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리오타르, 「숭고와 아방가르드」(2)

Kant 2020. 12. 15. 15:44

아마도 낭만주의와 현대아방가르드 사이의 총체적 차이점은, “숭고함은 지금”[숭고함은 지금 눈앞의 이 결과물이다]이라는 표현을 지금 숭고한 것은 이것이다”[지금 숭고한 것이 이 행위함 자체, 이 존재의 사건 자체로서 표현되고 있다]로 번역함으로써 드러날 것이다. 다른 곳, 저 위쪽 또는 저쪽 어디가 아니라, 이전에 또는 앞으로가 아니라, 옛날 어떤 때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것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이 이 그림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이곳에 이 그림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숭고함이다. 이 그림을 그리는 일이 필연적인 일이 아니고 거의 보여질 수도 없다는 점을 깨달으면서, 포착하려는 모든 지성을 떠나보내고 무장 해제하는 것, “그것이 일어나고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 예시나 주석을 동원해 일어남을 방어하기에 앞서그것을 보호하는 것, 누군가의 보호자를 투입하기에 앞서보호하는 것, 그리고 지금이라는 방패 하에서 바라보는 것이것들이 아방가르드의 엄격함이다.

 

숭고는 현대적인 것을 특징짓는 단일한 예술적 감수성(the single artistic sensibility)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

롱기누스는 담론을 통해 숭고성을 정의하고자 애쓰면서, 그것은 잊혀질 수 없으며, 저항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은 생각을 자극한다(thought-provoking)는 점이라고 적었다. 그는 심지어 연설가의 에토스와 파토스 속에서, 그리고 다양한 담화 절차 속에서도 숭고의 원천을 찾고자 애썼다. 연설 속의 비유, 단어 선택, 발음, 작문 등에서 말이다. 그러나 숭고함을 문제삼을 때마다 수사학이나 시에 관한 규정 속에 중요 장애물이 놓여있었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적었다. 연설 속에서 사고가 지닌 숭고성은, 때때로 연설가의 고상한 성격이 엄숙함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바로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 연설 형식의 극단적인 단순함을 통해 인지될 수 있다. 그것은 때때로 노골적인 침묵의 형태를 취한다. 연설이 사고와 실재 세계 사이의 불일치를 입증해 보여줄 때 그것의 웅장함이 진실로 나타난다.

 

롱기누스는 자연스러운구문을 뒤바꾸어 놓은 것들을 숭고한 효과의 사례들로서 제시하기까지 했다. 부알로는 1674년 출판한 롱기누스 텍스트의 서문, 그리고 1683년과 1701년에 쓴 부록에서 숭고한 것은 가르칠 수 없고 따라서 교수법은 그것에 관한 한 무기력하다고 했다. 숭고한 것은 시학을 통해 규정할 수 있는 규칙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알로는 [예수회] 사제 도미니크 부아르(Père Dominique Bouhours)와 견해가 일치했다. 그는 1671년에 미는 규칙에 대한 단순한 존중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더 나아가 나는 그게 뭔지 모른다”(je ne sais quoi)를 요구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여러분이 원한다면 천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데,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어떤 것, “신의 선물로서, 오로지 선택된 개인에게 나타나는 결과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근본적으로 은폐된현상이다.

 

디데로(Denis Diderot)의 펜 아래에서 기교(techne)작은 기교”(the little techne)가 되고, 예술가는 더 이상 자신을 영광스런 메시지의 대상이자 주인으로 만들어 주었던 문화의 지도를 받지 않는다. 대신 그는 천재가 되었고, 어떤 “je ne sais quoi”로부터 그에게 다가온 영감의 비자발적인 저장소가 되었다. 대중의 판단은 더 이상 공유된 쾌락에 관한 전통적 기준에 의존하지 않게 된다. 예술가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개인들(“사람들”)이 책을 읽고, 전시 갤러리를 돌아다니고, 극장과 콘서트홀의 군중이 되며 예측할 수 없는 충격, 칭찬, 경멸, 또는 냉대의 먹잇감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정체성의 확인과 찬미의 과정 속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옴으로써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 아니라, 그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다.

 

문제는 더 이상 어떻게 예술을 만드는가가 아니다. 오히려 예술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이 마지막 물음에 대한 분석이 다시 우리를 미규정성(indeterminacy)이라는 주제로 되돌아가게 한다.

 

바움가르텐의 미학은 예술 작품에 대한 개념적으로 규정된 관계에 의존한다. 칸트의 경우 미에 대한 감각은 이미지의 기능과 개념의 기능 사이의 자유로운 조화로 인해 불이 붙는 쾌이다. 숭고에 관한 미학은 더더욱 비규정적인 바, [그것에 대한 감각은] 고통과 혼합 된 쾌, 고통에서 나오는 쾌이다.

