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4(P. Hadot, Philosophy as a Way of Life)

Kant 2022. 6. 2. 17:41

3. Marcus Aurelius and Epictetus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의 본질은 에픽테토스에서 나온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쿠스가 글을 쓰는 방법을 통해 명상록이라는 문학 장르 개념을 처음 얻게 된 것은 에픽테토스로부터였을 것이다. “이것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명상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들은 매일 명상하고, 글로 쓰고 그들 자신을 훈련시키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들이 밤낮으로 당신에게 가까이있게 하라. 그것들을 쓰고 다시 읽어라; 네 자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라.”

‘자신과 하는 대화’라는 생각은 오랫동안 있어온 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자신을 훈계하는 오디세우스를 묘사하는 호머의 글을 떠올릴 수 있다: “힘내라, 나의 심장아.”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이 읽은 격언을 개인적인 용도로 쓰는 관습은 의심할 여지없이 무척이나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르쿠스가 독자들에게 명상을 권고하는, 이 특정 형태의 자기 훈계와 행동 원칙에 관한 아이디어를 에픽테토스에게서 얻었다고 믿을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마르쿠스의 명상과 훈련의 목적은 다름 아닌 에픽테토스의 세 가지 근본 주제, 즉 욕구의 규율, 경향성의 규율, 판단의 규율이었다. 이 개념적 구조는 에픽테토스에게 독특한 것으로, 고대 철학 문헌에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에픽테토스를 인용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마르쿠스는 우리가 검토했던 세 가지 주제를 명확하게 제시하는 단편(fragment)을 인용한다.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은 동의(assent)에 관한 방법이다. 우리는 경향성[hormai]이라는 주제의 영역에서 우리의 주의력이 방심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그리하여 경향성이 공동체에 이바지하고, 그 경향성의 대상들이 지니는 가치에 상응하는 방식을 참작하여 발휘될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욕구를 완전히 자제해야 하며 그것들 중 어느 것에도 혐오감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마르쿠스는 반복적으로 인생에 관한 3 중의 법칙을 공식화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음 구절에서 쉽게 인식할 수 있다.

네게 충분한 것은 무엇인가?
- 객관적인 한에서 현재 네가 내리는 가치 판단
- 인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한에서 현재 네가 하는 행동
- 네 외부의 원인에 의해 초래된 모든 사건을 즐기는 한에서 현재 네 내면의 성향

이성적인 [자연] 본성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그 본성대로 진행된다.

- 만일 그것[이성적 본성]의 표상을 가지고 거짓이거나 불명확한 것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면
- 그것이 인간 공동체에 봉사하는 행동들에 대한 경향성만을 안내하는 경우
- 만일 그것이 보편적 본성에 의해 할당된 모든 것을 즐겁게 맞이하면서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에 대한 욕구나 혐오를 가지고 있는 경우.

네[가 상상해 낸] 표상(phatasian)을 지워라.
네 경향성(hormai)을 확인하라.
욕구(oreksin)를 없애라.
지시 원칙(hegemonikon)을 통제 하에 두어라.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단지 이것만 기억하라.
- 올바른 의도
-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행동
- 결코 속이기 위해서 사용될 수 없는 말
- 모든 일어나는 일들을 필연적이고 친숙한 어떤 것처럼 즐겁게 맞이하는 내면의 성향(diathesis). 왜냐하면 그 일들은 너무나 원대한 원칙과 위대한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니까.

독자들은 아마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에픽테토스로부터 그의 삼중 구조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상당히 분명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마르쿠스가 그것을 제시하는 방식에는 어조와 강조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예컨대 마르쿠스가 욕구의 규율을 말할 때, 그는 에픽테토스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욕구가 좌절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만을 원해야 할 필요성을 고집하지 않는다. 마르쿠스는 오히려 에픽테토스보다 훨씬 더 분명한 방식으로 이 훈련이 우리의 욕구를 운명의 의지 그리고 보편적 이성의 의지와 조화시키는 데서 성립하는 것으로 여긴다. 훈련의 목표는 우리 내부에, 중요치 않은 것, 즉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가져오는 것이다. 마르쿠스에게서는 에픽테토스보다 훨씬 더, 욕구의 규율이 응용된 “자연학”, 즉 자연학이 영성 훈련으로 변형된 형태를 취한다.

