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리오타르, 「숭고와 아방가르드」(1)

Kant 2020. 12. 15. 15:38

194812월 뉴먼(Barnett Baruch Newman)“The Sublime is Now”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집필했다. 1950~51년에 걸쳐 그는 캔버스에 “Vir Heroicus Sublimus”(숭고한 영웅적 인간)라는 그림을 그렸다. 60년대 초중반에는 “Here I (For Marcia)”, “Here II”, “Here III”라는 제목의 청동 조각품들을 주조했다. 1962년의 다른 그림에는 “Not ThereHere”라는 이름을 붙었다. 1965년과 1967년의 다른 두 작품들은 각각 “Now I”“Now II”라는 제목을 얻었다. 1949년에는 “Be I”(1970년에 둘째 버전을 내놓았다)를 그렸고, 1961~64년에는 “Be II”를 그렸다.

 

Barnett Newman, Vir Heroicus Sublimis (1950-51), Oil on canvas, (242.2 x 541.7 cm)
Here III, 1965-1966, Stainless and Cor-Ten steel, (314.6 x 59.7 x 47.3 cm.)

숭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숭고를 숭고의 경험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생각해 보자. 지금-여기의 경험과 같은 어떤 것에 관한 경험 말이다. 혹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설명할 수 없거나, 칸트가 말했듯, 현시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암시하는 것[allude]이 이 [숭고의] 느낌에 본질적이지 않을까? 뉴먼은 미완성으로 남긴 텍스트에서 자신의 그림은 공간이나 이미지의 조작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시간 감각에 관한 것이라고 썼다. 그는 덧붙이기를, 자신이 의미하는 시간은 향수(nostalgia)나 드라마, 참조점과 역사로 가득찬 시간이 아니라고도 했다. 그의 글은 이 같은 설명 직후 곧 끝난다.

 

우리에게 남겨진 물음은 이렇다. 뉴먼이 관심을 가졌던 시간은 어떤 종류의 시간인가?, 그가 염두에 두었던 지금은 무엇일까? 그의 친구이자 해설가인 Thomas B. Hess, 뉴먼의 시간 개념이 히브리 전통의 “Makom” 또는 “Hamakom”(거기, 사이트, 장소)이라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겼다. 그것은 유대교 경전 토라에서 명명할 수 없는 신성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는 그것이 정말 뉴먼의 의도였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만큼 Makom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과연 어느 누구인들 지금에 대해 충분히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 뉴먼이 생각했던 지금, 미래와 과거 사이에서 자신의 영역를 확보하려고 애쓰지만 그것들에게 삼켜져 버릴 수 있을 뿐인 현재의 순간일 리는 없다. 지금은 어거스틴 시대부터 에드문트 후설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이 분석했된 시간적 엑스터시들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의식에서 시간을 구성하고자 했던 사상의 전통을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뉴먼의 “지금”은 의식에게 생소한 것이며 의식으로 구성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의식을 해체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이 정식화할 수 없는 것이고 심지어 의식이 자신을 구성하기 위해 망각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도무지 어떤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고 할 때, 그 어떤 것은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음이거나 또는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헤프닝[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미디어가 취급하는 중요한 이벤트도 아니고 심지어 작은 이벤트도 아니다. 그냥 발생[생기]이다. 이것은 일어나는 어떤 것에 기인하는 감각이나 실재의 문제이것이 무엇을 뜻하든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 내기에 앞서 즉, 무엇(quid)에 앞서, 우리는 “before”를 필요로 하는 바, 그래야만 그 어떤 것(quod)일어날 수 있다”. 일어나고 있는 일은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앞선다”. 일어나는 일은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게 이건가?’, ‘그게 가능한가?’라는 물음들에 앞서일어난다. 오로지 그 다음에만탐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어떤 요점이 결정될 수 있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또는 저것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것은 이것 또는 어떤 다른 것인가?, 이것 또는 저것이 가능한가? . 어떤 하나의 사건, 발생하이데거(Martin Heidegger)ein Ereignis라고 불렀던은 무한히 간단하다. 그러나 이 단순성은 필요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 우리가 사유라고 부르는 것이 무장 해제되어야 한다. 철학, 회화, 정치, 문학 등에는 전통과 제도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한 개별 분야들은 학파, 프로그램, 연구 프로젝트 그리고 트렌드들이라는 형식에 의해 그 운명이 결정된다. 사고는 전달받은 것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반영하고 극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이미 생각했거나, 썼거나, 그렸거나, 사회화 된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고자 한다. 아직 시도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과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일용 양식이다. 전쟁의 빵, 군인들의 비스킷이다. 그러나 이 같은 동요(agitation [Erschütterung?]), 이 단어의 가장 고상한 의미에서 (동요라는 어휘는 칸트가 훈련과 판단을 포괄하는 대뇌 활동을 지칭하는 데 사용한 개념이다) 규정되어야 할 어떤 것이 남아 있을 때만, 즉 무언가가 아직 앞서서 규정되지 않은 경우에만 가능하다. 우리는 시스템, 이론, 프로그램 또는 프로젝트를 설정함으로써 그 어떤 것을 규정하고자 애쓴다. 실제로 우리는 항상 어떤 것을 예견[기대]하면서 규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또한 남아있는것에 대해 탐문하며 아직 규정되지 않은 것을 물음표로 표시할 수 있다.

