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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3(P. Hadot, Philosophy as a Way of Life)

Kant 2022. 6. 2. 17:25

2.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에 스토아 학파 문제의 가장 큰 권위자는 에픽테토스였다. 에픽테토스는 네로가 노예에서 해방시켜 준 한 사람인 에파프로디토스(Tiberius Claudius Epaphroditus)의 노예였으며, 스토아 학파 무소니우스 루푸스(Musonius Rufus)의 수업을 들었다. 나중에 에픽테토스가 에파프로디토스에 의해 풀려났을 때, 그는 로마에 철학 학교를 열었다. 서기 93-4년, 에픽테토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철학자들을 추방한 칙령의 희생양이 되었고, 그는 에피루스의 니코폴리스(Nicopolis)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그는 또 다른 학교를 열었는데, 그곳에서 그의 정규 학생 중 한 명은 미래의 공직자이자 역사가 니코메디아의 아리아노스(Lucius Flavius Arrianus)였다.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전하는 데 책임이 있는 사람은 이 아리아노스였다. 에픽테토스는 고대의 많은 철학자들처럼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아노스가 우리를 위해 보존한 것은 에피테토스의 철학적 가르침―예를 들어, 크리시푸스와 같은 스토아 학파의 저자들에 대한 그의 논평, 또는 그 학파의 교리에 대한 그의 더 일반적인 설명 등에 관한 기술적인(technical) 부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리아노스가 필사한 것은 고대 철학 학파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수업의 기술적인 부분이 끝난 다음에 이루어진 토론이었다. 이러한 토론에서, 선생은 청중들의 질문에 답하거나, 철학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중요한 특정 사항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곤 했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한데, 이것은 우리가 에픽테토스의 담론에서 스토아 학설의 모든 측면에 대한 기술적, 체계적인 설명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들은 대부분 윤리적인 문제에 국한되고 한정된 수의 문제를 다룬다. 물론 이것이 에픽테토스가 이론적인 가르침에서 스토아 학파의 체계 전체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아리아노스 작품 중 첫 네 권만이 전해져 온다. 우리는 《에픽테토스의 담론》 제5권의 발췌문을 인용하는 아울루스 겔리우스의 한 구절을 통해 작품의 일부가 유실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근거로 볼 때, 우리는 아리아노스의 주석에 기반해서 후기 스토아의 교육 과정에서 이론적인 철학적 가르침이 점차 약화됐다고 결론 내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에픽테토스가 철학에 관한 담론철학 그 자체의 실천 사이의 차이에 대한 스토아 학파의 전통적 개념을 매우 강하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따금 스토아 학파는 철학을 두 부분으로 구분했다고 주장되곤 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자연에 대한 학습과 담론의 규칙들로서, 자연학논리학으로 이뤄지는 이론적이고 담론적인 부분을 다루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학에 해당하는 철학의 적인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오히려 이론적인 철학적 담론, 그리고 살고 경험한 것으로서의 철학 그 자체, 즉 이 두 종류의 철학이 모두 각각 다시 위와 같은 세 가지 구성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론적인 철학 담론에서 철학의 세 부분[자연학, 논리학, 윤리학]은 반드시 구분되었다. 그것들은 별개의 설명의 대상들을 다루었고, 계승이라는 논리적 원칙에 따라 전개되었으며, 스토아 학파 이론의 기본 원칙의 기초를 닦고 발전시켰다. 이론적인 담론의 수준에서, 철학의 각 부분들은 교수법적 설명의 필요에 따라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에 대해 외부[독립]적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철학 자체는 지혜의 훈련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매 순간마다 새롭게 다루어지는 독특한 행위였고, 훈련 주제에 따라 논리학, 자연학, 또는 윤리학의 훈련으로 간주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통일성이 전혀 감소하지 않았다. 이 수준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이론적 논리, 즉 올바른 추론에 관한 이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일상 생활에서 잘못된 표상에 기만당하지 않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둔다.

