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5. 소크라테스라는 인물 (P. Hadot, Philosophy as a Way of Life, 1)

Kant 2022. 4. 22. 10:49

<147>

1. 그리스 사상의 여명기에서 현자는 살아있는 구체적인 모델 역할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Protrepticus (Exhortation [훈계, 권고] – 단편들로만 전해짐)의 한 구절이 그 같은 사실을 증언해 준다: “좋은 것들에 대해 현자보다 더 정확한 기준이나 척도가 있겠는가?”

1.1 모델로서의 현자에 관한 내 연구가 점점 소크라테스에게 집중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존재한다. 첫째, 그는 서양 전통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고도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둘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은 유니크한 장점을 제공하는바, 그는 지혜라는 초험적인 이상과 구체적인 인간의 현실 사이를 매개하는 자로 그려지고 있다.

1.2 그가 현자가 아니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로 그려지는 것은 대단히 소크라테스 다운 아이러니의 역설을 보여준다.

 

2. 소크라테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관한 온갖 종류의 어려움을 수반한다.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제공한 설명은 역사적 실존 인간인 그를 변형시키고, 이상화했으며, 왜곡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역사적으로 생존했던 소크라테스를 드러내거나 재구성하지 않겠다. 그 대신 나는 우리 서양의 전통에 영향을 끼친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미지]에 대해 음미해 보고자 한다. 나는 플라톤의 향연, 그리고 두 명의 소크라테스주의자 즉, 키르케고어와 니체의 서술에 한정해 다루어 보겠다.

 

실레노스 [숲의 신이자 술의 신으로 지혜를 상징]

 

1.1 소크라테스는 이상적인 규범과 인간의 현실 사이를 매개하는 자였는데, 이때 매개중간자라는 개념은 평[]형과 중용에 대한 관념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신성한 성격과 인간적 성격을 섬세하게 결합하는 조화로운 인물을 발견하게 되리라 자연스레 예상하게 된다. <148>

 

2.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그는 애매하고, 괴로와하는, 기이할 정도로 당황스러운 인물이었다. 우리를 맨처음 놀라게 하는 것은 그의 신체적인 추함인데, 플라톤, 크세노폰, 아리스토파네스의 기록이 그 증거이다.

 

2.1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추한 존재가 된 최초의 그리스인이라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 그의 모든 면은 과장되었고, 어릿광대처럼 희화되었다”고 적었다. 니체는 계속해서 “게처럼 생긴 눈, 불룩한 입술, 튀어나온 배”를 비웃었고, 관상가였던 조피러스가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내면에 가장 심한 악덕과 욕망을 감춘 괴물이라 칭한 일화를 설명하며 유쾌해 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자신도 “자네는 나를 정말 잘 아는군!”하고 대꾸했을 뿐이라고 적었다.

 

2.11 만약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이 향연에서 묘사한 것처럼 실레노스를 닮았다면, 그와 같은 의심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실레노스들이나 사티로스들은 반인반수의 잡종 괴물들로서 디오니소스의 호위를 맡았던 신화 속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례하고 상스럽게 생긴 어릿광대들이 동시에 사티로스 희곡에서는 합창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장르에서 전해오는 대표작은 에우리피데스의 키클롭스이다.

2.12 실레노스들은 순수하게 자연적인 존재들로서 문화와 문명을 부정하며, 어릿광대짓과 방자한 본능의 편에 선다. 키르케고어는 소크라테스를 땅의 요정(cobold)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플라톤은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외모로는 실레노스를 닮았으나 내면에는 어떤 중요한 것을 숨기고 있는 인물로 이해하게 해주었다. 향연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잘 알려진 연설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조각가의 작업장에서 발견한 실레노스상―그 안에 작은 신상들이 들어 있는―에 비유한다.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거의 괴물 같지만 그것은 마스크이자 겉모습일 뿐이라고 말이다.

 

3.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역설에 직면하는데, 소크라테스는 추할 뿐만 아니라 감추는 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니체는 이렇게 적었다. “그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숨겨져 있고 은닉되어 있으며 비밀스럽다”. 그는 자신에게 마스크를 씌우지만 또 동시에 타인들에 의해 마스크로 사용되기도 한다.

3.1 자신에게 마스크를 씌우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우리는 유명한 아이러니에 직면하는데, 그 의미는 나중에 밝혀질 것이다. 그는 무지하고 무례한 듯 행동했다. 알키비아데스에 따르면 그는 평생 숙맥과 어린애 역할을 자처하며 지냈다. “그의 말을 포장하고 있는 겉싸개의 명사와 동사는 무례한 사티로스의 은신처를 닮았다.” 그의 무지해 보이는 외모와 애정 어린 관심은 “실레노스 조각상을 포장하듯 자신을 포장하기 일쑤였다.”

