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스피노자의 자살 개념

Kant 2024. 4. 28. 17:06

Ethica [= E] 3부 정리 4에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어떤 것도 외부 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파괴될 수 없다. ... 따라서 우리가 외부 원인 말고 사물 자체만을 고려할 경우, 그 사물 안에서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나는 이 주장을 ‘외부 원인에 관한 주장’이라고 부르겠다.

이 주장은 E 4부 정리 20의 주석에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자신의 [자연]본성과 대립하는 외부 원인들에 의해 압도당하지 않을 경우,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되는 사람은 없다. 즉,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일 말이다. 음식을 먹지 않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살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외부 원인에 압도당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을 파괴하는 외부 원인은 그 사물 고유의 본질에 외부적인 것이다.

스피노자는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자기 파괴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자살을 저지르는 행위자는 자신의 본성에 반하는 외부 환경에 압도된 것이다. 따라서, 자살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자살을 저지르는 행위자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행위자의 본성에 반하는 외부 원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E 3부 정리 5에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물들은 그 본성상 서로 대립하는데, 이는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을 파괴할 수 있는 한, 동일한 주체 안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이 명제를 ‘동일 주체 안의 원인 불가능성에 관한 주장’이라고 부르겠다. ... 스피노자가 이 명제에서 말하려는 것은 다음 둘 중 하나다:

 

1) 두 사물이 각각 가지고 있는 본성들의 전체는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다시 말해, 첫째 사물의 전체 본성과 둘째 사물의 전체 본성이 동시에 같은 사물 안에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두 사물들은 동일한 전체의 부분들로서 공존할 수 없다.

 

“두 사물들이 동일한 전체의 부분들로서 공존할 수 없다”는, 즉 동일한 본성의 한 부분으로서 공존할 수 없다는 주장은 E 4부 정리 21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축복받고, 옳게 행동하며, 잘 살기를 욕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동시에 실제로 [그렇게] 존재하고, 행동하고, 살기를 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외부 원인에 관한 주장’과 ‘동일 주체 안의 원인 불가능성에 관한 주장’은 자기 파괴의 불가능성에 대한 주장의 전제가 된다:

 

E 3부 정리 4: “어떤 것도 외부 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파괴될 수 없다.”

E 3부 정리 5: “서로를 파괴할 수 있는 사물들은 동일한 주체 안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다음 결론이 제시된다:

 

E 3부 정리 6: “각 사물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한, 그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고자 노력한다.(in suo esse perseverare conatur)”

 

이 명제에 대한 증명에서 스피노자는 E 3부 정리 4와 정리 5의 주장을 요약한다: “어떠한 사물도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나 자기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질 수 없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모든 것과 대립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자기 파괴 불가능성에 대한 주장, 즉 E 3부 정리 4와 정리 5에 의거하는 주장과, E 3부 정리 6이 주장하는 자기 보존적 성격 사이에는 갭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것도 외부 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파괴될 수 없다”는 전제로부터 각 사물이 가능한 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는 결론이 반드시 도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갭은, 어째서 스피노자가 사물의 본질이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포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E 4부 정리 18의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덕이 자신의 본성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 이외의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는 누구나 자신의 본성의 법칙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E 4부 정리 20의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외부 원인들과 자신의 본성에 대립하는 것에 압도당하지 않고서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 즉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사물의 본성과 그 사물의 본질을 동등시한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물의 본질에는 그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유가 뚜렷해진다:

 

“어째서 어떤 사물은 외부의 간섭 없이는 파괴되지 않을까, 즉 자신의 본질을 잃게 되지 않을까? x의 본질은 필연적으로 x의 본성의 일부다. 만약 x가 외부 조력 없이도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본성은 그 본질로서 x의 부정을 함축하는 어떤 것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외부 조력 없이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사물은, 어떤 본질을 함축하거나 포함하면서 또 동시에 그 본질과 모순되는 본성을 가지는 셈이 될 것이다. 이러한 본성은 자기모순적이며, 따라서 어떠한 것도 이 같은 본성을 지닐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외부의 도움 없이는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 없다.”(Bennett, A Study of Spinoza’s Ethics, p.239)

 

또한 스피노자는 사물의 본질을 그것의 코나투스(conatus)와 동등시했다:

 

어떤 사물이 자기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conatus)은 그 사물의 실제 본질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행동의 비-자기 파괴적인 성격에서 행동의 자기 보존적 성격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고 보는 이유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인간 본성 개념은 자기 긍정적(self-affirming)이다.