우리는 더 이상 이론 자연학, 즉 우주의 기원이나 진화에 관한 이론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는 매순간 우리가 우주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의 욕구를 이 상황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 관심이 있다. 훈련으로서의 철학하기[실천]에서는 더 이상 덕과 의무의 정의와 분류 작업인 윤리학적 이론에 관심이 두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윤리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뿐이다.

구체적인 철학적 실천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항상 스토아 학파의 근본적인 신조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신조들은 우리의 올바른 판단, 우주에 대한 우리의 태도, 그리고 폴리스 내의 동료 시민들에 대해 우리가 선택해야 할 행동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살고 경험한 것으로서의[=삶과 경험으로서의] 철학은 이론적인 담론에 의해 가르쳐진 원리들을 마음속에 살아있게 하기 위해 명상의 지속적인 훈련과 끊임없는 경각심을 포함하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세 가지 훈련 영역”에 왜 그렇게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는지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론적 철학적 담론과 살고 경험한 것으로서의 구체적인 철학 사이의 이러한 구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리아누스가 보고한 《에픽테토스의 담론》에서, 이 세 영역은 체계상의 상당한 엄격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구분 이론이 에픽테토스의 이론적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짐작하는 것은 정당하다.

에픽테토스의 이론은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전통적인 스토아적 구분을 기초로 한다.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은 가치 판단, 행동 경향성, 욕구, 혐오, 그리고 한마디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은 육체, 부, 영광, 높은 정치적 지위, 그리고 한마디로 우리 자신이 하지 않는 모든 것이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영혼의 행위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은 자연과 운명의 일반적인 과정에 의존하는 것들이다.

우리에게 의존하는 영혼의 행위들 중 일부는 판단동의의 영역에 해당하고, 다른 일부는 욕구의 영역에 해당하며, 마지막으로, 다른 것들은 행동에 대한 경향성의 영역에 해당된다.

에픽테토스에게서 세 가지 형태의 철학적 훈련을 정의하며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 영역, 영혼의 행위들, 또는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의 [세] 측면들이다. 《에픽테토스의 담론》의 관련 구절들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 또는 철학적 훈련의 영역에 관한 이론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영역은 욕구와 혐오의 영역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잃거나 얻지 못할 수도 있는 것들을 원하기 때문에 그리고 종종 피할 수 없는 불운을 피하려 하기 때문에 불행하다. 예컨대 부나 건강 같이 바라는 것이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욕구의 규율은 결과적으로 그러한 욕구와 혐오의 점진적인 포기에 우리 자신을 익숙하게 하는 것에서 성립하며, 그래서 결국 우리는 정말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도덕적 선만을 욕구해야 할 것이고, 역시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도덕적인 악만을 피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는 모든 것을 중요치 않은(indifferent) 것으로 여겨야 한다. 즉, 우리는 그러한 것들 사이에서 어떤 차이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보편적인 자연이 의도한 것 모두를 받아들여야 한다. 욕구의 훈련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의 결과로 우리가 느끼는 정념이나 감정과 관련이 있다.

훈련의 둘째 영역은 경향성이나 행동을 동기화시키는 훈련의 영역이다. 에픽테토스의 경우, 이러한 영역은 무엇보다도 폴리스 내의 인간 관계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스토아 학파들이 전통적으로 “의무”(ta kathekonta), 즉 우리 본성의 경향성에 적합한 행동들이라고 불렀던 것에 상응한다. 의무는 행동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에게 의존하는 일의 범주에 속하며, 예컨대 다른 사람, 정치, 건강, 예술 등과 같이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는 대상을 견디는 것을 포함한다.앞서 보았듯이, 그러한 대상들은 중요치 않은 일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합리적 정당화라는 힘은 그것들이 합리적 인간 본성을 강요하여 그것[들]의 보존을 위해 행동하도록 만드는, 깊숙하게 내재된 본능에 상응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의무는 우리의 이성적인 본성에 “적합한” 행동이며, 우리 자신이 도시/국가 또는 가족 형태의 인간 공동체에 봉사하는 것에서 성립한다.