3.2 소크라테스는 감추는 연기를 잘 소화해서 역사적으로도 분명 자신에게 마스크를 씌우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아무것도 집필하지 않았고, 대화에만 종사했다. 그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는 그를 드러내기보다 감춘다. 그에 대해 언급한 사람들이 그를 언제나 마스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149> 그는 자신에게 마스크를 씌웠기 때문에 그의 뒤에서 숨을 곳을 찾을 필요를 느꼈던 사람들에게 가면(prosopon, 얼굴[마담])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서 자신들에게 마스크를 씌울 생각과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를 그 마스크로 사용할 생각을 얻었다. 우리는 여기서 문학적, 교육학적, 심리학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의미를 지닌 현상을 발견한다.

 

4. 이 현상의 근원적인 핵심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자로서 그는 상대방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 능숙한 질문을 사용했으며, 그 결과 대화 상대자들은 혼란을 겪고 마침내 자신들의 인생 전체를 의문시하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사망하고 난 뒤 그의 대화에 대한 기억은 소크라테스적 표현들[대화, Sokratikoi logoi]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탄생시켰는데, 거기서 소크라테스는 고대 극장에서 가면을 쓴 자(prosopon), 즉 대화자 내지 캐릭터로 등장한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적 대화에 섬세하고 정제된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독자가 마치 소크라테스 자신과 직접 생생한 대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유발하고자 했다. 독자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알지 못한다. 소크라테스의 종잡기 힘들고 불안하게 만드는 가면은 독자의 영혼을 동요하게 만들고 철학적 전향(conversion)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의식을 정점으로 몰고간다. [튜빙엔 대학의 고대문헌학자이자 플라톤 해석 전문가] 콘라드 가이저에 따르면 독자는 소크라테스의 마스크 뒤에서 도피처를 찾도록 초대된다. 거의 모든 대화에는 대화자가 낙심에 의해 압도 당하는 위기의 순간이 등장한다. 그때 그들은 토론을 더 이어갈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게 되며 대화는 중단될 것처럼 보인다. 그 순간 소크라테스의 개입이 이뤄진다. 그는 타자의 의심, 불안, 자기 자신에 관한 낙담을 이어받는다. 소크라테스는 모험적인 대화가 지닌 위험을 떠안으며, 역할을 완전히 교대한다. 만일 기획했던 과제가 실패하면 그 책임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대화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투영된 모습을 보게 해주는데, 이때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불안을 소크라테스에게 전가하고 대화 탐구와 로고스 자체에 대한 확신을 회복하게 된다.

 

4.1 대화편에서 플라톤 역시 소크라테스를 마스크, 또는 니체의 용어를 빌면, “기호학으로 사용한다. [문헌학자] 파울 프리들랜더가 지적하듯, 그리스 문헌에서 “자아” 개념이 등장한지 이미 오래되었으나―헤시오드,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 소피스트들, 심지어 크세노폰까지도 일인칭 표현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플라톤은 대화편에서 자신을 소크라테스 뒤에서 완전하게 지워버렸고 일인칭 단수 사용을 철저히 회피했다. 이는 상당히 미묘한 관계를 보여주지만, 그 의미를 파악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4.11 가이저나 크래머는 플라톤이 두 종류의 가르침을 신중하게 구분했다고 주장한다. 그 자신의 가르침은 구두로 비밀스럽게 아카네미 구성원들에게만 표현했고, <150> 대화편 저서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마스크를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철학하도록 촉구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사용해서 자신의 이론을 어느 정도의 거리두기와 아이러니로 시작했던 것이라고 결론 내려도 될까?

 

5. 어쨌든 이 같은 초기 상황은 서양의 의식세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사상가들은 자신들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것으로 의식하거나 또 그 사실에 겁이 날 때마다 동시대인들을 마주하기 위해 마스크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때 보통 그들은 소크라테스처럼 아이러니라는 마스크를 선택했다.

5.1 18세기에 하만(Johann Georg Hamann, 1730–1788)이 자신의 소크라테스적 기억[소크라테스 회상록]에서 소크라테스를 칭찬했을 때 그는 연극적인(mimike) 방식을 사용했다. 다시 말해 하만 자신이 소크라테스―18세기의 시각에서 보아 탁월한 합리주의자―라는 마스크를 사용해 독자들이 그 마스크 뒤에서 그리스도의 예언자를 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5.2 하만에게 임시방편에 불과했던 것이 키르케고어에게서는 근본적인 실존적 태도가 되었다. 마스크에 대한 그의 애호는 그의 가명 사용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의 작품들 대부분은 가명으로 출판되었다. 빅터 에레미타, 요하네스 클리마쿠스 등. 여기서 우리가 편집 작업에 관한 변덕스러움을 다루지는 않겠다. 그는 이 모든 가명들에게 그 각각에 상응하는 상이한 차원들―심미적, 윤리적, 종교적―을 연결시켰다. 그는 기독교와 심미주의자, 그 다음으로 도덕주의자를 연결시켰는데, 이는 동시대인들에게 그들 자신이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의식을 갖도록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가장 깊이 믿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예술가나 어정쩡한 도덕주의자라는 마스크 뒤에 숨는다.”

