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2023법학적성 언어이해 헤겔미학(예술론)

Kant 2022. 8. 17. 01:47

"정신철학"으로 일컬어지는 헤겔 철학에서 예술과 종교의 관계를 "낭만적인 예술"과 "기독교적인 종교"에 초점을 두어 설명하는 지문이다. 헤겔 철학은 난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그 체계의 논리적 구조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세부 논의를 따라가기가 의외로 어렵지 않은 철학이라 여겨진다. [물론 헤겔 철학 전공자는 이 말을 비전공자의 황당무계한 헛소리쯤으로 치부할 수 있다!]

먼저 헤겔 철학을 처음 접하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철학 전공자에게도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 용어가 바로 "정신"(Geist)이라는 개념이다. "정신"하면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개념이 아마 "물질"일 것이다. 일상 언어에서 이 두 개념은 보통 서로 대립적인 의미의 켤레 개념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상어 사용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면 정신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가망성은 제로라고 보면 된다. [그래도 먹고 사는 덴 아무 지장 없다.]

대체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무엇을 뜻하나?

“정신”은 타 언어로는 적절히 번역되기 어려운, 독일 철학 고유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단 물질 세계와 비물질 세계 모두를 포함한 세계 가능성의 원리라고 정의할 수 있다. 헤겔에 따르면, 물질과 정신을 대립의 관계로 바라보는 시각은 아주 초보적인 단계의 정신, 즉 감각으로서의 의식 단계에서나 성립하는 것이고, 이성의 단계에서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은 또 무엇을 뜻하나?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어떤 발전 단계에 이르게 되면 이성과 동일시될 수 있지만, 우리가 이성을 좁은 의미로, 즉 합리적 사고의 능력으로서 그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시켜 주는 종차로 해석할 경우, 그것은 정신과 동일시될 수 없다.

헤겔의 정신은 어떤 의미에서는 스피노자의 "자연"이나 베르그손의 “생명력” 등과 유사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르그손에게서 이성은 세계의 연속성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극복되어야 할 무엇(관점)이었으나, 헤겔의 경우는 자신을 최고로 발달시킨 이성만이 세계와 정신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헤겔의 정신은 세계 가능성의 원리로서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 같이 그 세계를 지속적으로 산출하기는 하되 거기에 몰입되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성상 자기 자신을 의식하면서 세계를 대상화하고 객관화시켜 파악하며, 다시 어느 단계에 이르면 대상화된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일치된 것으로서 파악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완성된 인식에 도달한다. 정신은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면서 스스로를 전개[발전]시키는, 또는 그에 따라서 자신의 완성도를 높여 가는 절대적인 존재 그 자체다.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James Webb Space Telescope)이 새로운 은하계 이미지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는 최근 보도는, 자연 철학적 인식이 계속 심화될 뿐만 아니라, 그 대상인 물질계 역시 정신의 자기 외화와 다른 것이 아니므로, 정신이 계속 자신을 전개해 나간다는 논리와 그럴듯하게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런데 짐작할 수 있듯이 이러한 정신의 자기 전개 그리고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일은, 사적 차원의 사고, 감정, 관심사, 의도 등에 사로잡혀 있는 개인 마음 수준의 유한한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의 정체성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된 인간 정신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만 가능하게 된다. 그러니까 정신의 본래적인 모습은 인간의 정신, 그것도 개별적 의식이나 마음으로서의 자기 자신, 즉 개체성의 한계를 극복한 인간의 이성을 매개로 해서만 드러난다.