 

버크의 또 다른 관찰도 주목할 가치가 있는데, 예술 작품을 고전적 모방의 법칙에서 해방시킬 가능성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그는 회화와 시 가운데 어느 쪽이 상대적으로 더 큰 장점을 가지는가에 관한 오랜 논쟁에서 시의 편을 들었다. 회화는 모델들을 모방하고 그것을 형상으로 재현하는 일을 과제로 삼는다. 만약 예술의 대상이 그것이 의도하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감각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상상적 형상은 감정 표현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제약인 셈이다. 그러나 예술의 언어, 특히 시언어에서버크는 시를 규제가 가능한 장르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수많은 적극적 탐사가 이뤄지는 분야로 생각했다정서적 힘은 형태의 진실성으로부터 자유롭다. “천사를 그림으로 표현하려면 날개 달린 아름다운 소년만 그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과연 어떤 그림이 주님의 천사라는 언어 표현에서처럼 주님이라는 한 단어를 추가하는 것만큼의 웅장한 것을 제공할 수 있겠는가?”

 

강력한 효과를 추구함에 있어서 숭고의 미학에 의해 추진된 예술은 그 재료가 무엇이든 그저 아름답기만 한 모방의 모델들을 간과할 수 있고 간과해야만 한다. 또한 놀랍고 어렵고 충격적인 조합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야만 한다. 충격은 전혀 아무일도 아닌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탁월한 증거. 그것은 유예된 상실(suspended privation)이다.[우리를 그 순간에 사로잡고 있으니까]

 

Manet, Cézanne, Braque 그리고 Picasso는 아마도 칸트나 버크를 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제안하고 있는 것은, 예술이 나아가는 방향의 과정에서 되돌릴 수 없는 일탈의 문제에, 즉 예술적 조건의 모든 포용력에 영향을 미친 일탈의 문제에 더 가깝다. 예술가는 이벤트를 만들어 내기 위해 조합을 시도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추어는 더 이상 단순히 쾌를 경험하거나 예술과의 접촉에서 윤리적 이득[도덕적 교훈]을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자신의 개념적이고 정서적인 능력이 강화됨을 또는 양가적인 즐거움을 기대할 것이다. 예술품은 더 이상 자신을 모델에 굴종시키지 않으며,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자연을 모방하지 않고 인공물, 시뮬라크럼이 될 것이다.

 

숭고 미학의 도래와 더불어 19, 20세기 예술의 관심사는 비규정성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회화의 경우 화포, 프레임, , , 공간, 형태 등은 모두 낭만적 예술의 재현에 관한 제약에 종속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목적과 수단 사이의 모순은, 일찍이 마네와 세잔에 의해 15 세기 이래 공간에서의 형태 재현, 그리고 색상과 가치의 구성을 규정하는 특정 규칙들이 지니는 정당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의문을 던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세잔의 편지글을 읽으면, 그의 업적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고자 한 한 재능 있는 화가가 이룬 것이 아니라,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는 한 예술가가 이룬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의 작업은 화포에 저 색채 감각들”, 작은 감각들”(petites sensations)만을 기록할 때 위기를 맞았다. 세잔 자신의 가설에 따르면, 그러한 감각들은 어떤 대상과일, , 얼굴, 을 그림으로 표현할 때 그 대상의 존재 전체를 구성한다. 역사나 주제”, , 공간, 심지어 빛조차 고려하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이러한 근본적 감각들은 일상의 지각 안에 숨겨져 있다. 그것들은 화가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화가에 의해서만 복구될 수 있다. 화가는 이를 위해 시각 자체만큼이나 깊이 뿌리내려 있는 지각 및 지성의 편견의 장들을 제거하는 내적인 훈련을 거쳐야 한다. 만일 감상자가 보완적인 내부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 그림은 그 사람에게는 무의미하고 파악 불가능한 상태로 남게 된다. 화가는 단순한 미장공으로 간주될 위험을 감수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다”. 회화에 관한 규제를 행사하는 제도들아카데미, 살롱, 비평가, 애호가로부터의 인정은, 화가-구도자가 정말 중요한 것과 관련해 예술 작품에 의해 이뤄낸 성취에게로 가져오는 분별력에 비해 거의 중요하지 않다.[감상자는 화가의 작업에서 그 오리지널한 의미를 자신의 감상 능력만으로 간취해 낼 수 있는 능력자라는 얘긴가?]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자신이 세잔의 의심이라고 적절하게 표현한 것을 통해 화가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상 지각을 포착하여 그것을 지각에 앞선지각으로서 태어나게 하는 일이라는 점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것이 일어나고 있음의 경이로움을 보여주는 일이다. 세잔의 작은 감각들에게 독창성이라는 가치를 자신 있게 부여한 그 현상학자는 적어도 약간은 신뢰할 수 있음이 틀림없다. 그 감각들이 부적절하다고 자주 불평했던 화가 자신은 그것들이 추상물들”[이미 사유 과정을 거친 것]이며 자신이 캔버스를 가리지[채우지] 못하게 [방해]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캔버스를 채워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추상적인 상태가 되는 일(to be abstract)은 금지된 것인가?