5.21 키르케고어 자신도 자신의 방법이 소크라테스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완벽히 의식하고 있었다: “작가로서의 나의 활동 전체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면, 심미적인 작품은 하나의 기만이다. 그리고 거기에 가명 사용에 관한 더 깊은 의미가 놓여 있다. 그러나 기만 자체는 추한 것 아닌가?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기만’이라는 말에 의해 기만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진리를 위해 어떤 사람을 기만할 수 있고, (옛 소크라테스를 떠올려 보면) 진리 안으로 들어가도록 기만할 수도 있다. 정말로 이런 수단을 통해서만, 즉 기만함에 의해서만 환각 속에 있는 자를 진리로 불러오는 일이 가능하다.”

5.22 키르케고어의 목표는 독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데 있었지만, 그들을 직접 반박하기보다는 그들의 부조리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함에 의해서 그렇게 만들고자 했다. 이것은 대단히 소크라테스적인 것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 안에 들어있는 상이한 성격들이 모두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가명을 사용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다양한 자아들을 하나도 인식하지 않으면서 객관화시켰는데, 이는 소크라테스의 절묘한 질문을 통해 대화 상대자들이 자신들의 자아를 객관화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대화 상대자들 역시 대화 속의 자아들 중 어떤 것도 자신의 것으로 인지하지 못했었다.<151>

 

5.3 키르케고어는 이렇게 적었다: “나의 침울함 때문에[덕분에!] 나는 수년 전에 나 자신을 ‘당신’으로 부를 수 있었다. 나의 침울함과 나의 ‘당신’ 사이에는 환상의 세계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세계를 가명들 속에서 다 소진시켜버렸다.” 하지만 키르케고어는 자신에게 마스크를 씌우는 일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진짜 마스크는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 그 자체, 소크라테스 자신이었다. “오, 소크라테스여! 당신과 난 똑같은 모험을 하고 있구려! 나는 혼자다. 내 유일한 비유는 소크라테스뿐이다. 나의 마스크는 소크라테스의 그것이다.”

 

6. 그는 이 방법을 “간접적 의사소통의 방법”이라고 불렀는데 우리는 이것을 니체에게서도 재차 발견한다. 니체는 그것을 위대한 교육자의 방법이라 여겼다. “교육자는 결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늘 그가 교육하고 있는 자들의 요구에 관한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을 말한다. 그는 이 같은 위장술이 탄로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6.1 이 방법은 교육자가 지닌 초험적 과제에 의해 정당화된다. “모든 심오한 영성은 마스크를 필요로 한다. 모든 심오한 영성의 주변에서는 마스크가 계속 성장하는데, 이는 그릇된 해석 때문이다. 즉, 인생에 대한 그의 모든 말, 걸음걸이, 현시 등에 대한 그릇된 해석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레노스라는 소크라테스적 가면은 니체의 마스크 이론에 모델을 제공했다. 생애 마지막 시기에 쓴 글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마법이라고 믿는다: 그는 하나의 영혼을 지녔고 그 뒤에 다른 영혼을 지녔으며 다시 그 뒤에 또 다른 영혼을 지녔었다. 첫째 영혼은 크세노폰이 잠을 자기 위해 내려놓은 것이었고, 둘째 것은 플라톤이, 셋째 것도 다시 플라톤이, 그러나 이번엔 플라톤이 자신의 둘째 영혼과 더불어 내려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플라톤 자신도 전면에 보이는 용모 뒤에 숨겨진 동굴을 여러 개 가진 자였다.”

 

6.2 키르케고어와 마찬가지로 니체에게도 마스크는 교육학적으로 필요했지만, 또한 심리학적으로도 그랬다. 니체 본인도 자신이 “타자를 통해 오직 빛나보이기를 원하는 인간들”이라 칭했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여기에 많은 지혜가 존재한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자신이 반시대적 고찰을 집필하면서 자신의 스승들인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마스크로 사용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마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기호학”으로 사용했던 것처럼.

 

6.21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관계에 비견할만한 관계가 니체에게서도 분명히 존재한다. 니체는 이상적인 쇼펜하우어와 이상적인 바그너에 대해 말했는데, 실제로는 니체 자신이 그들이었다. 독문학자 에른스트 베르트람이 설득력 있게 주장하듯, 니체의 가면들 중 하나는 분명 소크라테스다. 니체는 애정 어린 증오로 소크라테스를 쫓아다녔는데, 그 증오는 그가 자신에 대해 느꼈던 것과 동일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는 똑같은 소크라테스가 “나와 너무 가까워서 나는 거의 항상 그와 싸우는 중이다”라고 말했다. 니체가 미워한 소크라테스의 면모는, 신화를 해체하고 선악에 대한 지식으로 신들을 대체시킨 니체의 그것과 동일하다. 인간의 마음을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것들에게로 되돌려놓은 바로 그 니체인 것이다. 니체가 사랑하고 시기한 소크라테스의 면모는 <152> 그 자신이 되고 싶어했던 모습이었다: 영혼을 유혹하는 자, 교육하는 자, 그리고 안내하는 자 말이다. 이 애정 어린 증오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