헤겔은 그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정신현상학(Die Phänomenologie des Geistes,1807)에서 이러한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정신 철학 전체의 개요를 제시하고 있다. 한편 그의 철학백과전서(1817)에 의하면 본래의 철학 체계는 논리학, 자연 철학, 정신 철학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논리학은 최고의 단계에 이른 정신, 즉 절대 정신(이성)이 자신의 전개 방식, 즉 자신의 활동을 자기 자신에 있어서 (즉자적인 방식으로) 인식하는 학이다. 이러한 논리학은 단순히 사유의 형식에 관한 학이 아니다. 즉, 순수 이성의 개념들이나 판단, 추리 등을 분석하고 그것들의 관계를 밝히는 데에서 그치는 학이 아니다. 그러한 개념들, 범주들, 판단, 추리 등은 헤겔에 따르면 사유의 규정, 즉 정신이 스스로에 대하여 행사하는 규정이면서 동시에 실재 존재 세계의 구조와 운동(변화) 방식과 일치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겔의 논리학은 정신의 자기 규정 방식이 객관적 세계에 대하여 자기 산출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밝히는 과제를 수행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처음에는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정신이 물질-비물질의 대립을 넘어선 모든 현실, 존재 그 자체를 포괄하는 세계 가능성의 원리라는 점을 기억하면, 그의 관점에 동의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여부를 떠나 그리 생뚱맞은 주장은 아니라 여겨진다. 어쨌든 헤겔은, 이성의 구조는 곧 현실의 구조와 같으며, 이성적인 개념들, 그리고 그 개념들 사이의 관계는 사실들이나 사건들, 또는 실재 세계로부터 추상되어 얻어진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한다. 즉, 현실이 이성의 자기 규정을 통한 전개 방식에 따라 산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헤겔의 생각은 동양의 주역 논리와도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64 개의 궤로 설명되는 주역적 논리의 전개 양상이 곧 현실 세계의 변화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에게서 자연 철학정신이 자신을 외적 존재의 형태로 파악하는 학문이다. 자연철학은 정신이 자기 자신의 본성을 말하자면 자기로부터 외화된 외부 현실 세계의 모습을 통해, 즉 자연을 통해 인식하는 과정을 뜻한다. 자연 세계도 그 가능성의 원리는 정신이기 때문에 결국 자연 철학은 정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자신, 즉 자연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자들의 작업은 정신(절대적 정신 또는 이성)이 인간의 정신(인간 이성)을 통해서 자연에서 현시되는 자신의 본성을 스스로 인식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정신 철학정신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단계인데, 여기서 정신은, 인간 개개인의 정신, 집단의 정신,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술, 종교, 철학에서 나타나는 자기 자신의 본성의 완전한 실현을 통해 스스로를 파악한다고 한다.

이러한 철학 체계의 구분은, 정신이 자신을 각각 주관적 정신, 객관적 정신 그리고 절대적 정신으로 파악하는 작업에 상응한다. 그러나 논리학, 자연 철학, 정신 철학의 3 단계는 얼핏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정신이 자신의 역사성을, 즉 운동과 변화를 드러내는 과정은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그것은 정신 그 자체의 모습을, 즉 이데아로서의 정신의 모습을, 즉자태, 대자태, 즉자-대자태로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논리학에서의 정신도 정신 철학에서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구조를 가진 이성이다. 반면에 정신현상학에서 등장하는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에 관한 기술은,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오성[지성]적 분별지―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당연시하는―를 거쳐 이성적 절대지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으며, 정신의 자기 인식 과정을 역사성, 시간성의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다.

위의 지문이 언급한 "낭만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은 당연히 각각 정신 철학 단계의 '예술'과 '종교'를 통한 절대 정신의 자기 이해 방식을 설명하는 개념들이다. 헤겔에 따르면, 절대 정신은 자연미나 예술미의 감성적 형태 속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며, 또 종교에서는 표상[비유적 사고]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사변 철학은 오로지 개념[적 사고]만으로 절대 정신을 파악[사고]한다. 그러므로 형식만 다를뿐 예술, 종교, 철학은 동일한 주제, 즉 절대적 존재, 절대 정신을 다루는 것들인데, 헤겔은 각 영역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통해 미학적, 종교적, 철학적 의식 내지 정신의 각 특성이 어떠한가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개별 영역에서 정신이 밟아가는 역사적 전개 과정 역시 설명한다. 다시 말해 미적 의식의 전개 과정은 물론 그것으로부터 종교적 의식에로의 이행, 또 종교적 의식의 발달 과정과 그것에서 사변철학적 관점에로의 이행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또 요구되는가를 기술한다. 그러므로 예술사, 종교사, 철학사적인 전개 과정 그리고 그 세 영역들 사이의 개념적 관계가 정신 철학의 주요 주제가 된다.