욕구의 규율은 자연에 의해서 의도된 사건들에서 즐겁고 사랑스런 만족감을 느낄 때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이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우리는 보편적 [자연] 본성의 관점에서 그것들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각각의 사건을 만들어내는 원인들의 연결고리를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각각의 사건을 운명에 의해 짜여진 것으로 그리고 최초의 원인에서 자연적 필연성에 의해 흘러나오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욕구의 규율은 우리가 인간의 삶 전체를 우주적 관점 안에 재배치하고, 우리 자신이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강제한다. “세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역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어떤 목적으로 존재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그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이러한 질문들에 답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목적으로 존재하는지를 말하지 못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이런 종류의 “자연학”을 실천하기 위해서 마르쿠스는 엄격한 정의의 방법을 따르고자 하는데, 그것은 모든 대상들을 전 우주 안에, 그리고 모든 사건들을 원인과 결과의 연결 안에 재배치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것[대상, 사건]들은 그 자체로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정의되어야 하며, 인류가 습관적으로 만들어 내는 전통적인, 의인화된 표상들과 분리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철학의 세 분과들이 철학의 세 부분들처럼 단일한 철학 행위 안에서 서로를 함축하고 있는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마르쿠스가 논의한 “자연학적” 정의의 방법은 동의의 규율에 상응하는바, 이는 우리가 우리의 동의를 객관적이며, 모든 주관적 가치 판단으로부터 벗어난 표상들에게만 주어야 한다고 지시한다.

우리가 오랜 경험을 통해 자연의 방식과 법칙을 알 수 있게 되고 영성 훈련으로 “자연학”을 실천하면, 우리는 자연과 “친숙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친숙함 덕분에 우리에게 생경하거나 거부감을 주는 모든 현상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지각할 수 있고, 또 이 현상들과 그것들의 원천인 보편적 이성 사이의 연결고리도 지각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사건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으로 또 우리의 애정 어린 동의를 받을 만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indifferent things)에 대해 무관심하다는(indifferent) 것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바꿔말하면, 자연이 하는 것처럼 그들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지구는 비를 사랑하고, 또 존중할 만한 에테르를 사랑한다. 우주 역시 반드시 산출되어야 할 모든 것을 산출하는 것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주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와 함께 사랑한다! 이것이 결국, ‘이러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기를 ‘사랑한다’라는 문장이 의미하는 것 아니겠는가?” 