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인지행동치료의 철학 2

Kant 2023. 3. 10. 16:47

인지삼제(The cognitive triad)와 스토아의 삼중 규칙(Stoic threefold rule)

 

1960년대 개발된 베크의 우울증 인지 모델의 기본 개념 중 하나는 부정적인 인지에 관한 “triad”(삼제; 세 요소)다. (Beck & Alford, 2009, pp. 225-226; Beck, Rush, Shaw & Emery, 1979, pp. 10-11). 베크는 우울증 환자가 자신, 세계 미래라는 세 차원과 관련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나타내는 근본적인 패턴을 보이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엘리스 역시 이미 1950년대 후반에 이와 비슷한 구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REBT의 명성을 증가시켜주었다 (Ellis & MacLaren, 2005, p. 32). REBT는 감정적 장애를 일으키는 비합리적인 신념의 세 가지 주요 범주를, 자신, (또는 세계), 그리고 미래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관련하여 구분했다. 엘리스는 내담자가 근본적이며 조건 없는 수용이라는 철학적 태도를 채택함으로써, 자신, 삶, 타인들에게 비합리적인 요구를 귀속시키려는 자세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REBT의 조건 없는 수용 개념을 “평온함의 기도”(ibid., p. 87)에 들어있는, 스토아학파를 떠올리게 하는 조언과 비교했다.

 

이와 유사하게 스토아 학자들도 엘리스의 자신, 삶, 타인들의 차원과 유사한 기본적인 삼중 구분을 설명한다. 그러나 범신론자였던 고대 철학자들은 환경과 인간 “생명” 또는 “세계”를, 그들이 운명이라고도 부르던 신성한 것[존재]과 동일시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삼중 모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 가지 관계 ―

 

네가 그 안에 거주하는 몸에 관한 관계. [자아]

삼라만상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원인인 신성한 것[존재]에 관한 관계. [세계/생명]

네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계. [타인들]. (Meditations, 8.27, modified)

 

이 세 요소는 스토아학파 교과목의, 더 명확하고 잘 알려진 삼중 분할, 즉 “자연학”, “윤리학”, “논리학”의 세 영역 분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Diogenes Laeritus, Lives, 7.1). 이 세 용어는 고대 철학에서 특히 스토아 치료학의 맥락에서는 오늘날과는 매우 다른 내포적 의미를 지녔었다. 세 가지 이론적 주제는 또한 에픽테토스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 스토아적 치료의 세 가지 실천적 주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하고 고결하게 될 사람이 훈련해야 하는 세 가지 학문 분야가 있다. 먼저 욕망과 혐오에 관한 것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피하고자 하는 것에 빠지지 않기 위함이다[자연학]. 둘째로 행동하고 행동하지 않으려는 충동, 그리고 일반적으로 적절한 행동에 관한 것은, 그가 질서 있게, 충분히 고려한 후에 행동하고 부주의하게 행동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윤리학]. 셋째는 기만과 성급한 판단으로부터의 자유와 관련되며 일반적으로 승인과 관련된 모든 것이다[논리학]. (Discourses, 3.2.1-2)

 

정념, 행동, 판단을 다루는 스토아학파의 세 분야는 CBT에서 자주 사용되는 감정, 행동, 사고 또는 감정, 행동, 인지 사이의 일반적인 구분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스토아 철학의 세 가지 영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1. 스토아학파 윤리학의 주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개인적 및 집단적), 즉 정의의 덕, 그리고 에픽테토스의 행동(action)에 관한 규율 등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때 에픽테토스가 언급하는 행동(action) 규율은 CBT의 행동(action) 또는 행태(behaviour)의 영역과 관련될 수 있다.
 
2. 스토아학파 자연학의 주제는 전 세계(우주)와의 관계, 즉 용기와 절제의 덕, 그리고 에픽테토스의 공포와 욕구에 관한 규율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때 에픽테토스가 언급하는 공포와 욕구에 관한 규율은 CBT에서 감정의 영역과 관련될 수 있다.
 