예술을 통한 정신의 전개 과정에서는 에컨대 그리스 예술이 기독교 예술을 선행하며, 종교의 경우에는 그리스 종교가 기독교 종교를 선행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술의 모든 형식[단계]들이 등장하고 나서야 비로소 종교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며, 또 절대적인 종교인 기독교 등장하기 이전에는 아무런 철학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그리스 신전들은 당연히 그리스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고, 그리스 철학자들도 같은 시기에 활동했다는 것을 헤겔이 몰랐을 리 없으니 말이다. 예술 개념으로부터 종교 개념으로, 그리고 다시 철학 개념의 이른바 변증법적인 이행은 시간적인 사건이 아니다. 즉, 그것은 개념적인 것이지 시간적이거나 역사적인 진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개념적 운동의 관점에서 볼 때, 즉 논리적인 차원에서는 세 영역들 사이의 우선성을 문제삼을 수 있지만, 이것은 시간적인 선후 관계와는 무관하다. 어쨌거나 감각보다는 상징적 사고, 또 상징적 사고보다는 개념적 사고에 우선성이 두어진다고 본 것이다.

헤겔은 예술사, 종교사, 철학사 이 각각의 세 영역에서도 변증법적인 패턴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으나, 일부 헤겔 철학 비판자들이 주장하듯, 예술이 멈추는 곳에서 종교가, 그리고 종교가 멈추는 곳에서 철학이 등장한다는 식의 무리한 논증을 제시하려 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정신의 활동은 역사적인 발전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 안에서는 하나의 예술 형식이 다른 형식에 이어서 출현하고, 또 종교에서도 하나의 종교적 의식 단계가 다른 종교적 의식 단계로 이어진다. 철학 체계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인간 정신의 활동이 끝없이 계속되는 한, 그 활동은 예술, 종교, 철학의 형식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절대 정신이 자기 자신을 그 인간 정신의 활동을 통해 파악하는, 자기 인식 활동에 종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세 활동 모두가 동일한 수준[차원]에 이른 정신의 자기 현시 방식인지 아니면 헤겔이 철학만을 최고의 정신 활동으로 간주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헤겔 사망 후 그의 철학에 대한 해석을 놓고 구(舊)헤겔주의, 중도파, 청년 헤겔파 등이 벌인 논쟁 참고. 인간이 몸을 가진 존재인 한, 순수한 사고[이성] 활동 자체와 동일한 것이 될 수는 없으므로, 예술이나 종교가 철학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실제로도 우리는 예술적 창작 활동이나 신앙 생활에서는 지복을 누리지만, 순수 인문학적-철학적 사고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을 훨씬 더 많이 목격한다. 예술적 천재나 독실한 신앙인이 볼 때 철학도는 그들이 도달해야 할 롤 모델이라기보단 보잘 것 없는 이성적 사고에 매달려 불가능한 꿈을 쫓고 있는 불쌍한 중생에 불과할 것이다.]