고대 그리스어로, 어떤 것이 “통상적으로 발생한다”거나 “발생하곤 한다”라고 말하고 싶을 때, 일반적인 관용구로서 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사랑한다”(philei ginesthai)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마르쿠스는 사건들이 문자 그대로 일어나는 것을 “사랑한다”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고자 한다. 우리는 그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를 “사랑해”야 하는바, 보편적 [자연] 본성이 그것들을 산출하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을 향해 즐겁게 동의하는 태도는 신의 의지에 복종하는 태도에 상응한다. 이것이 마르쿠스가 때때로 욕망에 대한 규율을, 세 규율에 대한 다음의 진술에서처럼, 신들(the gods)이나 신(God)을 따르는 것에로의 초대라고 설명하는 이유다. “너의 안에 있는 다이몬을 평온한 상태에 두어라. 그러면 그것은 진리에 반하는 말을 하지 않고 정의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합당한 방식으로 신을 따를 수 있으리라.” 둘째 주제를 표현하면서 에픽테투스는 우리의 경향성과 행동이 우리의 동료 인간에 대한 의무와 관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더 강조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르쿠스는 인간 공동체를 위해 행해진 정의로운 행동에 대해 더 자주 언급한다. 첫 주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둘째 주제도 마르쿠스에게서 강력한 감정적 색조(tonality)를 띤다. 그는 이성적인 존재는 똑같은 전체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똑같은 몸의 팔다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심지어 우리에게 불의를 저지른 사람들에게까지 사랑을 확대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종족에 속하며, 만약 그들이 죄를 지었다면, 그들은 아무런 의식없이 또 무지함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 주제인 동의의 규율을 진술하는 부분에서 마르쿠스는 에픽테투스에게서 가장 덜 벗어난다. 그러나 마르쿠스가 자기 자신에 부과한 규율은 내적인 로고스우리가 우리의 표상들(phantasiai)에게 제시한 동의뿐만 아니라, 외적인 로고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과도 연관된다. 이때 근본적인 덕목은 생각과 말의 올바름으로 이해되는 진실함이다. 거짓말은 심지어 그것이 비자발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판단력의 왜곡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삶의 세 원칙을 표현할 때면 마르쿠스는 또한 우리가 현재의 순간에―현재표상, 현재행동, 그리고 (욕구에 관한 것이든 혐오에 관한 것이든) 현재의 내적인 성향(disposition)―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를 좋아한다. 에픽테토스에게서는 이런 종류의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지만, 여기서 마르쿠스의 태도는 현재의 순간을 향한 스토아 철학의 근본적인 집중(prosoche)의 태도와 완전히 일치한다. 어떤 것도 의식의 깨어 있음 상태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운명이나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관계―이것은 욕구의 규율이다―, 동료 인간과의 관계 (활동적인 의지의 규율), 또 우리 자신과의 관계 (동의의 규율)도 모두 의식의 깨어 있는 상태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다른 곳에서, 마르쿠스는 세 가지 철학적 훈련들을 그것들에 상응하는 덕목들과 연결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도식을 얻게 된다.

