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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2(P. Hadot, Philosophy as a Way of Life)

Kant 2022. 5. 28. 17:44

비관적인 발언들이 이렇게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정말 인상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마르쿠스 자신의 심리에 대해 지나치게 성급한 결론을 도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고대 작가들도 많은 현대 작가들처럼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직접 글을 썼거나 그들이 우연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상상하는 것은 너무 안이하다.

예컨대 우리는 이렇게 추측한다. 마르쿠스의 명상록은 그의 일상적인 감정을 우리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예컨대 루크레티우스 자신은 불안한 사람이었고, 불안과 싸우기 위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자신의 시를 사용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는 그의 고백록에서 정말로 자신을 고백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사실, 고대 텍스트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 구절들의 분명하고 표면적인 의미를 고려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왜 그 구절들이 써졌거나 말해졌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그 글들의 목적을 발견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 비관적인 마르쿠스의 선언이 삶이 보여주는 광경에 대한 혐오나 환멸의 표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사건들과 사물들을 평가하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수단이다. 그는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만들어 내는 전통적인 표현들에서 그것들을 분리하고, 이러한 사건들과 사물들을, 그것들이누군가 말했듯 본성[자연]적으로실제로 존재하는 방식 그대로 정의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

우리가 보았듯이, 마르쿠스의 모든 벌거벗은 현실 존재에 맞서려는 노력은 이미 그의 주변 사람들과 사물에 작용하고 있는 부패와 해체의 과정을 엿보게 하거나, 아우구스투스의 궁정을 그의 눈앞에 한순간 살아있게 하여, 그의 상상 속에 살아 있는 이 모든 사람들이 실은 죽은지 오래라는 것을 깨닫도록 그를 안내한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학생들에게 학교의 옛 소년들의 사진을 보게하게 했을 때도 그랬듯, 이것을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이나 병적인 자만심으로 해석할 권리는 없다.

윌리엄스가 연기한 캐릭터는 삶의 각 순간마다 대체할 수 없는 가치인 카르페디엠의 의미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이 목표를 염두에 두고 그는 교실 사진 속의 매우 젊고 살아있는 모든 얼굴들이 이제 죽은 지 오래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더욱이 마르쿠스가 인간 존재의 단조로움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지루함을 표현하고자 했던 게 아니다. 죽음이 우리에게서 어떤 본질적인 것도 빼앗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자기 자신에게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루크레티우스에게서도 같은 주장이 죽음이라는 불행에 대해 인간을 위로하기 위해 자연 자신에 의해 사용된다: “당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새로운 발명품은 없다. 모든 것은 항상 똑같다. 당신을 위해 점포에 진열된 물건들은 언제나 똑같다. 심지어 당신이 절대 죽지 않는다 해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경우, 이 모든 선언은 그가 다음과 같은 용어로 공식화한 방법을 의식적이고 자발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항상 네가 가진 표상에서 일어나는 대상을 정의하거나 기술하여, 그것을 전체로서든 또는 그 구성 부분들로 나누어진 것으로서든 본질 그대로 볼 수 있게 하라. 그것의 적절한 이름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고 있고 또 그것들로 용해될 것들의 이름들을 너 자신에게 말하라.

 

이 같은 방법은 철저히 스토아적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고 따라서 도덕적 가치가 없는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표현에 이것은 불쾌하다”, 이것은 좋다“, 이것은 나쁘다”, “이것은 아름답다”, “이것은 추하다등과 같은 주관적 가치 판단을 보태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우리가 객관적인 표현이라고 번역한 스토아 학파의 악명 높은 이해[포괄]할 수 있는 지각이란, 바로 우리가 벌거벗은 현실에 모든 가치 판단을 첨부하는 것을 자제할 때 일어난다. 에픽테토스는, “우리는 객관적 표상을 지닌 어떤 것에게 절대로 우리의 동의를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아무개의 아들이 죽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의 아들이 죽었다고.

다른 일은 없고?

전혀 없어.

 

아무개의 배가 침몰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의 배가 침몰했다고.

 

아무개가 감옥으로 끌려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가 감옥으로 끌려갔다고.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지금 “그는 운이 나빴다”라는 말을 덧붙인다면, 우리 각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이 관찰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현실주의적 정의에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물질과 자연적 세계의 대상 앞에서 혐오하는 태도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 관점에 따르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세계와 물질에 신적인 이성 내재한다는 스토아 교의를 포기한 것이고, 그에게서는 예컨대 크리시포스가 경이로운 세계에 대해 느꼈던 것과 같은 감탄의 흔적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셈이다. 따라서 그들은, 마르쿠스에게서는 현상 세계와 별개로 존재하는 신성함의 초월성을 긍정하는 경향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쿠스의 일부 구절들은 이 점에 있어서 정말로 도발적으로 보이지만, 가장 신중하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마르쿠스가 모든 것의 근저에 있는 물질의 부패 액체, 먼지, , 악취를 환기시킬 때 그는 물질 그 자체가 부패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변형은 자연적인 과정으로서, 그것들은 자연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혐오스럽게 보이는 현상들을 반드시 동반한다는 것을 강조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앞에서 인용했던 구절이 훨씬 더 도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당신이 목욕하고 난 물이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기름기, , 오물, 더러운 물, 모든 종류의 혐오스러운 것들이것들이 삶의 각 부분이고 모든 실체다.” 이 간결한 텍스트는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마르쿠스가 여기서 객관적 정의에 관한 그의 방법을 적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하다: “물질적이거나 생리적인 현상을 실제로 관찰할 때, 나는 그것들 중 많은 측면들이 역겹거나 하찮게 보인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들은 먼지, 버려진 물건을 덮고 있는 오물, 나쁜 냄새, 그리고 악취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객관적 표현은 현실의 이 모든 측면을 인식해야 하며, 그 어떤 것도 숨기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현실주의적 비전은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것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삶에 직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다. 세네카가 말했듯이

 

이런 것들에 기분이 상한다는 것은 네가 욕조에서 물이 튀었다거나 군중 속에서 이리저리 밀려다녔다거나, 또는 진흙탕에서 더러워졌다고 불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삶 속에서도 욕조나 군중 속, 또는 길에서와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 인생은 우아한 어떤 것이 아니다.

