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P. Hadot, Philosophy as a Way of Life)

Kant 2022. 5. 28. 15:32

1. 영성훈련을 위한 글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이 책의 그리스어 제목의 더 나은 번역은 그 자신에 대한 권고일 것이다―서양에서 취리히 인문주의자 안드레아스 게스너(Andreas Gesner)가 1558-9년에 처음 출판한 이래 독자들을 계속 매료시켜 왔다. 그러나 독자들 모두(많은 역사가들까지 포함해서)가 항상 아우렐리우스가 이 책을 쓰면서 의도했던 바를 이해한 것은 아니다. 17세기 영어 편집자이자 번역가인 Meric Casaubon과 Thomas Gataker는 고대의 현실에 대해 여전히 친밀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다루고 있는 작업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명상록hypomnemata(라틴어로는 commentaria)라는 장르의 글을 모아 놓는 것인데, 이것은 저자가 개인 용도로 매일 작성한 메모였다.

많은 작가들이 고대에 이 문학 장르가 존재했음을 암시했었다. 하지만 그 글들은 출판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라질 운명이었다. 마르쿠스의 명상록이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황제의 직속 측근 중 한 사람의 경건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저서에 대해 시대착오적으로 자신들 시대의 문학적 편견을 투영했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체계적인 논문만이 철학 저작물의 완전한 형태로 간주되었고, 일반적으로 명상록 역시 그러한 논문 구성과 관련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결과 학자들은 명상록이 그러한 가상의 작품의 발췌 또는 단편들(disjecta membra) 또는 아마도 출판을 목적으로 작성된 일련의 메모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낭만주의가 두드러졌던 19세기에 들어와서야 명상록hypomnemata 또는 개인 메모집이라는 것이 널리 인정되었다. 그럼에도 종종 Ronan의 훌륭한 연구서인 Marclus Aurelius 또는 The End of the Ancient World에서처럼, 마르쿠스가 “그의 내면 상태에 대한 개인 일기”를 썼다고 주장되었다.

심리학, 정신분석학, 그리고 의심의 시대인 20세기에는 이 개인 일기를 썼다는 사실 자체가 심리적 불안의 증상으로 해석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비관주의"를 말하는 것은 진부한 말이 되었다. 예를 들어, 도즈(E. R. Dodds)는 마르쿠스가 자신에게 자행한 끊임없는 자기 비판 경향을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로마제국 시대 역사가]가 우리에게 전해 준 마르쿠스의 꿈과 연관시켰다. 황제가 입양되던 날 밤, 황제는 자신의 어깨가 상아로 된 꿈을 꾸었다고 디오는 말한다. 도즈에 따르면 이것은 마르쿠스가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겪었음을 시사한다.

H. van Effenterre와 심리학자 R. Dailly는 자신들의 공동 연구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례”로 명명한 병리학적 측면―심리적 측면과 생리학적 측면 모두―을 진단한다. 이들은 카시우스의 증언에 근거하여 마르쿠스가 위궤양을 앓았고 황제의 성격이 이 질병의 심리적 상관관계와 일치한다고 가정했다.

 

궤양 환자는 자신에게 갇힌 사람,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이다. 일종의 자아 비대증으로 인해 동료 인간을 볼 수 없다. … 궁극적으로 그가 타자에게서 찾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 그는 시간을 엄수할 정도로 양심적이지만, 인간 관계보다 행정의 기술적 완성에 더 관심이 있다. 비록 후자[행정의 기술적 완성]는 전자[인간관계]의 총합일 뿐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만일 그 궤양 환자가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정당성을 추구할 것이고 우월한 성격을 조작하려 할 것이며 스토아 학파나 바리새파의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이 저자들에게 명상록은 마르쿠스 자신의 “자기 설득”과 “자신의 눈에 맞는 정당화” 필요에 대한 반응이다.

이러한 해석의 절정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프리카(Thomas W. Africa)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편 중독"이라는 글이다. 그는 갈렌(Galen)과 카시우스의 구절을 기초로 마르쿠스에게서 진정한 아편 중독을 찾으려 하며 명상록에서 그 증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인용한 텍스트는 마르쿠스의 약물 중독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한다. 중독 증상으로 인용한 명상록의 텍스트에 대한 아프리카의 해석은 순전한 넌센스다.