절대 정신이 감각적인 대상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그것, 즉 절대 정신은 "미"(美), 즉 "이념에 대한 감성적 가상"(das sinnliche Scheinen der Idee)으로서 자신을 현시한다. 즉, 예술에서 절대자는 "이상"(das Ideal)이라는 감각의 베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미로서의 이념은 "진리"로서의 이념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절대자[절대 정신]인데, 전자는 예술, 후자는 철학을 통해 파악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파악의 형식 내지 양식은 서로 구별되므로 예술의 미적 직관[절대자에 대한 직접적 파악]과 철학의 개념적 사유는 같은 것이 아니다. 미로서의 이념은 이런 의미에서 "이상"을 통해 직접적으로 파악[직관]되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헤겔은 자연미보다는 예술미를 우월한 것으로 평가한다. 물론 전자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후자만을 정신의 직접적인 창조물―물론 자기 의식적인 인간 정신을 통한―로 간주한다. 정신이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직접 현시해 주는 것이 예술의 미이다. 이에 비해 자연미는 체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본래 자연 철학[특히 유용성(Nützlichkeit)의 관점]의 영역에 더 가깝다고 여긴 것 같다. 자연의 대상들이 보여주는 규칙성(Regelmäßigkeit), 대칭성(Symmetrie), 조화(Harmonie), 합법칙성(Gesetzmäßigkeit), 또 동식물이나 인간 등의 외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언급하고, 나아가 생명체가 생명이 없는 자연의 사물보다 더 아름답다고 주장하면서도, 보여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외면의 아름다움일 뿐 내면성과 그 내면에서 작동하는 정신은 아니라고(das äußerliche Bestimmtheit und Einheit … aber nicht immanente Innerlichkeit und beseelende Gestalt) 덧붙인다.(Ästhetik I, 15, 138 이하 = Jubiläumsausgabe, Bd.12, 20, 188 이하)

예술미가 이념의 감성적 가상이라는 주장은 무슨 뜻일까? 예술 작품은 인간 정신이 외부적인 소재, 다시 말해 물질적인 재료의 형식[태]를 통해 정신적인 것[즉, 절대자라는 이성 개념]을 표현한 것으로서, 주관성과 객관성의 조화로운 통일, 종합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미는 "정신에서 탄생하고 또 다시 탄생한 아름다움이다."(aus dem Geist geborene und wiedergeborene Schönheit).(Ästhetik I, 14 = Jub., Bd.12, 19) [인간을 포함하여 자연 역시 정신의 산물이자 자기 자신인데 이것이 만들어낸 것이 예술 작품이니 이중의 탄생 과정을 거친 것이라는 의미 같다. 정신이 탄생시킨 인간 정신의 산물이, 역시 정신이 탄생시킨 자연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고 미의 관점에서도 우월하다? 말장난처럼 들린다. 하지만 알프스나 지리산의 자연이 제아무리 아름답고 장엄하다 한들 그 자체로는 적막강산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그곳에 띄엄띄엄 어우러진 인공물, 그리고 무엇보다 감상자가 있어야, 즉 인간 정신이 개입되어야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 된다.]

"예술의 과제는 이념을 직접적인 직관을 위해 감성적 형태 안에서(in sinnlicher Gestalt) 현시하는 것이며, [상징적] 사고나 순수한 정신성 일반으로(in Form des Denkens und der reinen Geistigkeit) 현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예술 작품에서의] 현시가 가지는 가치와 위엄은 이념[적인 내용]과 그 형태라는 두 가지 양상의 일치와 통일에서 성립한다. 그래서 예술의 높이와 탁월성, 그리고 그 예술 작품과 그것의 본질적인 개념 사이의 일치는 이념[적인 내용]과 [감성적인] 형태가 상호 관통하도록 만들어진 내적 조화와 통일의 정도에 의존한다."(Ästhetik I, 79 = Jub., Bd.12, 109)

물론 헤겔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절대자의 현시로 의식하며 창작 활동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그와 같은 의식 없이는 예술작품의 미를 감상할 수 없으리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그러한 의식이 없더라도 예술가든 감상자든 어떤 작품에 무언가를 보태거나 제거할 때 그 작품이 손상되고 망가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 예술품이 완전하며, 정신적 내용과 감성적 체현이 완전하게 융합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은 그 작품을 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의 현시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그들 중 아무도 그 작품의 진리, 즉 형이상학적 의미를 개념적으로 진술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그러한 사실이 미적 의식의 결함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예술이 가지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명확하게 또 반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철학이지 미적 의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이해는 예술에 대한 철학적 반성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이것은 예술적 창작 활동과는 아주 다른 무엇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동시에 대단히 보잘 것 없는 철학자 또는 아예 철학자가 전혀 아닐 수 있으며, 이와 유사하게 위대한 철학자라도 극소수를 제외한다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지도 심포니를 작곡하지도 못할 것이다.

