 상황, 고통을 겪었던 현존재를 경험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근대 전통의학의 패러다임은 병든 주체를 추상화[도외시]함으로써 진료될 수 있는 증후적 기능장애의 질병분류학적 통일성, 병과 독립된 존재를 제시한다. 그러나 심리치료에 이러한 패러다임을 적용시킬 수는 없다. 신체에 대해서 느끼는 심리적 상태, 다시 말해 병든 객체로서 자신을 보는 주체의 고통스런 반성은 진통제를 통해 신체가 가능한 한 고통 없이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최소한으로 억제된다. 이런 형태의 진료는 심리치료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마취에 의한 진료가 제공될 수는 있어도 병든 마음고통을 겪고 있는 주체은 자신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와 마음은 마취될 수 있지만 그로 인해 심리치료를 위한 치유 방법은 차단된다. 왜냐하면 마취된 주체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으로 인한 고통의 진료로서 심리치료는 깨어 있는 (상호) 주체성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병든 주체이지 그의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의 치유는 주체 없이는 불가능하다.

 

주체 없는 심리치료라는 제목 아래 홀츠하이-쿤츠는 마음의 치유을 위한 기관들이 현재 처해 있는 변형의 과정을 분석한다. 이 과정은 마음의 치유을 위한 기관들을 의학화목적 합리화의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그 결과 심리적 고통은 전통의학의 패러다임에 맞게 신체적 병과 유사하게 규정될 수 있는 장애로 파악된다. 환자는 더 이상 주관적으로 고통을 겪는 자가 아닌 객관적으로 병든 자로서, ‘심리적 문제를 가지고 치료사를 방문한다. 그리고 그는 문제에 상응하는 진단법에 따라 자신이 가장애의 이름과 번호를 듣고, 그때부터 가능한 한 빨리 과학적으로 검증되고 규범화된, 그런 점에서 철저하게 합리화된 처리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그 장애로부터 벗어나기를 기다린다.

 

철학실천은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정체성의 위기가 심지어 결정적인 본질적 특징으로 여겨질 수 있는 철학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이때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철학적 회의는 바로 자신의 생명성과 자유를 보증한다.

 

아헨바흐는 삶의 능력”(Lebenskönnerschaft)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이것은 아헨바흐 자신이 누누이 강조하듯 슈미트의 삶의 기술과는 대조적인 개념이다!]

 

철학자는 그가 철학을 대표하고 체화할 때에만 철학실천가이다.” 왜냐하면 철학실천은 바로 개인적으로 표현되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Lindseth(2005), Zur Sache der philosophischen Praxis. Philosophieren in Gesprächen mit ratsuchenden Menschen, München,169]

 

철학자 에게 진정한 평정은 불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철학자에게 숙고의 의미는 특히 다음과 같은 것에 있다. 즉 제기되고 있는 물음을 결정적으로 한 번에 대답하는 대신에 그 물음의 장소와 근거, 유래와 목적을 해명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물음을 경작한다. 그의 덕은 훈련된 주목하기이다. 철학은 욕구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욕구를 경작하는 것이다. ...  철학은 자명한 것의 불명료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명성을 동요시키고, 확실성을 깨뜨리는 철학의 계기에 대한 논의에 따라 철학함이 위험하며 무조건 삶에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입장에도 수긍이 간다. 왜냐하면 자명한 것의 불명료함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이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 나아가 물어지고 있는 현존재를 감당해 내는 이해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지가 아직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볼프강 블랑켄부르크(Wolfgang Blankenburg)철학의 고찰에 대해 정신과 의사의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네 가지 다른 측면을 전체적으로 언급한다. “1.심리적 장애의 표현 또는 증후로서 철학함, 2.합리화하는 방어로서 철학함, 3.심리적 장애에 대한 극복의 시도로서 철학함 , 4.심리적 보상 실패의 원인으로서 과도한 철학적 반성.”[Psychatrie und Philosophie in: Kühn, R. / Petzold, H.(Hg.), Psychotherapie & Philosophie: Philosophie als Psychotherapie?, Paderborn 1992, 317-341(여기서는 328)]

 

프로이트가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쓴 편지 사람들이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묻는 순간 그들은 병든다.”[Briefe 1873-1939, Frankfurt a. M., 429.] 철학자이며 정신과 의사인 Andrea Moldzio는 심지어 정신분열증을 철학적 질병의 계열로 승격시키고, “이 병의 압박 아래 인간은 즉시 철학을 시작한다고 주장하였다. ... 병은 인간을 철학자로 만들거나 철학하게 하는 결핍이다.[Nietzsche 1999[1882], Die fröhliche Wissenschaft, KSA, Bd. 347f.]

 

같은 것은 같은 것에 의해 치료된다(similia similibus curantur). 철학은 개념이 필연적으로 만든 상처를 치유하려는 개념의 긴장이다 왜냐하면 개념만이 개념이 방해하는 것을 처리할수 있기때문이다.[Adorno, Philosophische Terminologie, Bd. 1, Frankfurt a. M. 1973, 53; Negative Dialektik, Frankfurt a. M. 1975(1966), 62]

항상 증후가 이미 투쟁의 표현, 즉 들이닥친 병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는 표현이며 본래 건강을 찾으려는 싸움을 나타내는 것처럼, 철학함은 인간이 자신의 인간 존재세계에서의 현존재와 벌이는 대결, 현존재에 의해 공격을 받아 상처가 난 것에 대한 치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사유를 나타낸다.

 

철학은 공동체적 사유 형식, 삶의 형식, 교제 형식을 가지고 발생했다. 다시 말해 일상의 저편이 아니라 일상의 한가운데서 일어났다. 철학자들은 근원적으로 삶에서 주어지고, 삶에서 제기되는 물음을 세속적이고 (너무도) 인간적인 번잡함으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고요함 속에서 성찰하기 위해 사상을 가진 집단처럼 움직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남자의 삶과 분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유의 은둔성을 추구함으로써 사유는 점점 더 자신의 순수한 정신적문제와 연결되었다. 이후에 정신은 기독교를 통해 조정되고 검열되면서 자신의 나라를 감각적 세계의 불안 저편에 구축하였다. 스콜라 철학은 현실을 경멸스런 것으로 여기고 방치했으며, 그것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드러난 이 세계-저 세계의 차이는 계속해서 학술적인 안--차이, 즉 생활 세계와 학문 세계에 대한 근대적 차이로 연결된다.

 

Richard Sennett: “[]대의 융통성강요받는 사람이 처해 있는 상태를 표류”(Drift)로 부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정신없이 일에서 일로, 장소에서 장소로, 이간에서 인간으로 표류하는 것, 이것이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정상에 속하는 융통성 있는 인간의 운명이다.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아를 강하게 내세우지 않고 민첩하게 이리저리 융통성을 발휘하며 통합하지 않을 때 한결 더 쉽게 살 수 있기때문이다. 스스로 사유하는 개별자, 자아로 존재하기라는 어려운 기획[이 철학실천] [Richard Sennett, Der flexible Mensch - Die Kultur des neuen Kapitalismus, Berlin 1998]

 

심리치료와 철학실천 사이에에서 이루어지는 생생한 대화, 상호적인 성과를 목적으로 하는 대화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관계가 변증법적인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먼저 철학실천은 심리치료의 한 형식으로, 나아가 치료학파의 방향들을 종합하는 계속적인 단초로 파악될 수 있다. 반대로 심리치료는 실천적 철학함, 또는 실천하는 철학의 변형으로 이해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