카시우스는 아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다누비안 캠페인[다뉴브 지역 전투] 동안 마르쿠스는 밤에 식사를 하지 않았고 낮에는 가슴과 배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 약간의 테리악을 소비했다고만 언급했다. 갈렌이 실제로 아편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의 말에서 진정한 아편 중독을 추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다뉴브 전역에서 마르쿠스가 안전을 이유로 "이집트 콩알 크기만큼" 매일 약간의 테리악을 먹었다고 말했을 뿐이다. 테리악은 독극물에 대한 탁월한 해독제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것의 복용은 로마 황제들 사이에서 빈번한 관습이었다. 테리악에는 양귀비 주스, 즉 아편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마르쿠스는 복용한 낮 동안 만성 피로를 경험했다. 그래서 그는 혼합물에서 양귀비 주스를 제거했으나 이번에는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양귀비 주스가 들어간 테리악을 복용했으나, 이번에는 테리악이 오래되어서 효과가 훨씬 약했다. 그의 공식 의사 데메트리우스가 사망한 후 갈렌이 황제의 테리악 조제 성분을 담당하게 되었은데 황제는 그의 서비스에 전적으로 만족했다. 갈렌은 황제에게 그의 테리악이 가장 좋은 이유는 전통적인 비율에 따라 조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피로와 불면증에 대한 마르쿠스의 문제는 우리가 볼 수 있듯이 단지 일시적이었다. 그는 아편 자체를 위해 아편을 찾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약효를 위해 아편을 찾았고 갈렌 덕분에 복용량에서 그 적절한 비율을 발견했던 것 같다.

아프리카는 자신의 기사에 대한 마지막 메모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우리가 마르쿠스가 그랬던 것처럼 테리악을 많이 소비하더라도, 거기 포함된 아편의 양은 아마도 아편 중독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규정된 복용량이 항상 존중되지는 않았다고 가정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황제의 명상록의 기이함과 그가 설명하는 환상의 기이한 성질을 설명할 방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아프리카의 논리의 취약 부분이 드러난다.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아편 중독자였다는 사실이 전혀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중독자였다고 추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명상록의 기이함을 어떻게든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다. 이것은 이중의 궤변이다. 첫째, 명상록에서의 마르쿠스의 환상이 기괴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꼭 아편으로 설명해야 할 이유는 없다. 결국, Dailly와 van Effenterre는 위궤양으로 설명하는 데 만족하고 말았다!

아프리카는 그가 명상록과 드 퀸시(Thomas De Quincey)의 잉글랜드 아편 복용자의 고백(Confessions of English Opium-eater, 1822) 사이의 유사점을 감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교가 실제로 가능할까?

아프리카 자신에게 들어보자.

 

시간에 대한 마르쿠스의 시각, 즉 모든 것을 자신의 앞, 미래의 심연으로 운반하는 거친 강으로서의 시간관은 [스토아학파의] 복도에서 바라보는 인생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아편이 그에게 열어준 시공간의 확장된 관점을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시간적, 공간적 차원은 유럽이 한갓 작은 얼룩으로, 현재가 한 점으로 축소되고, 인간이 진흙 덩어리 위를 기어 다니는 곤충이 될 때까지 가속화되었다. 역사는 더 이상 참고할 실제의 과거사가 아니라 가장행렬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중독자였던 드 퀸시의 다음과 같은, 악화된 감각을 공유했던 것이다. “공간 감각, 그리고 마침내 시간 감각은 모두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건물들, 풍경 등은 신체의 눈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광대한 비율로 전시되었다. 공간은 형언할 수 없었고, 스스로 반복하며 무한대로 팽창하고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의 엄청난 팽창보다는 날 훨씬 덜 괴롭혔다. 때때로 나는 하룻밤에 칠십, 백 년을 산 것 같았고, 아니 때로는 인간 경험의 한계를 훨씬 초월한 기간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아프리카가 언급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영원[의 시간]은 사건들로 형성된 일종의 강이며 격렬한 급류다. 하나가 눈에 보이는 즉시 사라질 뿐이다. 다른 것이 운반되어 오지만 그것도 곧 쓸려 갈 것이다.
 
존재하고 발생하는 모든 것이 존재하고 사라져 없어지는 속도에 대해 자주 생각하라. 존재는 끊임없이 흐르는 강과 같고 그 활동은 끊임없이 변하며 그 원인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는 것조차 안정적인 것은 거의 없다. 또한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과거와 미래의 무한한 틈 사이에 머물러라.
 
아프리카씨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위와 같은 내용은 스토아학파에서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 세네카의 다음 구절을 보자.
 