완전한 예술품에서는 이념적 내용과 감성적 형식이라는 두 요소가 상호 침투하여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융합한다고 했는데, 예술사는 이 두 요소의 관계가 보여주는 차이에 따라 예술의 여러 근본적인 유형들이 발생함을 보여 준다. 예컨대 감성적 요소가 정신적 또는 이데아적 내용보다 우세하면, 달리 말해 후자가 표현 매체를 지배하지 못하고, 감각의 베일을 통과해 빛을 발하지 못하면, 애매하고 미스테리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이 같은 유형의 예술이 상징적 예술로서 고대 이집트 및 오리엔트의 예술(특히 Architektur, 즉 건축)이 여기 해당한다. 헤겔이 보기에 예컨대 이집트라는 나라는 상징이 지배하던 나라다. 이집트 예술은 정신의 자기 해석이라는 정신적 과제를 자신에게 부여하였으나 실제로는 충족시키지 못했다. 몸통은 사자이고 얼굴은 인간인 스핑크스는 "상징적인 것 자체에 대한 상징"으로서, 헤겔에 의하면, 이념적 내용이 적절한 감성적 형태를 부여받지 못하고 서로 이질적인 상태로 남아 있어서, "객관적 수수께끼"에 불과하다. 아무튼 헤겔에 따르면 상징적인 예술은 세계와 인간 자신, 자연과 정신이 신비한 것, 일종의 수수께끼나 불가사의한 것으로 느껴지던, 인류 역사의 초창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예술이다.

둘째 유형의 예술은 정신적인 또는 이념적인 내용이 조화로운 통일성 안에 융합되어 있는 예술, 즉 고전적 예술이다. 상징적 예술에서 절대자가 신비하고 형태를 갖추지 못한 어떤 것으로서 그 작품을 통해 표현되기보다는 오히려 단순히 암시되고 있는 상태에 그쳤다면, 고전적 예술에서 정신은 자기 의식적인 개별 정신으로서 구체적인 형식(인간의 신체[der menschliche Körper]를 통해)을 통해서 지각된다. 고로 이 유형의 예술은 주로 의인화(Anthropomorphismus)라는 특성에 의해 지배된다. 신들은 미화된 인간으로 표현되는바, 고전적 예술을 주도하는 장르는 정신을 유한하고 체화된 정신으로 표현하는 조형예술(Skulptur)이다. 헤겔은 고전적 예술을 그리스의 조각 작품들과 연결시킨다. 그리스의 조각상들에서 정신적 내용은 감각의 베일을 통과해 빛남으로써, 정신과 질료의 완전한 결합을 보여 준다는 것. 정신적 내용이 상징적인 형식 안에 그저 암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표현되어 있다. 예컨대 조각가 프락시텔레스나 스코파스(Praxiteles; Skopas, BC 4세기)가 남긴 작품들에서 정신은 인간의 신체를 통해 분명한 표현을 얻었다.(Ästhetik I 419-421 = Jub., Bd.13, 10-12; Ästhetik II, 79 = Jub., Bd.13, 446)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고전적 예술, 그리고 그 미를 표현하고 있는 종교적 작품들은 정신의 깊이를 아직 총체적으로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이념적 내용과 감성적 형식의 완전한 조화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정신이 특정한 인간적 신체와 통일을 이룬, 단순히 특수하고 유한한 정신에 불과한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의 셋째 유형인 낭만적 예술이 존재한다. 이 예술에서 정신은 무한한 것으로 느껴지며, 감성적 외면성(Äußerlichkeit), 즉 현존재라는 외피(das Äußerliche und Sinnliche des Daseins)를 벗어버린다. 낭만적 예술은 기독교 세계의 예술을 지향하고 의도하며, 인간화나 의인화의 외면성과 유한성[개별성]이 정신적 내용에 적합한 것으로 느끼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상징적 예술에서처럼 정신이 아직 그 자체로 인식되지 않고 불가사의한 것, 즉 수수께끼 또는 문제로 남아 있어서, 정신적 내용의 한 사례가 표현되지 못하고 암시되어 있기만 한 그런 상태가 아니다. 낭만적 예술에서는 오히려 정신이 존재하는 그대로, 다시 말해 무한한 정신적 생명, 즉 신으로서 인식되며, 따라서 모든 유한한 감성적 객체성을 초월하여 넘쳐나는 것으로서 인식된다.