 

둘째, 실주의적 전망은 세상에 이성이 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 이성을 가장 순수한 상태, 다이몬, 내면의 정령, 인간 내면의 지도 원칙, 자유의 원천과 도덕적 삶의 원칙에서 찾을 수 있도록 우리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정의는 역겨움과 혐오감의 침울한 분위기를 강화함으로써 우리가 보편적인 이성의 관점에서 사물을 고려할 때 모든 사물을 변형시키는 화려한 조명과의 대조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곳에서 마르쿠스는 주저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모든 것은 그것이 그 공통의 지시 원칙에서 직접적으로 비롯되었든, 또는 그것이 그 원칙의 필연적인 결과이든, 위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사자의 크게 벌린 턱, 독, 그리고 가시나 진흙과 같은 온갖 종류의 불쾌한 것들은, 높은 곳에 있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의 부산물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쾌한 것들이 여러분이 공경하는 원칙에 이질적이라고 여기지 말고 대신 모든 것의 근원을 고려하라.

 

여기서 오물, 먼지, 그리고 현실의 그밖의 명백히 혐오스러운 양상들은 결국 보편적인 이성으로 되돌아가는, 자연 과정의 필연적 결과임이 아주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혐오스럽게 보이는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변화에 수반되는 부수적 현상이다.

 

여기서 마르쿠스는 물질들은 그것을 형성하고 다스리는 이성에게 고분고분하고 복종한다는 스토아의 정식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한다. 마르쿠스의 물리[본성]/객관적 정의의 기능은 우리가 자연적인 과정에 수반하는 몇몇 현상들 앞에서 느끼는 거부감이 인간중심적 편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깨닫게 만드는 데 있다. 마르쿠스는 자연이 모든 면에서 아름답다는 그의 믿음을 다음과 같은 매력적인 구절로 표현한다.

 

자연현상의 부수적인 부산물에게조차도 즐겁고 매력적인 무언가가 있다. 예컨대 빵을 구을 때, 이런 식으로 갈라져 떨어지는 바로 그 부분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빵 만들기 그 자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나, 그 부분들은 어떻게든 적절한 것들이고, 우리의 식욕을 가장 특별한 방식으로 자극한다. 무화과도 마찬가지라서 한창 무르익었을 때 터진다. 아주 잘 익은 올리브의 경우, 부패에 가까울 정도로 익은 바로 그 상태가 올리브에 어떤 아름다움을 보탠다. 땅 쪽으로 휘어져 내린 잘 익은 옥수수 이삭도 마찬가지고, 사자의 주름진 이마도 그렇고, 야생 돼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품도 그렇고, 다른 많은 것들이 그렇다. 우리가 그것들을 따로 놓고 보면, 그것들은 결코 아름답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자연 과정의 부수적인 부산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우리에게 매력적인 효과를 준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연의 과정에 대한 [자연스런] 느낌과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한, 적어도 어떤 측면에서 그 사람을 유쾌하게 만들어 주지 못할 부수적 부산물로서 일어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런 사람은 … 실제로 벌어진 야수의 턱을, 조각가나 화가들이 그것들을 모사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는 예술품만큼이나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의 현명한 시선은, 어린 아이들에게서 사랑스러운 매력을 발견할뿐만 아니라 노년의 남녀에게서도 넘쳐나는 성숙함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는 않지만, 자연과 그 자연의 작용에 진정으로 익숙해진 사람만이 관심을 가지는 것들은 많다. ...

 

우리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그러나 특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것만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고 아름다운 비례와 이상적인 형태를 나타내는 이상주의 미학의 자리에, 이제 살아있고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현실주의 미학이 등장한다. 더욱이 우리는 아울루스 겔리우스로부터 마르쿠스가, 자연의 원래 계획과 이 계획으로 인한 예기치 못한 결과를 구별한 것이 크리시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마르쿠스는 정통 스토아 전통에 확고히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언급했던 도발적인구절로 돌아가 보자. 마르쿠스의 뜻은 다음과 같다. 스토아 학자들이 무관심(indifferentia)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룰 때,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본성에 의존하는 것을 다룰 때, 우리는 혐오스러운 것과 즐거운 것 사이에 자연 그 자체 이상의 어떠한 구별을 해서도 안 된다. 먼지, 진흙, 가시는 결국 장미나 봄과 똑같은 근원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관점에서, 그리고 또한 자연에 익숙한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목욕물과 나머지 피조물 사이에는 어떠한 구별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것은 똑같이 자연이다.

 

우리는 이상에서 언급한 어떤 것으로부터도 마르쿠스의 심리 상태를 추론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거의 할 수 없다. 그가 낙관주의자였나, 비관주의자였나? 위궤양을 앓았었나? 명상록은 우리가 이 질문들에 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전통적으로 스토아 학파 사람들이 실천했던 영성 훈련에 관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