 

E 4부 정리 20의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개인이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얻기 위한, 즉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에서 성공하면 할수록, 그는 더 많이 유덕해지며, 또 이와는 반대로, 유익한 일, 즉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를 등한시하는 사람은 그만큼 힘에서 멀어진다.”

 

스피노자는 [이미 위에서 지적했듯이] 유익한 것을 보존하기를 등한시하는 사례로 음식 섭취를 거부하거나 자살을 저지르는 예를 든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인간 본질 개념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한다는 의미에서 자기 긍정적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기 보존(conatus)은 객관적인 목적이며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E 3부 정리 7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어떤 사물이 자기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기울이는 노력(conatus)은 그 사물의 실제 본질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E 4부 정리 25에서도 스피노자는 똑같이 주장한다: “아무도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자기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자 노력하지는 않는다.”

 

E 4부 정리 25의 증명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각각의 사물이 자기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기울이는 노력(conatus)은, 그 사물의 실제 본질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그리고 다른 어떤 다른 사물의 본질로부터가 아니라, 사물의 이 같은 본질로부터만, 각 사물이 자기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나온다. 만약 누군가가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자기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자 노력한다면, 그 다른 것이 ... 그 사람의 덕에서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인데, 이는 터무니없는 일이다.”

 

스피노자는 [이처럼] 코나투스를 사물의 본질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코나투스가 객관적 목적이며어떤 다른 것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어떠한 덕도 자기자신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이 덕보다 앞선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Sanja Ivic(2007), “Spinoza and Kant on Suicide”, in Res Cogitans 1 (4), 132-144 중에서

 

[자살 기도의 원인은 그 당사자의 의식 속에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힘들어 하는] 외부적 요인에서 찾아야 한다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현대의 정신병리학에 의해 꿋꿋하게 무시되고 있는 주장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일단 약물에 호소하는 현대 정신의학의 치료적 개입이야말로 그 당사자의 외부 현실에 대한 배려를 소홀히 한 채 그저 두뇌 안의 화학적 불균형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말이다. 한편 이 같은 현상과 얼핏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태도가, 바로 마음의 모든 문제를 그 마음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주체를 배제한 채 그것에서 독립된, 객관적 병리학적 사태로 취급하는 태도다. 철학적으로 보면, 심리적 괴로움을 겪고 있는 마음은 그 체험의 주체와 분리될 수 없다. 과대망상이나 광신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자신이 이제껏 살아온 삶의 방식이, 세상을 바라보아온 시선이나 가치관이, 또는 행동 패턴이, 과거 십수 년 동안 아무런, 딱히 고통스런 경험을 수반하지 않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자신이 인생의 모든 문제에서 자유로울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내 마음이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런 문제 없이 완벽하기만 한, 삶에 대한 나의 생각이나 태도와는 무관한 방식으로 어느날 느닷없이 내게 들이닥친 문제 상황은 아닐 것이다.

 

네가 삶 가운데 발견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그 문제적인 것이 사라지도록 네가 살아가는 것이다. 삶이 문제로 가득찬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은, 네가 살아가는 모습이 삶의 틀(life’s mould)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너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어야만 하며, 일단 네 삶이 그 틀에 맞게 된다면, 문제적인 상황[처럼 보이던 것]은 사라게 될 것이다.”(L. Wittgenstein, Culture and Value)

 

내가 보기엔, 스피노자의 “conatus” 개념이나 그가 강조한 “영원성의 관점으로”(sub specie aeternitatis)라는 표현 역시 위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철학적 사고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과 그 삶의 상황에 대해 의식적으로 반성하며, 자기자신을 ‘고통을 겪는 자이자 동시에 고통을 주기도 하는 자’(homo patiens)로서 바라볼 수 있는 주체의 능력 배양에, 정서나 정신의 문제에서 자유로와질 수 있는 열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래서 우리가 꼭 질식할 것만 같은 상황에 놓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외부 요인들을 다른 방식으로, 즉 더 커다란 우주적 관점으로 수용할 수 있는 철학적 마인드와 맷집(conatus!)을 키우라는 것이 철학자들의 핵심 메시지라 여겨진다. 혹자는 이 같은 철학적 조언을 한갓 ‘정신승리’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콘트롤할 수 없는 외부 사건으로 나 자신을 지속해서 괴롭히는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