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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향복(享福) - 칸트의 행복관

Kant 2007. 7. 12. 14:39

칸트와 행복은 언뜻 생각하기에 물과 기름 사이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칸트는 소위 “엄숙주의”의 윤리설을 대표한다고 일컬어지지요. 그러나 그의 글을 조심해서 읽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가 말하는 타인에 대한 가장 큰 의무는 그 타인의 목적, 즉 그 사람의 행복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타인을 한갓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말도 결국 타인이 추구하는 행복을 할 수 있는 한 증진시키도록 노력하라는 의미도 됩니다.

어쨌든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행복에 관해서는 대체로 몇 가지 일치된 지혜가 전해지는 듯합니다.

먼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행복의 대상을 외부적인 조건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실패하기 십상이라는 데에 공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흔히 부, 명예, 건강, 성공 따위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덧없는 것들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오늘 10억짜리 복권에 당첨된 꿈 같은 현실이 내일 강도에게 봉변당하는 지옥으로 변할 수 있듯이, 그러한 외부적 조건들은 내가 콘트롤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커서 행복을 보장해주기는커녕 더 큰 좌절로 이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행복을 느끼는 사람 하나하나의 주관적인 차이도 커서, A 아무개는 적어도 6 개월마다 고급 승용차를 새로 바꿔야만 직성이 풀리는 반면, B 아무개는 유명 브랜드 골프채 수집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낙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또 김 아무개는 고시 합격에 목을 매는데 반해 이 아무개는 유명 발레리나를 생애 최고의 목표로 삼습니다. 좀 극단적인 경우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행복의 대상이 수시로 바뀌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을 모든 시기에 걸쳐 두루 행복하게 해주는 그러한 외부 대상은 있을 수 없는 셈입니다.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나, 영어의 “good luck (eutychia, fortuna)” 은 이런 종류의 행복에 관한 표현들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말로는 “행운”으로 번역해도 되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누릴 “향(享)”자를 써서 “향복”으로 옮겨도 괜찮을 듯합니다. 주로 수동적인 향유에서 성립하는 행복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이런 종류의 행복에 만족할 수 없던 다수의 철학자들은, 진정한 행복의 조건을 외부 세계에서 찾지 말고 각자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다시 말해 차 한잔의 여유로움 속에서도 무한한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정신적 태도가 행복의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는 거죠.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어쩌고 하는 수작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영어의 “happiness”(eudaimonia, beatitudo, felicitas)도 바로 이런 종류의 행복관을 반영하고 있는 말입니다.

헌데 문제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모두 다 신선 같이 차만 마시고 살 수는 없다는 데 있습니다. “마음을 비웠다”던 YS의 18번 코멘트가 그의 엄청난 야심을 포장한 것이었듯이, 물질적인 조건, 세속적인 성공, 그리고 그런 것들이 갖는 의미를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네 같은 범부들은 크게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생의 마스터 플랜도 세워보고,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세계의 물질적인 조건들도 힘닿는 데까지 개선해 보고자 애쓰는 것이겠지요.


결론?? - 현재에 만족하는 차 한잔의 여유로움도 좋지만,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 능력에 대한 적절한 도전이 될 수 있는 계획을 세워 하나하나 성취해 나아가는 데에서 인간적인 행복이 보장된다고 보면 어떨까요? 비록 그 행복이 성취감 뒤에 오는 허전함을 수반하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