3. 스토아학파 논리학의 주제는 우리 자신의 내적 본성(이성)과의 관계, 즉 지혜의 덕, 그리고 에픽테토스가 언급하는 승인(또는 판단)의 규율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때 에픽테토스가 언급하는 승인(또는 판단)의 규율은 CBT에서 사고나 인지의 영역과 관련될 수 있다.

 

자연학―욕구와 혐오의 규율

 

이것은 정념에 관한 훈련이다. 스토아학자는 자신의 욕구를 자신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는 경험의 측면으로, 즉 자신의 판단과 의도로 이전시킴[제한함]으로써, 그것을 지배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피하고자 하는 것에 빠지는 일을 피할 수 있고 불안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주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판단의 오용을 피하는 데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는 이 분야의 훈련이 초보자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스토아학파의 인내심 훈련을 통해 실천에서 자신의 욕구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논리학을 가지고 사소한 말놀이에 빠지면 안 된다고 여겼다(Discourses, 3.2.3). 아마도 이것은 현대 CBT에서, 내담자가 자신의 [비합리적인] 핵심 신념에 직접 도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행동을 점진적으로 변경하고 습관, 감정 및 기타 증상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스토아학자는 종종 정념”, 또는 오히려 정서적 혼란이 우리의 통제하에 놓일 때까지 우리가 이성에 충분히 귀를 기울일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정념의 훈련은, 우리가 두려워하고 욕구하는 통상적인 대상들에 대해 무관심(apatheia)의 태도를 기를 것을 요구하므로 스토아적인 수용을 수반한다. 이것이 “자연학”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스토아학파의 자연학은 아마도 우리가 지금 우주론, 형이상학 또는 심지어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이것은 세계의 본질에 대한 스토아의 통찰 그리고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통찰을 다룬다. 이 통찰은 외부 사건과 다른 사람의 의견을 일시적인 것으로 볼 수 있게 도와주어 그의 즉각적인 통제 밖에 있는 사물에 대한 과도한 감정적 애착을 피하게 해준다. 스토아 형이상학의 기본 명상 기법은 “위로부터의 보기”이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의할 것이다. 철학자는 더 큰 그림을 생각함으로써 냉철해지며, 그의 관점이 전 세계 또는 시공간의 전체를 포괄하도록 확장한다. 이 우주론과 형이상학에 대한 사색은 스토아가 평온함의 느낌을 유도하기 위해 사용했고, 이것이 스토아의 자연학과 비합리적인 두려움과 욕망에 대한 실천적 정복 사이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그들의 범신론적 신인 “자연”, 또는 우리가 “우주의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을 관조하는 스토아의 치료법이며, 감정의 자기 조절과 스토아적 삶의 수용에 대한 감각을 기르기 위한 기본 전략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사물을 상대적으로 일시적이고 무관심해야 할 것으로 보고 평정을 되찾은 스토아의 수련자는 사회적 행동과 인지 분석에 대한 훈련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윤리학―행위(action)의 규율

 

