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행복 - 오래된 아포리아에서 두뇌과학의 영역으로? 슈테판 클라인의 『행복의 공식』(김영옥 옮김, 웅진 지식하우스, 2006)을 읽고

Kant 2012. 1. 26. 11:43

『행복의 공식』(Die Glücksformel oder Wie die guten Gefühle entstehen, Reinbek bei Hamburg: Rowohlt Verlag, 82002)의 저자 슈테판 클라인(Stefan Klein)은 철학, 물리학, 두뇌과학, 사회학 등을 공부하고 생물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독일 뮌헨 출신의 학술저널리스트이다. 『행복의 공식』은 그의 또 다른 작품 『우연의 법칙』과 더불어 그의 출세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전문 지식을 대중들에게 다가가게 만든 탁월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그만큼 이 책은 단순히 대중의 눈높이를 좇아서 통속성만을 추구하는 여느 책들, 예컨대 1990년대 이후 국내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린 수많은 이른바 “자기계발서”나 “인생 지침서” 들과는 달리 학문적 깊이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행복’이란 단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듣고 마주치는 말이 또 있을까? 아마 고작해야 유행가 가사의 단골 메뉴인 ‘사랑’ 정도나 이에 필적할 수 있지 싶다. 철학에서도 친숙하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한 주제가 행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행복은 어느 시대에서나 그 시대정신의 반영물로서 또는 그 시대정신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수많은 사상가들의 다양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행복이 그 같은 관심을 받아온 이유는 그것의 추구가 인간 삶이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한다”든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해왔던 것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행복한 삶에 별로 개의하지 않았을 법도 한 계몽기의 철학자 칸트조차 “행복하고자 하는 의도는 …… 모든 이성적 존재자가 자연 필연성에 의해 가지고 있다고 확실하게 전제할 수 있는 의도”라고 했다. 심지어 파스칼은 “목매달아 자살하려는 자들조차 그들의 그런 행동의 동기는 행복”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로지 잉글랜드 사람만이 그 짓을 한다”고 한 니체만이 아마도 철학사를 통틀어 유일한 예외였으리라! 사정이 이러하니 행복에 관한 앎이 “가장 고귀한 것”일 뿐 아니라, “철학이 탐구하고 추구해야만 하는 유일한” 대상으로까지 간주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지속적인 행복의 상태에 머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내로라하는 철학자들에게도 결코 만만한 과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오히려 그 가능성에 대한 회의를 고백하게 만드는 아포리아에 가까웠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원하면서도 길을 잃고 헤매는 까닭”을 알고자 애썼고, 왜 행복의 감정은 덧없이 사라지며, 또 어째서 인간들은 성공적인 항해를 거쳐 도달한 목적지에서 오히려 실망하기 일쑤인가와 같은 물음에 적잖이 곤혹스러워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명민했던 칸트 역시 행복에 대해서는 “확고한 원칙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원한다면 철학자들의 글에서 행복한 삶에 관해 그들이 남긴 통찰력을 읽을 수 있다. 예컨대 외적인 조건의 향유에 의존하는 “εὐτυχία”와, 내면의 태도에서 성립하는 “εὐδαιμονία”의 구분, 그리고 이것에 상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fortuna”와 “felicitas”, 즉 “fortune”과 “bonheur”, “luck”과 “happiness”, “Glück”과 “Glückseligkeit”의 등의 구분은, 철학자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행복 메커니즘의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저자 클라인도 프롤로그에서 우리는 이미 행복에 대해 꽤 많은 사실을 알아냈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러한 지식이 상당 부분 여전히 일반인들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에 놓여 있다는 점이라 한다. 그래서 그는 접근하기가 만만치 않은 전문 철학서, 그리고 자연과학 논문들에 실려 있는 통찰들을 바탕으로 “행복에 대한 하나의 일관된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자 한다. 이러한 그의 의도를 이 책이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은 독자 개개인의 몫이겠으나, 그동안 이 책이 해외에서 거둔 성공으로 미루어 보건데, 이미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 사실인 듯하다.