뿐만 아니라 헤겔에 따르면 정신의 자기 전개 활동, 즉 그것의 운동, 행위, 갈등은 낭만적 예술에서 잘 드러난다. 헤겔은 낭만적 예술의 전형을 회화, 음악 그리고 시문학(Malerei, Musik und Poesie)에서 발견한다. 반면에 건축은 정신의 내적인 운동 방식을 표현하기에는 가장 부적절하고 오히려 상징적 예술의 전형적인 형식에 해당한다. 조형예술은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고전적 예술의 전형적인 형식인데, 그나마 건축보다는 정신의 내적 운동을 표현하려는 의도에 더 잘 부합한다. 하지만 조각은 외면적인 것, 즉 신체에 집중하므로 정신의 운동과 삶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제한적이다. 이에 비해 시문학에서 매체는 단어, 즉 언어로 표현된 감성적 이미지들이며, 그래서 정신의 운동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이 같은 특수한 유형의 예술 장르들이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전과 같은 건축 에술품은 의인화된 신들을 위한 완벽한 집으로서 오히려 고전적 건축물의 명백한 사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고, 고딕 건축은 낭만적 건축물의 사례로서, 신성한 것이 유한한 것과 질료의 영역을 초월한다는 느낌을 표현한다.

그런데 위의 지문이 주장하듯, 헤겔의 경우 "낭만적 예술"이라는 용어에서 "낭만적", 그리고 그 명사형인 "낭만적인 것"은 일종의 메타 언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적" 또는 "기독교적인 것"(das Christliche), 그리고 "사변철학적" 내지 "사변철학적인 것"의 의미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고 보아 무방하지 싶다. 그러니까 "낭만적인 것"은, 예술에만 국한해 사용되어 예술사의 특정 시기―즉, 고전주의에 이어서 등장한 "낭만주의적 예술"이라는 특정 예술 사조―만을 지시하는 미학적 용어가 아니라는 얘기다. 예술 사조로서의 낭만주의―주로 슐레겔로 대표되는, 감성적인 것이나 상상, 비합리적인 것, 신비한 것, 천재 등을 강조하는 독일 낭만주의―는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고 오히려 추하기까지 할 수 있는 미적 하강의 단계에 멈춰 선 것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헤겔이 보기에는 피히테 철학의 영향을 받아 보편성을 결여한 "유아독존적이고 추상적인 주관주의"를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헤겔은 낭만주의가 그리스 고전적 예술의 특징인 [조각상이 보여주는] 삼차원적 감각에서 탈피하여 회화, 음악, 시 등에서 보듯 탈감성화를 통해 정신적인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고차원적인 정신의 전개 과정에 잘 어울릴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건축은 질료적 소재(물질)에 가장 크게 의존하는 예술이고, 조각은 이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그것에 의존한다. 이에 비해 "회화는 단지 이차원적으로만 물질 세계를 재현하고, 음악은 거의 전적으로 그것을 포기하며, 시는 감각성으로부터 개념적 사유에로의 이행을 특징으로 한다. 고로 시간 속에서의 예술의 진보는 예술의 "물질적 토대가 쇠퇴하는 것과 일치한다". (함머마이스터, 178)] 그러므로 이 후자의 의미에서 "낭만주의적 예술"의 특성은 "낭만적인 것" 그리고 "기독교적인 것"과 동의어로 이해될 수 있고, "사변철학"을 통해 인간 정신이 절대자[절대 정신]를 파악하려는 활동과 대등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헤겔은 모든 기독교적인 예술 작품들의 본질이 회화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보았다.