스토아학자는, 적절한 숙고를 통해 그리고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또 부주의하지 않게 행동하도록 자신을 훈련한다. 그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상황과 관계에 적합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나는 조각상처럼 무감각하지 않아야 하고, 신을 공경하는 사람으로서, 아들로서, 형제로서, 아버지로서, 시민으로서 본성적인 관계 또는 후천적인[획득된] 관계를 보존해야 한다’(Discourses, 2.2.4). “윤리”에 대한 스토아학파의 연구는 주로 개인이 집단이나 타인과 맺는 관계, 궁극적으로는 개인이 인류 전체와 맺는 관계를 다룬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 철학에서 윤리학의 연구는 성서의 도덕 규칙과 유사한 어떤 것에 관한 연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 어떤 행동이 진정한 행복과 성취에 기여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질문을 의미했으며, 이는 본질적으로 심리치료적인 문제다. 이 훈련은 사회 그리고 타인과 관련하여 적절한것이 무엇인지 합리적으로 고려하여 의도와 행동을 스스로 관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Long, 2002, pp. 113-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 규율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사교적 본능을 함양하는 것, 즉 스토아학자가 말하듯, “자연스러운 애정”(philostorgia)을 다른 사람에게 확장하는 것을 수반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형제자매처럼 대해야 하며, 지혜와 정의, 공정, 친절이라는 사회적 덕목에 따라 대해야 한다. 즉, 가능한 한 그들을 돕고자 해야 한다. 실천적인 기술로서 합리적이고 “적절한” 사회적 행동에 관한 스토아의 연구는, 아마도 CBT에서 사회적 기술 훈련, 의사소통 기술 및 주장 훈련과 같은 주제가 하는 역할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논리학―승인의 규율

 

스토아학자는 성급한 판단을 피하고 논리의 법칙에 따라 모든 인상을 점검하도록 자신을 훈련한다. 에픽테토스는 이 분야를 마지막 훈련 단계로 여겼다. 오직 자기 절제와 윤리학에서 이미 진보를 이룬 사람들만 이성의 능력을 개발하여 그들의 성취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논리학적인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꿈을 꾸거나 술에 취한 상태 또는 우울한 상태에 있을 때서조차도, 검증되지 않은 어떤 인상이 우리를 방심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Discourses, 2.2.5). 스토아가 장기적으로 정서적이고 행동적인 변화를 안정화하는 수단으로서 철학적 수준에서 인지적 변화를 강조한 것은, 현대 CBT에서 근본적인 신념에 인지적인 수정을 가함으로써 부정적인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유사하다. 에픽테토스는 스토아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 세 분야의 훈련을 위에서 언급한 순서대로 밟아나가는 것처럼 언급한다. 다시 말해, 적절한 사회적 행동을 훈련하기 전에 먼저 두려움과 욕구를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며, 맨 마지막에 판단이나 인지에 관한 훈련을 통해 이러한 감정 및 행동 변화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토아의 논리학은 오늘날 우리가 의미하는 형식 논리학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일반적인 용어로서, 이성 또는 사고와의 관계를 포함하는 훨씬 더 광범위한 개념이다. 스토아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측면은 우리의 의견, 특히 가치 판단을 그것들이 언급하는 외부 사건과 분리하는 능력인 것 같다. 이를 현대 인지 치료에서는 “인지적 거리두기”(cognitive distancing)라고 부르거나 제3세대 행동 치료에서 “언어 탈융합”(verbal defusion)이라고 부른다. 스토아학자에게 그것은 강한 감정이나 가치 판단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객관적으로 사물을 표현하는 우리의 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세 가지 규율과 주제는 철학적[인 성격이 강한] 스토아학파의 심리학적 시스템, 따라서 스토아적 치료 기반의 일정 부분을 형성한다. 우리는 삶의 이 세 가지 규칙에 관한 많은 부수적 언급들을 현존하는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있는 한 구절은, “자연학, 윤리학, 논리학을 발생하는 모든 일에 지속해서 적용하라”(Meditations, 8.13)라고 간단히 번역되곤 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객관적인 판단, 지금, 바로 이 순간 [논리학].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 지금, 바로 이 순간 [윤리학].
모든 외부 사건을―지금, 바로 이 순간―기꺼이 수용함 [자연학].
이것이 네게 필요한 전부다. (Meditations, 9.6, modified)

 

스토아적인 삶의 기술의 틀 또는 그 “교육과정”은, 다양한 의미론적 기술과 시각화 기술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특별한 치료 전략들이나 자기 조력 활동을 위한 개입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장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

 

 

 

제5장 스토아주의와 CBT의 합리적 정서

 

...