 

저자는 행복이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칭찬”을 들었을 때나 “꽃을 선물” 받았을 때, 또는 “맛난 음식”을 즐길 때, 우리가 느끼는 좋은 기분은 얼굴 표정으로 드러날 뿐 아니라 맥박이 빨라지고 체온이 올라간다든지, 피부가 촉촉해지고 손가락이 떨리는 등 우리 신체 전체를 통해 다양한 반응들을 야기한다. 저자는 이렇게 행복뿐 아니라 모든 감정이 먼저 몸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좀 더 읽어보면 저자가, 행복의 느낌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마음의 세계”가 아니라 몸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뇌”의 변화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각, 기억 그리고 희망만으로는 그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다. 그것들이 올바른 육체적 신호와 결합될 때 비로소 우리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호들을 바탕으로 뇌가 육체적인 행복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27 이하)

 

일단 저자는 행복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으며 그것이 다른 느낌들과 어떻게 구분되는지와 같은,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문제에는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행복과 우리 신체의 물리적 변화를 동일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 신체의 신호가 먼저라고, 그러니까 신체의 변화가 행복의 필요조건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좋은 감정은 육체와 연결되어 있다. 원하는 대로 행복을 느끼거나 나타내기가 어려운 건 그 때문이다.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이 사실은 뇌의 건축적 구조와 관련되어 있다. 몸을 조정하고 그로써 감정을 발생시키는 것은 신경삭들(Nervenbahnen)이다. 의식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28)

 

행복한 느낌에 직접 관여하는 몸의 변화는 “비자율신경”에 의해 조절되기 때문에 인간은 “직접적인 방식으로는 감정을 변화시킬 수” 없고 그래서 좀 더 “세련된 방식을 고안해내야 된다”는 것이다. 세련된 방식이란 예컨대 우리 자신에게 뭔가 유익한 일을 하거나 환경을 개선하든가 “생각을 바꿈으로써” 또는 “아름다운 상황”을 떠올림으로써 “간접적으로 육체적 느낌에 개입”하라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저자가 인간의 자율적인 행동이나 사고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최소한 우리는 어떤 경험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기만 하는, 그래서 어떤 감정 상태에 일방적으로 우리 자신을 점령당하고 마는 존재는 아니라는 셈 아닌가? 만일 사정이 이와 같다면, 이는 앞에서 언급한 저자 자신의 주장, 즉 우리가 누군가에게 칭찬을 들었을 때나 꽃을 선물 받았을 때, 또는 맛난 음식을 즐길 때 등과 같은 사태를 경험함으로써 나타나는 몸의 변화가 행복의 느낌에 결정적이라는 주장과는 조화시키기가 쉽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어떤 경험대상이 주어지면 그 경험에 의해 우리에게 어떤 느낌이 발생한다는 입장과,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경험하고 생각하며 평가하는가에 의해 감정이 조절될 수 있다는 입장 사이에서 때때로 독자를 헷갈리게 만든다. 서평자가 보기에 저자는 이 책에서 철학과 자연학(물리학, 심리학, 생물학 등을 포괄하는 옛 용어) 중 후자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여겨진다. 현대의 자연학 내지 자연과학이 발견한 또는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경험적 데이터를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술하는 일이 철학적 거리두기의 미덕을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랄까.


예컨대 인간이 “부정적인 느낌을 긍정적인 느낌보다 강렬하게 체험”(48)하며, 불유쾌한 정서들이 유쾌한 정서보다 더 쉽게 발생한다는 심리학자들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진화론과 연관되어 소개된다.

 

“인간은 비극을 선호하는 것이다. 비극에 대한 이러한 반응 체계는 진화의 과정에서 그 업적을 인정받았다. 공포라든가 슬픔 또는 분노를 통해 우리의 선조들은 덤불 속에서 조금이라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경우 아무리 탐스런 사냥감이 있더라도 다 버려두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행복을 찾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강도로 위험을 꺼려한다. 나쁜 소식은 모든 신문에서 기쁜 소식보다 더 큰 머리기사로 처리된다.”(49)

 

인간관에 대한 진화생물학의 막강한 영향력은 여기서 굳이 더 거론할 필요도 없겠지만, 실증주의적 진리관에 대한 저자의 편애(?)는, 두뇌과학이나 신경생리학과 종교적 체험의 과감한 결합을 적극 옹호하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래서 예컨대 의지적 또는 “의식적인 결정”을 강조하는 서양의 일반적인 사고법보다는 습관의 내면화를 중시하는 동양의 불교나 힌두교 등의 가르침이 행복의 감정을 얻는 데 더 유익하다고 한다. 행복에 대한 우리의 감각적인 인지는 외부 상황보다는 우리의 뇌가 느끼는 방식에 달려있는데 이를 변화시키려면 “반복과 습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일 먼저 환경을 바꾸는 데 주의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바꾸는 데 주의를 기울”이라는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말에 “과학은 그저 동의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101 이하). 그러나 이러한 주장도, 우리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 “상황을 좀 더 여유롭게 인지할 수” 있고, 또 거기서 “자유를 발견할 수” 있으며, “긍정적인 체험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몰아낼 수 있다”(64)는 자신의 다른 주장과 얼마나 양립할 수 있을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후자에서는 반복과 습관보다는 자유로운 의지적 결단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기분 좋은 느낌은 덧없이 사라져버리고 아주 빈번하게 정반대의 상태, 즉 고통이나 불쾌한 감정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는가 하는 물음은, 이 책에 의하면 더 이상 철학적인 물음이 아니라 베타-엔도르핀, 도파민, 세로토닌 등과 같은 호르몬에 관한 “신경화학”과 “신경심리학”의 물음으로 환원되어 이해되어야 마땅할 듯하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항해를 거쳐 도달한 목적지에서 오히려 불가피하게 마주치는 실망감과 관련해서 철학자들이 제시했던 한탄 섞인 경고의 메시지들도 이제는 극복되었고 또 그래야 마땅한 과학적 후진성에 대한 빛바랜 증거일 뿐일까?