규율 상응하는 덕목


욕구에 대한 [자연학] 절제(sophrosyne); 걱정의 부재(ataraxia)
경향성에 대한 [윤리학] 정의(dikaiosyne)
동의에 대한 [논리학] 진실함(aletheia); 조급함의 부재(aproptosia)

마르쿠스는 세 가지 규율에 상응하는 세 가지 덕목들을 “조급함의 부재,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 신들에 대한 복종”으로 열거 한다.

이 어휘들은 《에픽테토스의 담론》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마르쿠스와 에픽테토스가 철학의 세 가지 기본적 훈련들을 제시하는 방식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선 마르쿠스는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보다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마르쿠스는 그의 명상록의 첫 권에서, 자신이 에픽테토스의 글을 알게 된 것은 그의 조언자가 되기 이전에 마르쿠스에게 스토아 학설의 기초를 가르쳤던 정치가 퀸투스 이우니우스 루스티쿠스(Quintus Iunius Rusticus) 덕분이라고 말한다. 마르쿠스는 루스티쿠스가 에픽테토스의 하이폼네마타, 즉 그의 수업 시간에 필기한 노트를 그에게 빌려주었다고 말한다. 이 같은 언급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1. 문제의 그 책은 아리아노스의 작품을 복사한 것일 수 있다. 아리아노스는 《에픽테토스의 담론》 첫부분에 그가 배치한 서문에서 자신의 저서를 하이폼네마타의 모음집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가능한 한 바로 그 자신의 어휘들을 사용해 적으려고 애썼다. 나는 훗날 내가 그의 생각과 솔직함을 “기억하는 데 도움을 줄 노트”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예상할 수 있듯, 그 노트들은 종종 두 사람 사이의 즉흥적이고 자연스런 대화처럼 보인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그것을 읽으리라고 기대했었다면 그렇게 쓰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리아노스는 서기 107년에서 109년 사이 어느 시점에 에픽텍투스 수업에 참석했을 것이다. 루키우스 겔리우스(Lucius Gellius)에게 보낸 그의 편지 형식의 서문은 아마도 에픽테투스가 죽은 후 서기 125년에서 130년 사이에 쓰여졌을 것이고, 《에픽테토스의 담론》 자체는 서기 130경에 출판되었을 것이다. 아울루스 겔리우스(Aulus Gellius)는 자신이 아테네에서 공부하던 해인 서기 140년경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한 토론회에 참여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유명한 백만장자 헤롯 아티쿠스(Herod Atticus)가 도서관에서 [아울루스] 겔리우스 자신이 아리아노스가 정리한(digestae) 에픽테투스의 논문이라고 말한 것의 복사본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카시오페이아(Cassiopeia)에서 브린디시움(Brindisium)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동일 작품의 복사본을 가방에 가지고 있던 한 철학자를 만나게 된 경위를 말해준다. 이것은 적어도 마르쿠스가 루스티쿠스가 그에게 빌려준 이 책의 사본을 읽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2. 우리는 파쿠하슨(Arthur Spenser Loat Farquharson, 1871–1942)이 이미 제안한 다른 주장도 고려해볼 수 있다. 그의 가설에 의하면 루스티쿠스가 마르쿠스에게 빌려준 것은 루스티쿠스가 에픽테토스의 강의 중에 직접 적었던 자신의 노트였을 수 있다. 시기상으로 볼 때 만약 에픽테토스가 서기 125년에서 130년 사이에 죽었다고 인정하고 또 루스티쿠스가 2세기 초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의 공식 경력으로 볼 때 그가 에픽테토스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서기 140년까지 그리스에서는 그 작품이 널리 퍼져 있었으나 서기 145-6년경 로마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에픽테토스의 담론》사본이 없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게다가 마르쿠스는 루스티쿠스의 선물이 특별한 것이었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선물이 결국 루스티쿠스가 직접 작성한 노트가 아니었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명상록은 아리아노스에게서 문자 그대로 따온 인용문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마르쿠스가 그의 작품을 읽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확실하다.

마르쿠스가 아리아노스가 정리한 것과 같은 《에픽테토스의 담론》을 읽었든, 아니면 루스티쿠스의 노트까지 읽었든, 한 가지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르쿠스는 오늘날 우리보다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 관한 더 많은 문헌에 친숙했을 것이고, 반면 우리는 아리아노스 작품의 일부만을 소유하고 있다. 루스티쿠스의 노트가 사실상 존재했다면, 그것은 아리아노스가 기록하지 않은 에픽테토스 가르침의 어떤 측면을 마르쿠스에게 제공했을 것이다.