기독교가 번성하기 이전, 고대 철학의 체계들 대부분은 인간에게 옳거나 윤리적인 것이 곧 그 인간의 행복과 복지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했다. 이는 치료적인 것에 관한 물음이 곧 고대 윤리학의 기초였음을 듯한다. … 이성적 동물인 인간에게 자기 보존은 신체의 보존에 국한한 일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마음의 보존에 관한 문제였다. 우리의 동일성은 점점 더 우리의 자의식 그리고 우리의 사유하는 능력과 연관되었다. 스토아학자는 그러므로 윤리학의 물음은, 만일 그것이 자기 이해에 관여하는 것이라면,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동일성(identity)에 관한 물음을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가치를 주로 자신의 행동의 통합성(the integrity)에 부여함으로써 “분별심”(sanity)을 보존하기 위해 자기중심주의(egotism)와 쾌락주의를 모두 반대한다.

 

“야망은 너의 복지를 타인들이 말하거나 행하는 것에 결부시키는 것을 뜻한다. 방종(self-indulgence)은 그것을 네게 우연히 생기는 것들에 결부시키는 것을 뜻한다. 분별심은 그것을 너 자신의 행위에 결부시키는 것을 뜻한다.” (Meditations, 6.51)

 

우리는 이 같은 언급을, 쾌락주의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만족에 기반한 통상적인 사리추구와 삶에 관한 좀 더 철학적인 태도에 기반하는 계몽된 사리추구 사이의 구별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돼지고기 파이 장기적으로 내 건강에 나쁘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그 맛이 주는 쾌락에 유혹을 받는다.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의존하는 것일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어느 것과 더 많이 동일시하는가? 이성인가 정념인가? 인간인가 동물인가? 마음인가 신체인가? 명백하게 서로 갈등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관점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나 자신의 이익을 따르는 것, 나 자신에게 진실하여 “진짜”(authentic) 내가 되는 것, 이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나의 동물적 본성에 진실한 것인가 나의 지성에 진실한 것인가? 앞에서 보았듯, 이 물음은 거짓 이분법에 기반한다.

스토아학자는 정서나 욕구의 부재를 촉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적인, 조정된 정서(eupatheiai)의 함양을 촉구했다.

 

고전 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목표 지향적인 행위 개념을 궁수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철학을 후원하는 신들 가운데 하나인 아폴로 신은 궁술의 신이기도 했다.) 궁수는 화살을 메기고 힘껏 활을 당길 수 있지만, 화살이 일단 활을 떠나면, 과녁에 적중했는지를 보기 위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예기치 않던 돌풍이 화살을 빗나가게 하거나 과녁을 움직일 수도 있다. 화살을 쏘는 행위를 준비하려는 것과 같은 궁수의 의도는 그 자신의 통제하에 있지만, 그 결과는 직접적인 영향권의 바깥에 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저 외부적인 변수들을 의미하는 운명에 의존한다. 키케로는 최고선악론(De finibus bonorum et malorum) 3권에서 소() 카토가 스토아 윤리학을 설명하면서 궁수의 비유를 사용한 것으로 묘사한다. 궁수의 궁극적인 소망은 과녁을 맞히는 것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화살을 똑바로 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실제로 과녁을 맞히는 것과는 반대로, 똑바로 쏘는 일이 그의 일차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삶도 마찬가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이와 유사하게 “‘유보 조항을 두는행위 덕분에 나의 의도에 장애는 있을 수 없다”(Meditations, 5.20)라고 적는다.

 

언제나 유보 조항을 두고네 의도를 실행하도록 명심하라. 너는 불가능한 일을 욕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네가 무엇을 욕구하였다는 것을 뜻할까? 그러한 의도를 지니는 것 말고는 없다. 그리고 그것을 너는 성취한 것이다.(Meditations, 6.50)

 

 

[새삼 스토아 윤리학이 칸트의 그것과 다른 듯하면서도 퍽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스토아의 자연학은 칸트의 숭고론과도 충분히 연관 지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