 

아방가르드를 갉아 먹는 의심은, 세잔의 색채 감각이라는 표현이 마치 마지막 단어 인양 그것과 더불어 중단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점에서 그것들이 예고했던, 추상화를 멈추게 하는 일에 전혀 더 다가가지 않았다. 이론가들의 물음들과 화가들 자신의 선언문의 물결을 막았던 장벽들은 비규정적인 것을 위해 증언해야 할 필요성에 의해 하나둘씩 제거되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미국의 포스트 플라스틱”[후기 조형적] 추상화에 직면했을 때 제안한 것과 같은, 회화의 대상에 대한 형식주의적 정의는 곧 미니멀리즘에 의해 전복되었다. 캔버스를 팽팽하게 하기 위해 나무틀이 있어야 하는가? 아니다. 색채는 어떤가? 말레비치(Kazimir Malevich)가 흰색 바탕에 칠한 검은 색 사각형은 이미 1913년에 이 질문에 대답했다. 대상이 필요한가? 바디 아트와 헤프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17년 뒤샹의 분수조차 여전히 그랬던 것처럼 전시할 공간이 필요한가? 다니엘 뷔랑(Daniel Buren)의 작업은 이것조차 의심할 여지가 있다고 증언한다.

 

Kazimir Malevich, Black Square 1913,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예술사가 미니멀리즘으로 부르든 가난 예술”(Arte Povera)로 부르든 아방가르드 예술의 탐색가들은 회화 예술의 기본적인것 또는 근원으로 생각할 수 있을 요소들을 갈구했다. 그들은 최소한의 것으로 작업했다. 사람들은 아마도 아도르노가 부정의 변증법(1966) 끝부분에서 개략적으로 다룬 원리에 따라 그 탐색가들에게 생동감을 부여하는 엄격함을 반대해야 할 것이다. 그 엄격함은, “몰락해 가는 형이상학을 수반하는사유는 오로지 미세학적 사고들의 관점에서만 진행될 수 있다고 한 미학이론(1970)의 주장을 콘트롤한다.

 

미세학적 사고는 거대한 철학적 사고[형이상학]의 몰락 속에서 아직 사유되지 않은 사상의 발생을 기록한다. 아방가르디스트는 거대한 재현적 회화의 몰락 속에서 지각 가능한 지금의 발생을, 표현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는 표현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서 기록하고자 노력한다. 미세학적 사고처럼 아방가르드도 무엇이 주체에게 일어나는가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가?, 즉 날것의 상태를 염려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방가르드는 숭고의 미학에 속한다.

 

그것이 일어난다를 문제 삼을 때 아방가르드 예술은 그것이 과거에 수용자 공동체에 대한 관계 속에서 행했던 정체 확인의 역할을 포기한다.

 

이와 같은 고립화와 오해의 상황 속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은 억압에 취약하고 그것에 종속된다. 이것은 정체성 위기를 악화시켰을 뿐이어서, 1930년대부터 1950년대 중반의 재건 시기까지 지속된 장시간의 우울증상태를 거치면서 [수용자] 공동체들을 제거해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기간에] 숭고의 미학은 신화의 정치학으로 중성화되거나 전환되었다.