정신은 자기 자신이 아닌 것으로 나아가야 비로소 다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데(변증법 논리에 따라 움직이므로), 종교에서는 기독교가 이 진리를 보여주고 있으니, 그 교리에 예수의 삶과 죽음(자기 희생) 그리고 부활이 체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실 종교로서 기독교는 계시종교이고, 특히 절대정신[로고스, 절대 이성]이 유한한 세계에 육체를 지닌 하나의 개별자로 외화되어 나타나 인간의 삶과 고통과 죽음을 똑같이 겪고 결국 부활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개별 신들의 조각상에 의존하여 그것을 숭배하는 그리스 신앙[개별 정신에 대한 숭배]보다 우월한 신앙이라고 본다. 다만 그 로고스화가 단 하나의 주체에 일회적으로 국한된다는 점에서 종교 개념의 완전한 실현인 "로고스의 로고스화"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스도라는 "사건"이 시간·공간적 좌표에서 벗어나 인류 공동체의 성령화로, 달리 표현하자면, "그리스도를 통해(durch)" 모든 인간이 신의 자식이 되고, 일자의 일회적인 죽음이 만인에게 언제나 가능한 일이 되어야 비로소 기독교적인 사건, 즉 "기독교적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어차피 종교는 표상[비유적 사고]이라는 미성숙한 정신적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는 헤겔의 애당초 설정을 상기해 본다면, "기독교적인 것"에 일치하는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고 그것이 사변철학적인 것과 동일한 레벨이 될 수 있을지는 선뜻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래서 헤겔 철학 전문가의 아래 설명이 과연 착종된 것처럼 보이는 헤겔적 사고와 관련해 충분한 해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낭만적인 것'이란 외적 대상에 대한 의존성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내면으로 복귀하는 정신의 운동성 자체를 가리키기 때문에, 이 범주에는 예술사조로서의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감성에 대한 정신의 의존성을 원칙적으로 거부하는 반낭만주의적 이성주의도, 나아가 기독교라는 계시종교뿐 아니라, 철학이라는 절대정신의 최종단계까지도 두루 (물론 위계적 질서에 따라) 포함된다."(권대중, 94)

어쨌거나 헤겔의 논리에 따르면, 기독교도 낭만주의도 정신이 자기 인식에 이르는 한 계기로서 나타난 현상이므로 동일한 작동 원리(22-②)의 결과물일 것이나, 그럼에도 양자 모두 완전한 레벨의 정신 활동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헤겔의 정신(이성)은 인식의 주체로서 자기 인식 활동을 통해 자기 완성도를 높여가는 현실성 그 자체이니 인식의 궁극적 대상도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그 인식 활동은 감각(또는 상상)이나 비유적 사고보다는, 논리학에서 주장하듯 자기 자신의 존재 구조에 상응하는 순수 개념적 사고를 통해서만―따라서 예술이나 종교에서보다는 철학에서―그 정점에 이른다고 보아야 한다(23-②). 또 건축(상징적 예술을 대표)과 조각(고전적 예술을 대표)의 한계로서 외면적인 것에의 집중을 거론한 반면, 음악, 시문학과 더불어 회화가 "낭만적인" 예술을 더 잘 대표한다고 했으니, 어쨌든 회화가 내면적 정신성의 표현에 더 충실한 장르라고 본 것이겠다(24-④).



참고 문헌:

G. W. F. Hegel, Ästhetik I & II, redigiert v. F. Bassenge.

M. Schasler, Kritische Geschichte der Aesthetik.

F. Copleston, A History of Philosophy, vol. 7.

카이 함머마이스터(신혜경 역), 독일 미학 전통.

권대중, "헤겔의 반낭만주의적 낭만주의. 그의 체계에서 '낭만적인 것'의 변증법"

김수배, 역사 속의 이성, 이성 안의 역사.

[율사 지망생들에게 이렇게까지 추상적인 내용과 사고가 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긴, 혹시 나중에 정치할 생각이라면 머릿속에 뭐든 하나라도 더 넣어 두어 나쁠 건 없을 것 같다. 사법적 판단이야 AI가 대신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 판단은 또 다른 문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