너의 마음의 눈앞에 광대한 시간의 심연과 우주를 놓아라; 그리고 우리가 인간의 삶이라고 부르는 것을 무한과 비교하라. …
 
모든 것이 똑같은 심연으로 떨어진다. … 시간은 한없이 빨리 흐른다. … 우리의 존재는 한 점이다. 아니, 훨씬 더 작다. 그러나 자연이 이 보잘것없는 것을 나누어서 더 오래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이미지는 고결한 이미지다. 우리는 타렌툼의 레오니다스(Leonidas of Tarentum, 그리스 출신 로마 시대 시인)의 훌륭한 구절에서도 그것을 발견한다: “오 인간이여, 그대의 동이 트기 전에도 시간은 무한했고, 하데스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또한 무한하다. 인생의 어떤 몫이 그대에게 남아있겠는가, 한 점 또는 그 점보다 더 작은 것?” 분명 마르쿠스의 강은 다름 아닌 “끊임없이 흐르는”, 스토아학파의 존재의 강이지만, 결국 플라톤이 우리에게 말하듯, 모든 존재를 하나의 강의 흐름에 비유한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것은 플루타르크가 언급한 플라톤주의자들의 강이기도 하다. “만물은 동시에 일어나고 소멸한다: 행동, 말, 감정―시간은 강물처럼 모든 것을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강을 오비드(Ovid)도 언급했다: “시간 자체는 강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며 흐른다. … 파도는 파도에 밀려서 온다.” 

위에 인용된 구절에서 세네카가 프로포네(propone)―“네 마음의 눈 앞에 놓아라”, 즉 “자신에게 시간의 심연을 보여주어라”―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가 스토아 학파가 실천해야 하는 상상의 훈련에 대해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명상록에서 자신의 상상 속에서 우주의 차원을 포용하고 높은 곳에서 사물을 보려고 할 때와 같은 종류의 훈련인 것이다. 이 훈련은 그것들을 그것들이 갖고 있는 진정한 가치로 응축시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네가 아주 작은 정도로만 참여하는 존재 전체를 생각해 보라. 짧고 미미한 부분이 네게 할당되어 있는 영원의 전체를 생각해 보라.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라. 너는 그것의 하찮은 부분이다.
 
만일 네가 갑자기 공중으로 솟아올라 높은 곳에서 인간사의 잡동사니를 관찰한다면, 또 네가 공기와 에테르에 거주하는 존재의 영역이 얼마나 광대한가를 본다면, 너는 그것을 경멸하게 될 것이다.
 
네게는 불필요한 많은 것들, 너에 대한 장애물들을 제거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네 가치 판단에 달려 있다. 너는 우주 전체를 생각에 품고, 끝없는 영원을 생각하고, 사물 하나하나의 급격한 변화를 반성함으로써 광대한 공간을 네 앞에 펼쳐지게 할 것이다. 태어남과 해체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짧은지, 네가 태어나기 전까지의 시간의 틈이 얼마나 광대한지, 그리고 해체된 후의 시간도 얼마나 무한할 것인지를 생각하라.
 
이성적인 영혼은 … 온 우주와 그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공허를 여행한다. … 공허는 무한의 무한대 범위에까지 뻗어있다. 그리고 그것은 만물의 주기적인 재생을 검토하고 명상한다.
 
아시아와 유럽은 세계의 작은 구석이다. 모든 바다는 세상의 작은 물방울이다. 현재의 각 순간은 영원의 한 점이다. 모든 것이 보잘것없고 불안정하며 사라지고 있다.
 
분할되는 무한한 영원의 얼마나 보잘것없는 일부가 각 인간에게 할당되었는가. 그것은 전속력으로 끝없음 속으로 사라져 간다. 우주적 실체의 얼마나 보잘것없는 부분이고, 우주적 영혼의 얼마나 하찮은 부분인가; 온 지구 중에서 네가 기어 다니는 땅덩어리는 얼마나 하찮은가!

 

이 텍스트와 드 퀸시에서 인용한 위 구절 사이의 차이점이 눈에 들어온다. 후자의 경우 시간과 공간의 왜곡은 말하자면 외부에서 그에게 부과된 것이다. 중독자는 그의 인상의 수동적 희생자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르쿠스에게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에 대한 고려는 능동적 과정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나타내라”와 사물의 전체를 “생각하라”는 그의 반복된 훈계를 통해 아주 분명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상상력의 기능을 활용하는 전통적인 영성 훈련을 발견한다. 드 퀸시는 엄청난 비율을 차지하는 순간의 왜곡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에 반해 마르쿠스는 모든 순간과 장소가 극소수의 비율로 축소되어 보일 수 있도록 무한과 전체를 상상하려는 노력에 대해 말한다. 마르쿠스의 경우 이러한 상상력의 자발적 훈련은 스토아학파의 고전적인 우주론적 도식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마르쿠스의 훈련은 보편적인 자연의 관점 내에서 인간사를 대체할 수 있는 그 인간사에 대한 비전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절차가 바로 철학의 본질이다. 우리는 고대의 모든 철학 학파에서 동일한 형태로, 어휘상의 표면적 차이 아래에서 그것이 반복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시간과 존재의 총체를 숙고하고 그 결과로서 인간사를 경멸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철학적 본질을 정의한다.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티레의 막시무스와 같은 플라톤주의자들 사이에서, 스토아 학자들 안의 신피타고라스주의자들에서도, 그리고 위에서 인용한 메트로도루스의 구절에서처럼 심지어 에피쿠로스 학파들 사이에서도 같은 주제를 접한다.