 

모든 지적인 개별 영역들과 제도들은 아직 모든 것이 말해지거나 써지거나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당연시한다. 또한 이미 듣거나 발음한 단어가 마지막 단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나의 문장 ”, 어떤 에는 또 다른 문장, 다른 색이 등장한다. 그것이 무엇일지를 우리가 반드시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한 문장을 다른 문장과 연결하고 하나의 색을 다른 색과 이어주는 규칙을 믿을 수 있다면, 내가 위에서 언급한 과거와 미래의 제도들에서 정확하게 보존되는 규칙들을 추측할 수 있다. 학파, 프로그램, 프로젝트 등 이들 모두는 어떤 한 문장 뒤에 다른 어떠한 문장 또는 최소한 그와 같은 종류의 문장이 반드시 따라 나오며, 어떤 종류의 문장은 허용되는데 비해 다른 문장은 금지된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사고와 관련된 다른 활동처럼 회화에도 적용된다. 하나의 그림 작업 후에 다른 그림 작업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거나 허용되거나 금지된다. 하나의 색 뒤에, 이 다른 색, 그리고 이 특징 뒤에 저 특징도 그러하다. 시간과의 관계를 고려한다면[장기적 관점으로 보면], 아방가르드 선언과 Ecole des Beaux Arts의 커리큘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둘 다 궁극적인 좋음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 사건들과의 관계 속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둘 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 어휘, , 형태 또는 소리가 없어질 가능성, 어떤 문장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 언젠가 빵이 도착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잊어버린다. 이것이 화가가 자신이 형태를 부여해야 할 표면을 마주할 때 느끼는 비참[불행], 또는 음악가가 음향 표면을 마주할 때 느끼는 비참함이다. 또 사상가가 사유의 황무지에서 보게 되는 비참함이다. 이는 단순히 작품의 시작시점에 마주하는 빈 캔버스나 빈 페이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이 임박했을 때의 모든 순간에 관한 문제로서 모든 물음표에 관한 물음을 만든다. “그래서 이제 무엇이 일어나야 하지?”라는 모든 물음 말이다. 우리는 불안감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불안이라는 용어는 현대의 실존주의 철학자들과 무의식을 다뤘던 철학자들에 의해 많이 정교화된 용어다. 우리가 정말 기대를 의미할 경우, 불안은 그 기대에 주로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사실 [불안한] 긴장 또한 쾌를 수반할 수 있다. 예컨대, 미지의 것과 관련해서도 쾌를 수반할 수 있으며, 심지어 기쁨도 수반할 수 있다. 기쁨이란 스피노자에 의거해 표현하자면, 그 사건이 인도하는 존재의 심화(the intensification of being). 그와 같은 상태는 아마도 모순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물음표 자체를 표시한다.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말했듯, 질문은 어떤 어조에나 적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문의 ​​표식(mark),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지금이다.

 

그 모순적인 느낌쾌와 고통, 기쁨과 불안, 희열과 우울감17-18세기 사이에 유럽에서 숭고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거나 재차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미학이 예술에서 중요한 특권적 문제로 만들었던 것도 이 용어이고, 낭만주의(, 근대성)가 승리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용어 때문이다. 뉴먼은 이 단어와 관련된 심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의식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버크(Edmund Burke)숭고하고 아름다운 관념들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탐구 (1757)를 읽었으며, 숭고한 작품에 대한 버크의 과도한 초현실적묘사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행보와는 대조적이게도 뉴먼은 초현실주의의 경우 규정되지 않은 것을 다루면서 낭만적이거나 전-낭만적인 방식에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가 지금-여기안에서 숭고성을 추구했을 때, 그는 낭만적 예술의 달변은 부수어버렸지만,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회화적 표현이나 다른 표현 방식들이 추구하는 근본적 과제를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저기 저쪽, 다른 세계나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 안에 있다. 그것이 일어나다에 있다. 회화 예술의 규정에서 규정되지 않은 것, 그것이 일어나고 있다, 그림을 그림(painting)이다. 일어남이나 사건으로서의 색, 그림을 그림은 표현 불가능한 것인데, 바로 이점이 표현되어야 하는 바로 그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