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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성비판>>에서의 변증론(이율배반)

Kant 2019. 9. 11. 09:09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원리론선험적 논리학선험적 변증론순수 이성의 변증적 추리순수[이론]이성의 이율배반셋째 이율배반”(B 472f.)의 문제가 󰡔실천이성비판󰡕에서 도덕적 행위[유덕한 행위, ‘’]행복의 결합 가능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율배반>

thesis: 자연법칙의 인과성이 현상계를 설명해주는 유일한 인과성은 아니다. 자유의 인과성도 필요하다.

antithesis: 자유는 없고 세계 내의 모든 것은 오로지 자연법칙에 따라서만 일어난다.

3 이율배반은 이 세계 대상들의 인식의 문제뿐 아니라 실천의 문제(자유로운 행위 가능성의 문제)와 관련되는 형이상학의 문제.

- 칸트의 해결: thesis는 현상계와 예지계를 구분하면 문제될 것 없고, antithesis 역시 그 구분에서 현상계에만 제한하면 된다.

- 그러나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자유개념을 problematisch하게, 즉 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지는 않다는 의미로만 제시한 것. 그 객관적 실재성, 즉 그것이 실제로 원인으로서 효력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제시해 준 것은 아님.

- 이 이율배반으로 인해 사변 이성의 본질이 공격 당한다이성의 정당한 주장이 서로 모순된다는 것은 이성에 관한 신뢰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실천이성의 변증론

󰡔도덕형이상학의 정초󰡕 “Vorrede”에서 칸트는 이미 실천 이성의 자연적 변증론에 관해 언급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여기서(󰡔실천이성비판󰡕)와 다름. 그것은 의무의 엄격한 법칙에 대항하여 궤변을 늘어놓고 그 법칙의 타당성 내지는 최소한 그 순수성과 엄격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성향’(Hang), 즉 그렇게 해서 가능한 한 그 법칙을 우리의 소망과 경향에 적합하게 만들려는 성향이라 했었고 결국 법칙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그것의 존엄성 전부를 붕괴시키는것이라고 했었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순수 이론(사변) 이성뿐 아니라 순수 실천 이성도 변증론에 빠진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다. 󰡔도덕형이상학의 정초󰡕 “Vorrede”에서와는 달리 순수 실천 이성도 이성이므로 무제약자를 추구한다고 함. 실천적으로 제약된 것”(das Praktisch-Bedingte, 경향 내지 자연 욕구에 기인하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 인간 욕구능력의 대상)의 무제약적인 총체를 추구한다. 순수 이론 이성이 현상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인 범주를 물자체로 그저 사유만할 수 있을 뿐인 무제약자(현상계 전체)에게까지 적용하려 할 때 선험적 가상(전통 형이상학에서의 신, 우주, 영혼 등의 개념)이 생겨나고, 특히 이율배반에 빠지게 되듯이, 순수 실천 이성도 인간 욕구 능력을 제약하는 궁극적인 제약 내지는 대상을 추구함으로써 곤란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실천 이성은 이것을 최고선”(das höchste Gut)이라는 이념에서 찾는다. 이때 최고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그것 위에 더 이상의 아무런 조건도 가지지 않는 가장 높은 조건, 즉 우리에게 욕구할만한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것의 최상의 조건을 의미함. 이 의미의 최고선을 최상선”(das oberste Gut)인데 이것이 곧 ”(Tugend)이라고 함. 그런데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의 욕구능력의 대상(혹은 그것의 궁극적인 제약으로 작용하는 것)은 최상선인 덕 말고도 행복또한 포함한다고 보아야 한다. 행복이 덕과 결합되어야 비로소 전체적이고 완전한 선”(das ganze und vollendete Gut)으로서의 최고선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임.

 

고로 󰡔실천이성비판󰡕에서 변증론의 문제는, 완전선으로서의 최고선이 어떻게 가능한가(주어질 수 있는가) 하는 데서 비롯함. 일단 덕을 추구하는 행위와 행복을 (이성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행위라고 보는 입장이 있어 왔는데, “에피쿠로스스토아학파가 여기 해당한다. 그러나 칸트는 이에 반대함. 덕의 준칙과 행복의 준칙은 서로 대립하고 제한하며 부정하는 것이지 일치하는(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이 둘의 결합은 필연적인 결합이기는 하지만, 어느 하나를 분석함으로써(덕을 분석함으로써) 다른 하나(행복)에 도달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분석적 결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소재들의 종합적 결합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논리적인 결합이 아니고 실재적real인 결합이다. 인간 욕구 능력이 실천을 통해 실현시켜야 하는 것으로서의 결합이기에 칸트는 이 결합이 원인과 결과의 결합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별로 탐탁지 않아 보이는 설명이지만, 칸트는 도덕 행위가 문제일 때 욕구능력을 규정하는 근거를 행복의 실현이나 의 실현이냐의 둘뿐으로 간주한 듯하다)

 

여기서 순수 실천 이성의 변증론의 문제인 이율배반이 등장하게 된다. 한쪽에서는 [thesis] “행복의 추구가 덕 있는 마음씨(심정, Gesinnung)라는 동()인을 낳는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anthithesis] “덕 있는 마음씨(, 도덕을 준수함)는 필연적으로 행복을 낳는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는 것. 칸트는 둘 다 불가능한 주장이라고 한다. 전자는 행복이라는 동인이 도덕성과 무관하기 때문에 절대적 거짓이고, 후자는 부분적으로 거짓이라 주장한다[anthithesis의 우위!]. 이 세계 안에서의 모든 인과 관계의 결합은 의지의 도덕적 심정(마음씨)과 무관한 자연법칙의 지배에 따르기 때문에 일단 anthithesis도 거짓이다.

이 이율배반의 해소는 제 1비판에서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여기서는 둘째 명제[antithesis]를 수정함으로써 성사됨. , antithesis는 행복이라는 동인을 감성계(현상계) 내에서 이성적 존재자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원인성으로 볼 때 불가능한 주장이다, 즉 감성계 내의 존재 방식만을 이성적 존재자의 유일한 존재 방식으로 볼 경우 불가능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성적 존재자가 감성계에서만 존재한다고 볼 것이 아니라 예지계에도 속할 [예지적인 방식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거짓이 아닐 수 있다. 그러므로 감성계 안에서는 도덕적 심성에서 나온 행위가 그 결과로서 행복을 가져오기 어렵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지만(덕과 행복의 일치는 우연적으로만 가능), 예지계에서는 그 결합이 필연적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