 

키케로의 스키피오의 꿈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손자는 은하수 위에서 지구를 응시한다. 그에게 지구는 너무 작아서 로마 제국은 감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고, 사람이 사는 세상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을 닮았고, 생명 자체는 한 점보다 덜 실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주제는 서양 전통을 통해 계속 유지되었다. 파스칼의 “두 개의 무한대”를 생각나기도 한다: “지구를 하나의 점처럼 보이게 하라 … 이 별이 만들어내는 광대한 궤도와 비교해서 …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직접 적은 메모들 우리에게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정보를 거의 주지 않는다. … 마르쿠스는 자신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관론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르쿠스의 수많은 진술은 어떤가? 그의 심리 상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누군가 그것들을 모아보면, 그것들은 확실히 인간에 대한 완전히 경멸하는 인상을 준다. 우리는 쓴맛, 혐오감, 그리고 심지어 메스꺼움같은 표현들이 인간의 존재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는 것만 같다: “당신이 목욕하고 난 물이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기름기, , 오물, 더러운 물, 모든 종류의 혐오스러운 것들이것들이 삶의 각 부분이고 모든 실체다.”

 

우선, 이런 경멸적인 표현은 육체와 몸을 위해 남겨진 것인데, 마르쿠스는 이를 “진흙”, “흙”, “불순한 피”라고 부른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인류가 일반적으로 중요한 가치로 간주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취급했다.

 

이 음식들과 요리들은 죽은 물고기와 새와 돼지들일뿐이다. 이 팔레르니안 와인은 미미한 양의 포도주스고, 보라색 테를 두른 이 토가(toga)는 어패류 피에 담갔던 양털이다. 섹스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장기 일부를 서로 비비고 곧 이어 약간의 점액이 돌발적으로 분비되는 것뿐이다.

 

마르쿠스는 인간의 활동에 대해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환상 없는 태도를 취한. “인생에서 높이 평가되는 모든 것은 공허하고, 사소하며, 아주 불쾌한 것들이다. 서로를 물어뜯는 작은 개들의 무리, 싸우고, 웃고,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아이들 같지 않은가”. 마르쿠스가 제국의 국경을 방어하고자 치룬 전쟁들은 거미가 파리를 사냥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또 사르마티아 노예를 사냥하는 것과 같았다.

마르쿠스는 인간이라는 꼭두각시의 혼란스러운 흥분상태에도 혹독한 눈길을 던졌다: “그들이 먹고, 자고, 성행위하고, 배변할 때 그들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해보라. 그 다음 그들이 자랑스러워하고 중요한 행동을 할 때, 그들이 화가 나서 아랫사람을 업신여길 때, 그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생각해보라.” 인간의 흥분은 한 순간밖에 지속되지 않으며 결국 정말 미미하게 끝나기 때문에 더욱 우스꽝스럽다: “어제, 약간의 점액, 내일의 재 한줌 또는 미이라.”

 

인간 코미디를 요약하는 데는 두 단어 충분하다: 모든 것은 진부하고 모든 것은 덧없다. 진부하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바로 지금 현재와 같은 모습 그대로라는 것을 항상 명심하라 ;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고, 또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경험이나 고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는 이 단조로운 드라마와 장면들, 그것들을 여러분의 마음의 눈 앞에서 살아나게 해보라;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필립, 알렉산더, 크로이소스의 궁정 전체를 그려보라. 이 모든 광경들은 똑같았다; 바뀐 것은 배우들뿐이었다.

...

마르쿠스는 자신이 후세에 남기는 이름에 의해 살아남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존재의 짧음을 위로하려 하는 사람들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묻는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단순한 소리가 희미한 울림이다.” 기껏해야 이 비참하고 덧없는 것이 몇 세대에게 전해질 것인데, 그 각 세대 또한 무한한 시간 속에서 번개처럼 번쩍이는 순간 동안만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착각에 속지 말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조차 모르며,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곧 잊어버릴 것인가.” “여러분은 모든 것을 금방 잊어버릴 것이고, 또한 곧, 모든 것도 여러분을 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