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판단력비판 - 구상력, 오성 , 유희

Kant 2007. 7. 20. 10:27

구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유희:

인간 마음의 능력 한편에는 직관의 다양을 지속적으로 포착하여 붙들어 놓음으로써 그 직관을 오성개념에 결부시키려는 구상력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 다양한 직관을 인식하려는 오성이 있다. 미적 대상에 관한 판단의 경우 이 양자 모두 인식을 목표로 하지 않으므로, 구상력은 구상력대로 아무런 의도도 없이 자유롭게 직관의 다양을 포착, 총괄할 수 있는 것이며, 오성 역시 구상력으로부터 제공되는 다양한 직관을 개념을 가지고 규정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어떤 규칙성에 의해 파악하고자 한다고 할 수 있다. 오성은 도저히 어떤 규칙성이나 통일성을 부여할 수 없을 것 같은 직관의 그러한 다양에 자극을 받아 더욱 분발하게 된다. 그리하여 구상력과 오성 상호간에 상대의 능력을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인식판단의 경우 구상력이 오성에 봉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취미판단에서는 오성이 구상력에 봉사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구상력의 생산적 활동:

칸트는 구상력을 재생적 구상력과 산출적[생산적] 구상력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직관의 표상들을 포착, 총괄함에 있어서 연상법칙의 지배를 받는 활동을 말하며 이때의 구상력은 수동적이라 할 수 있다. 고무풍선을 보고 대머리를 떠올린다거나 방귀소리를 듣고 화장실 냄새를 떠올리는 경우가 그렇다. 반면 후자는 연상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우며, 현재 감성에 의해 제공되고 있는 직관 표상들만을 수동적으로 포착, 총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다른 직관 표상을 불러내어와 주어진 것을 넘어서는 것(취미판단의 경우 미적 이념)을 산출하는 능력이다. 한마디로 이러한 구상력은 튀는 구상력이라 할 수 있다. 백남준 등의 작품에서와 같이 TV 모니터와 말을 탄 기사의 모습을 결합시킨다든지 여성의 몸과 첼로의 이미지를 결합시키는 일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생산적 구상력도 무한정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만일 구상력이 제멋대로 직관들을 산출하고 결합시키려 한다면 소위 “열광”(Schwärmerei), 즉 감성의 모든 한계를 초월하여 무엇인가를 직관하려는 허망한 태도를 낳게 된다. 그러므로 구상력의 자유에 한계를 부여하여 그것의 유희 공간을 결정하는 것이 반성적 판단력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주어진 소재로부터는 자유롭되 무법칙적이지는 않은 - 예컨대 아무리 자유로운 구상력이라도 자기모순적인 것을 산출해 낼 수는 없다 - 구상력의 활동이 미의 이념, 즉 개념으로 포섭될 수 없는 아름다운 직관표상을 산출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천재의 능력(Genie)이다.

유희:

칸트가 사용한 유희 개념은 미학의 전개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이미 그의 동시대인이던 쉴러가 이 개념을 빌어 자신의 미적 교육론을 전개하였고, 현대의 하르트만이나 가다머, E. 핑크 같은 철학자들도 이 개념을 그들 미학의 주요 테마로 삼았다. 쉴러나 하르트만은 유희를 주관의 자발성에 기초하는 것으로 보고, 인간의 자기실현 방식이나 자발적인 삶의 표현 형식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가다머 같은 이는 주체 없는 유희 개념을 주장한다. 어떤 유희의 주체가 유희하는 것이 아니라, 유희가 유희하는 자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유희가 누군가에 의해 유희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유희되고 있는 것이라 한다. 즉 유희는 그 유희에 참여하고 있는 것들에 의해 발생하는 일종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말장난 같은 이러한 유희 개념으로 가다머는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론을 발전시킨다. 그에 의하면 예술은 곧 유희이며, 이 유희는 그 예술의 창조자나 감상자 모두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예술가나 감상자는 물론 모두 그 유희 자신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라 할 수 있지만, 그 유희를 가능케 하는 자발적인 주체로서가 아니고, 오히려 유희되고 있는 자로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가다머에 따르면 예술과의 만남[유희의 체험?]은 모든 방법적인 제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세계관으로부터 해방된 삶의 진리와 의미를 경험하게 해준다고 한다. 우리는 이를 일종의 미학주의라 부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