 

오늘날의 대다수 개발된사회들을 휩쓸고 지나간 초자본주의의 “위기”로 인해 아방가르드에 대한 다른 공격에 불이 붙었다. 아방가르드를 겨냥한 위협은 예술 작품 행사 영역에서 발전하고 있으며, “지금을 환영하려는 아방가르드의 시도에 대립한다. 그것은 더 이상 국가적인 당파를 필요로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시장 경제에서 직접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과 숭고의 미학 사이의 관계는 모호하고 심지어 제어하기 매우 곤란한 것이다. 자본과 아방가르드 사이에는 일종의 공모(collusion)가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행동으로 옮겼던 회의주의의 힘들, 심지어 파괴적 측면까지도이것은 마르크스가 쉬지 않고 분석하고 확인했던 것인데예술가들 사이에, 확립된 규칙에 대한 불신은 물론, 다양한 표현 양식들을 스타일들과 전적으로 새로운 재료들로 시험해 보려는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자본주의 경제에는 숭고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무제한적인 부 또는 권력에 관한 관념에 의해 규제되는 경제. 자본주의 경제는 기술을 통해 과학을 종속시킴으로써 실재를 점점 무형화하고 의심스러우며 불안정하게 보이게하는 데 성공할 따름이다.

 

개인으로서든 집단으로서든 인간의 경험,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아우라는 성공을 통한 즉각적인 만족과 자기 긍정에 의해 희석된다. 이러한 관찰은 진부하지만 여기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세대와 세대를 거치며 축적된 경험을 전해주던 시간적 연속성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정보의 분배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유일한 기준이 되어가고 있으나, 정보는 그 정의에 의거해 볼 때 생명 주기가 짧은 요소다. 전달되고 공유되자마자 그것은 더 이상 정보가 아니며, 주어진 환경이 된다. “모든 것이 말해졌기에우리는 알고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 장치에 먹거리로 주어져 버린다. 그것이 차지하는 시간은 이른바 즉각적인 것이다. [정보의] 정의에 따르면, 두 정보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정보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과 회로 시스템들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 사이에, 그리고 방금 일어난 것, 새로운 것에 대한 아방가르드의 탐색과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물음, 지금 사이에 혼동이 발생한다.

 

모든 시장이 그렇듯 예술 시장도 새로운 것에 관한 주권에 종속되며 예술가들에게 일종의 유혹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 매력은 단순한 부패 이상의 것에 관계한다. 그 유혹은 시간 자신이 현대 자본주의에 부과하는 혁신과 일어남(Ereignis) 사이의 혼동의 경계 내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강력한정보는우리가 그것을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정보의 수신자가 사용할 수 있는 코드를 통해 그 정보에게 귀속될 수 있는 중요성에 관한 역 논리’(inverse logic)에 존재한다. 그것은 [일종의] “소음과 같다. 대중과 예술가가, [예술품] 중개자문화 상품의 확산자의 조언을 받아 이러한 관찰에 의거하여 아방가르드하다라는 개념을 도출하기란 용이하다. 어떤 예술 작품이 의미를 벗어던지는 정도에 정비례해서 아방가르드하다는 개념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이야 말로 오히려 이벤트 같은 일 아닐까? 다른 [종류의] 참신성과 마찬가지로, 작품의 부조리성은 구매자의 용기를 꺽지 말아야 한다. 상업적인 성공과 마찬가지로 예술적 성공의 비결은 놀라운 것과 잘 알려진 것사이의, 그리고 정보와 코드 사이의 사이의 균형에 있다. 예술의 혁신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누군가는 이미 입증된 공식들을 요약하며, 누군가는 그 공식들과 합병, 인용, 장식, 모방에 의해 호환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다른 공식을 결합함으로써 그것들의 정상 상태를 벗겨버린다. 누군가는 [이렇게 해서] 키치 혹은 바로크까지도 나아갈 수 있다. 누군가는 대중의 취미, 그리고 다양한 형식들과 사용 가능한 [온갖] 대상들에 의해 허약해진 감수성이 채택하는 절충주의에 아첨을 떨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서 누군가는 자신이 순간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시장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숭고는 이제 더 이상 예술에 존재하지 않으며 예술에 대한 궤변에 존재한다.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진되지 않았으며, 규정되지 않은 것을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그리는 작업도 아니다. 발생, 일어남은 혁신에 수반되는 임대 가능한 파토스인 작은 전율(petit frisson)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혁신에 대한 냉소주의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은 분명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절망감이다. 그러나 혁신한다는 것은 마치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일어나도록 행동을 취하는 것을 뜻한다. 의지가 자기 자신을 긍정할 때, 시간에 대한 헤게모니 역시 긍정하게 된다. 의지는 또한 시간의 기술인 자본의 형이상학을 따른다.[자본은 시간처럼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데, 의지는 그런 자본에 순응한다?] 혁신은 전진한다”.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물음의 물음표는 유지되며(arrest), 의지는 발생에게 패한다. 아방가르드의 과제는 시간에 관한 영성적인 가정들을 파괴하는 것이다.[시간의 시작과 끝에 관한 사고, 곧 종말론적 사고] 숭고함에 대한 감각은 해체를 일컫는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