 

서평자는 이 책을 읽는 내내 행복이 얼마만큼 진화의 산물 내지 그 상관물이라는 것인지, 또 과연 인간 자신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전혀 무관한 행복의 가능성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인지 하는 의문을 지우기 어려웠다. 저자는 때로는 명상의 효과나 신비 체험까지도 일종의 “자력 흥분”(Magnetstimulation)으로 설명(해체?)해 버리려는 두뇌과학자들에 열광하는 듯하다가도(313), 때로는 “삶을 살아가는 용기는 실제 상황보다 우리가 그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더 좌지우지된다”며(251) 자못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문학도들에게 희망의 복음을 들려주기도 한다. 행복 개념에 대해 진지한 철학적 탐구보다는 행복의 느낌에 관련된 생리학적(그리고 약간의 사회학적) 메커니즘에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 적합한 책 같다. 철학이나 과학에 관한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인들도 고통의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서 읽을 수 있을 만큼, 난해하거나 지루하지 않은 책이다. 물론 불행하다는 느낌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들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몸과 감정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는 그런 사람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번역서의 특징적인 요소와 번역의 질에 대해 몇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번역서는 원서의 형식과 내용에 적지 않은 변형을 가했다. 일단 흥미로운 내용의 실험에 관한 보고와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 수많은 미주들을 과감히 없앴다. - 예컨대 오른손잡이냐 왼손잡이냐에 따라 감정을 관장하는 앞이마뇌의 발달이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실험 자료는 아직 없지만, 왼손잡이의 정서 장애 빈도가 조금 더 높을 수 있다는 설명, 또 도파민을 파킨슨병 환자에게 직접 투여하지 못하고 엘도파(L-Dopa)를 투여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 등. 진중한 호기심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도 그 진지함을 견디지 못하는 우리 독서문화의 가벼움을 배려하고 선도하는(!) 출판사의 관행 같아서 퍽 씁쓸하다. 원서의 소제목들 역시 가벼운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구들로 바뀌었다. 그래서 “조형이 가능한 뇌”(Das formbare Gehirn)는 “달라이 라마가 실험실로 간 까닭은”으로, 그리고 “욕구함”(Begehren)이라는 제목은 “우리는 왜 바람을 피울까”와 같이 섹시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원서에는 있는 파푸아 뉴기니 원주민의 미소와 “뒤센 미소”를 담은 사진 두 장도 없앴고, 각 나라의 소득 수준과 행복지수를 나타낸 도표와 그 설명도 슬쩍 수정되었다. 푸에르토리코를 한국으로 바꾼 것까진 좋았으나 아일랜드 사람들이 네덜란드 사람들로 바뀐 것은 설명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


번역 문장은 미끈하고 자연스럽다. 역자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다. 누가 번역은 마누라와 같아서 미끈하면 충실하지 않고, 충실하면 박색이라 했던가? 한두 군데 오역이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잘 된 번역 같다. “그러나 두 가지 측면에서 그것은 논란이 여지가 있다. …… 우리의 감각적 인지는 상당 부분 우리의 뇌가 느끼는 방식에 달려 있다. 즉 우리의 결정이 아닌 외부 상황에 달려 있는 것이다. 둘째, 이 느낌의 방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반복과 습관이 필수적이다.”(101) 이 부분은, “그러나 다음 두 가지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 우리의 감각적 인지는 외부 상황보다는 우리의 뇌가 느끼는 방식에 달려 있다. 둘째, 이 느낌의 방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한두 번의 노력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뇌의 회로를 새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반복과 습관이 필수적이다.”로 수정되어야 하겠다. 또 “인간은 자신에게 해가 될지라도 상대방이 겪는 해가 자신이 겪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크기만 하다면 질투를 한다”(285)는 “인간은 상대방이 겪는 해가 자신이 겪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커질 수만 있다면, 심지어 그것이 자신에게 해가 될지라도 질투를 한다”로 옮기는 게 낫다고 본다.

(출처: 철학 실천과 상담(2011. 8), 183-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