훈련의 셋째 영역은 동의(sunkatathesis)이다. 에픽테토스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각 표상(phantasia)을 비판하고, 오직 객관적인 것에만 동의할 것을 촉구한다. 다시 말해 모든 주관적인 가치 판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이 훈련의 지도 원리를 다음과 같이 공식화했다: “사람들은 사물에 의해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그들의 판단에 의해 괴로워한다.”

에픽테토스(Epictetus)의 경우, 훈련의 이러한 주제 영역들(topoi)은 철학적 담론의 세 부분과 달리 삶과 경험으로서의 철학의 세 가지 측면에 해당한다. 이것은 철학에 관한 이론적 담론들을 읽는 데 만족하는 사이비 철학자(pseudo-philosopher)를 비판하는 《에픽테토스의 담론》의 한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둘째와 셋째 영역이 각각 윤리학과 변증론에 해당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논리학과 우리의 영역(topoi)의 세 번째와의 연관성은 특히 명백하다.

그것은 마치 동의(sunkatathesis, assent)의 훈련 영역에서, 우리가 일부는 "객관적"이고, 다른 일부는 그렇지 않은 표상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그것들을 구별하기를 원하는 대신 오히려 이해에 관하여와 같은 제목의 논문들을 읽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우리가 행동해야 할 때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수용했던 표상을 자연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독서나 글쓰기를 해본 적이 없고, 그 대신 그저 우리가 들은 것을 배우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때, 즉 우리가 삼단논법을 분석할 수 있고 가설적인 논증들을 검토할 수 있을 때 만족해 왔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에픽테토스는 한편 이해에 관하여와 같은 제목의 논문들에서 제시되었던 이론적 논리와,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삶으로서의 논리”(lived logic), 또는―동의의 규율과 실제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표상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진―삶에 적용되는 논리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였다. 이 구절의 나머지 부분에서, 우리는 둘째 영역[윤리학]과 관련하여, 이론적인 담론과 실천적인 “삶으로서의” 훈련 사이의 동일한 대립을 발견한다.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경향성에 관하여의무에 관하여와 같은 이론적 논문을 읽는 데 대한 유일하게 정당한 이유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이성적 본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철학의 삼분법은 논리학과 윤리학의 영역에 이어 자연학의 분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자연학이 [어떻게] 욕구의 규율(discipline)과 상응하도록 만들어질 수 있을까? 우리가 방금 인용한 구절은 그런 일치를 금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욕구에 대한 규율의 맥락에서 에픽테토스가 욕구와 혐오에 관하여라는 논문들을 말할 때, 우리는 이것들이 윤리학에 관한 논문이라고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비록 “욕구”에 관한 추상적 이론은 그 욕구가 영혼의 행위인 한 윤리학과 심리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욕망의 훈련에 상응하는 삶으로서의 태도는, 실제로 어떤 사람이 영성 훈련의 방식으로 살고 경험하는 일종의 응용된 자연학처럼 보인다. 에픽테토스는 여러 차례, 욕구에 대한 규율은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방식에 따라 일어나기를 원하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가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조화를 유지하도록 해야 하며, 사물들에 대한 신의 통제에 잘 만족해야 한다. “만약 훌륭한 사람이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면, 그는 질병, 죽음, 그리고 불구가 되는 일에조차 협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이 만물의 보편적인 질서에 의해 결정된 것이고, 전체는 그 부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영성 훈련으로서 살아가며 경험하고 있는 자연학의 진정한 사례를 발견한다. 욕구를 단련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우주의 일부라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할 필요가 있으며, 개별 사건들을 보편적 자연의 관점 안으로 옮겨 놓아야 한다.

에픽테토스에게는 이것이 철학의 실천과 훈련이며, 우리는 이 근본 도식이 《에픽테토스의 담론》 전반에 걸쳐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에픽테토스의 제자 아리아노스는 《에픽테토스의 담론》과 Enchiridion의 편집을 담당했는데, 그가 이 후자를 구성하는 격언들을 우리가 방금 구별한 세 가지 규율이나 영역에 따라 분류하기로 선택했을 때, 그는 잘못을 범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