우리가 “너는 죽은 몸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작은 영혼이다” 같이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을 에픽테토스의 단편들을 알게 된 것은 마르쿠스 덕분이다. 이 단편은 또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른바] “염세주의적” 특징들이, 자주 주장되었던 것처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서만 발견되는 특징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마르쿠스와 현존하는 에픽테토스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세 가지 훈련에 관한 표현상의 차이점들은, 마르쿠스는 알고 있었으나 그 후에 상실된 에픽테토스의 구절들의 영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끝으로 우리는 《에픽테토스의 담론》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사이에 심오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리아노스의 작품은 비록 저자가 서문에서 기꺼이 인정하는 것보다 더 광범위하게 다시 정리된 것들이라할지라도, 말 그대로 청중 앞에서 행해진 일련의 담론들이다. 그것들의 주제는 특정한 상황, 즉 스승을 향한 질문이나 학교 밖에서 온 방문객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논증은 청중의 능력에 맞게 적응되었으며, 그 목표는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르쿠스는 혼자였다. 나는 많은 학자들이 명상록에서 발견했다고 생각했던, 고독에 버림받은 한 남자의 망설임, 모순, 고군분투 같은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독자는 명상록의 시작부터 끝까지 마주치게 되는 철학적 어휘의 확고함과 기술적 특성에 놀라게 된다. 모든 것은 마르쿠스가 루스티쿠스와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동화시켰거나, 아니면 그가 자신의 영성 훈련을 위해 늘 에픽테토스의 글을 곁에 두고 있었다는 결론을 가리킨다. 또한 우리는 명상록의 대부분의 내용들이 보여주는 뛰어난 문학적 자질에 놀란다. 마르쿠스의 전 수사학 교사였던 프론토(Marcus Cornelius Fronto)는 그에게 문장을 정교하게 다듬는 법을 가르쳤다. 마르쿠스는 항상 자신의 생각에 치료적이고 심리적인 효과를 주는 데 필요한 명확성, 엄격함, 그리고 매력적인 공식들을 만들어 내고자 노력했다. 결국 자신이 합리적인 원칙들에 의해 설득당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그 원칙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공식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명상록은 어떤 경우에는 소수의 근본적인 주제를 최고의 솜씨로 수행하며 변형시킨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것들은 거의 전적으로 에픽테토스가 처음 언급한 세 가지 주제에 대한 변형들이다.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은 어떤 글들은, 매 순간 실천해야 하는 세 가지 철학적 훈련을 진술하면서 세 가지 도식에 약간의 변형을 가한 채 그 전체를 제시한다. 다른 곳에서는 오직 두 개의 주제, 또는 심지어 하나의 주제만 제시하기도 한다. 변형을 가할 경우, 어떤 때는 세 가지 주제 중 하나 또는 다른 주제를 발전시키며, 또 때로는 이러한 주요 주제와 관련된 모티브를 제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욕구의 규율이라는 제목 하에 우리에게 일어날 모든 것은 운명이 직조한 것이라는 주제를 발견하거나, 사물에 대한 “자연적” 정의에 관한 논의, 자연현상에 수반되는 부수적인 현상이 지니는 자연적 특성, 또는 죽음 등과 같은 주제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둘째 규율, 즉 경향성의 규율이라는 제목 아래에서는, 타인에 대한 사랑 또는 이성적인 행동에 관련된 주제를 발견한다.

그리하여 마르쿠스는 에픽테토스가 제안했던 세 가지 규율[분과 영역]에 관한 교리가 암시하는 모든 것을 고독한 명상을 통해 조직하고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마르쿠스는 아리아노스가 《에픽테토스의 담론》에서 이미 스케치했던 간략한 노트를 거의 확장시키지 않는 모습도 자주 보이는데, 예를 들자면, 보편적인 이성이 의도한 사건들에 대한 즐거운 만족이나 신들에 대한 복종 등에 관한 주제를 다룰 때 그러했다.

결론을 내려보자. 마르쿠스는 자신이 행한 명상들 가운데 하나를 기록할 때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욕구, 행동, 또는 동의 중 하나를 실천하라고 스스로에게 훈계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자연학, 윤리학, 논리학이라는 철학의 각 분과 영역에서 철학 그 자체를 실천하라고 자신에게 훈계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제 우리는 여러 세대의 독자들을 매혹시킨 힘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게 부여해 준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영성 훈련을 실천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느낌에 의해 생포는 것이다. 세계 문학사에는 수많은 설교자, 이론가, 영적 지도자, 그리고 감독관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을 훈련시키는 과정 한가운데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드물다. “네가 아침에 일어나는 데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이 생각을 마음에 품어라. ‘나는 인간의 일을 하기 위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마르쿠스가 에픽테토스가 미리 정교하게 스케치한 지시를 따르는 훈련을 실천할 때 주저하거나 비틀대거나 자신의 길을 더듬는 일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모두가 하고자 애쓰는 것을 실천하고 있는 과정 속에 있는 사람을 알게 되었을 때 꽤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완벽한 의식의 상태에서 살기 위해 분발하고, 삶의 매 순간에게 그 완전한 가치를 부여하고자 노력하는 것. 분명 마르쿠스는 혼자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가 우리 각자에게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