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5. 소크라테스라는 인물 (P. Hadot, Philosophy as a Way of Life, 2)

Kant 2022. 5. 12. 19:16

소크라테스의 가면은 아이러니라는 가면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테오프라스토스가 eironeia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원문을 검토해보면, 아이러니란 개인이 실제보다 열등하게 보이기 위해 자기비하를 사용하는 심리적 태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은 대화 상대방이 옳다고 인정하는 척하면서 상대방의 관점을 채택하는 담론 기술 내지 용법의 한 형태다.

 

에이로네이아는 청중이 상대방의 입에서 나오기를 기대하는 말이나 연설을 사용하는 수사적 표현으로 이루어진다. 확실히 소크라테스식 아이러니는 이 같은 형식을 취한다. 키케로의 말을 빌리자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비하함으로써 자신이 반박하고 싶어한 적들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양보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인들이 '아이러니'라고 부르는 일종의 시치미 떼기를 즐겨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식 아이러니는 자신이 완전히 평범하고 천박한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는 꾸며댄 자기비하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연설은 가운데를 열어젖힌 실레누스[조각상]들처럼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처음 들으면 당신은 그것이 완전히 우스꽝스럽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허튼소리꾼, 대장장이, 구두장이, 무두장이에 대해 이야기하며, 항상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의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고 이해가 별로 빠르지 못한 사람은 자연스레 그것을 말도 안 되는 허튼소리로 받아들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토론했던 주제를 평범하게 만든 데에 대한 책임이 있는데, 그의 대화자들 역시 평범한 자들이었다. 그는 시장, 체육관, 예술가들의 작업장, 그리고 가게에서 청중을 찾았고 또 발견했다. 그는 거리에 속한 사람이었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평범성이란 우월한 영혼이 쓸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가면이다."

소크라테스는 대화하고 토론했지만, 스승으로 간주되기를 거부했다. 에픽테토스는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보러 와서는 자신들한테 다른 철학자들을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가 흔쾌히 응했고,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쳐버리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식 아이러니의 핵심에 접촉한다: 소크라테스가 가르침을 베풀거나 스승으로 여겨지는 것을 거절했다면, 그건 그가 자주 선언했듯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할 말이나 소통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할 말이 없었고, 변호할 주제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던 것은, 자신은 답하기를 거부하면서도 질문하는 것뿐이었다. 국가의 첫 권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이렇게 외친다:

“오, 이런! 여기 소크라테스 당신의 그 유명한 시침떼기가 또 등장하는군요. 그런데 난 그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어요. 당신은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이라도 하면, 대답하기보다는 거절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속내를 숨기려 할 것이라고 예상했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상황을 훨씬 더 명확하게 묘사했다: "보통 소크라테스는 질문하되 대답하지는 않았다―그는 자신이 모른다고 고백하곤 했다."

 

물론 우리는 아테네인들과 소크라테스의 논의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플라톤의 대화편, 심지어 가장 "소크라테스적인" 대화편조차도 그 실제 논의들을 이중으로 약하게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원래 그것들은 구어가 아니라 쓰여진 것이고, 헤겔이 언급했듯, "인쇄된 대화에서는 저자들이 대답들을 전적으로 통제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실제 삶에서도 거기 씌여진 대로 대답했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

 

여기서 우리의 과제는 플라톤이 보고한 대화 속에서 정말 "소크라테스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을 구별해 내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전통적으로 알려진 소크라테스식 아이러니의 중요성과 그것에 상응하는 의식의 운동을 드러내는 데 관심이 있다.

 

오토 아펠트에 따르면, …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둘로 나누었는데, 한 명은 토론이 어떻게 끝날지 미리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고, 다른 하나는 대화자와 변증법적인 전체 여정을 함께 떠나는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은 소크라테스가 그들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모르는바, 바로 거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자들과 함께 길을 가며 끊임없이 그들이 완전히 동의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대화 상대방의 입장을 그 사람의 출발점으로 삼고, 점점 그 입장이 가져올 모든 결과를 인정하게 만든다. …

끊임없이 동의를 요구함으로써, 소크라테스는 그의 대화자로 하여금 자신의 초기 입장이 모순적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고, 그들의 공동 과업을 객관화한다. 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는 대화자에게 친숙한 활동을 토론 주제로 선택하고, 그와 함께 이 활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실천적 지식을 정의하려고 한다.

예컨대 장군은 용감하게 싸우는 법을 알아야 하고, 예언자는 신들에게 경건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그 여정의 끝에서 장군은 용기가 진정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예언자는 경건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대화자는 자신이 실제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돌연 대화자의 모든 가치 체계는 근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까지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과 말하는 방식을 자신에게 그것을 지시한 가치 체계와 어느 정도 동일시해왔으나 이제부터는 그것에 반대하게 된다.

 

따라서 대화자 역시 둘로 나뉜다: 소크라테스와 대화하기 이전 상태와 같은 대화자가 있고, 그들의 지속적인 상호 합의 과정에서 자신을 소크라테스와 동일시하고 또 그 이후로 다시는 이전과 똑같지 않을 대화자가 있다.

 

이 아이러니컬한 방법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점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대화자가 함께 하는 여정이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자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하는 척하는데 이것이 그의 아이러니한 자기비하다. 그러나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대화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 자의 담론에 완전히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소크라테스의 담론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려 들어가 그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 자는 바로 대화자 자신이다.

 

여기서 꼭 기억하자: 자신을 소크라테스와 동일시한다는 것은, 자신을 아포리아 그리고 의심과 동일시하는 것을 뜻한다. 소크라테스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기 때문에, 토론이 끝날 때, 대화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실제로 대화자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도 대화자는 토론하는 동안 마음의 진정한 활동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좋은 점은, [그 대화자] 자신이 소크라테스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소크라테스는 심문하고, 질문하며, 또 자기 자신을 살펴보기 위해 한발 물러나 있는 것; 한 마디로 그는 의식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 산파술의 심오한 의미다. …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마음의 산파이며, 그가 관여하는 일은 마음의 출산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그는 단지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를 낳도록 도울 뿐이다. 키르케고어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

 

"교사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이 이러저러하다고 확언하거나 그저 강의하는 것 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니, 올바른 의미에서 교사가 된다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 가르침은, 교사인 당신이 학습자에게서 배울 때, 또 당신이 그 학습자가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가 이해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끔 당신 자신을 그의 위치에 놓을 때 시작된다."

 

"스승은 제자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인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는 스승이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다. 제자가 죽을 때, 스승이 제자의 영혼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제자도 스승의 영혼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가질 수 없다. … 소크라테스를 이해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우리가 그에게 어떤 것도 빚지지 않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선호했던 것이고, 그가 이것을 선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좋은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불가사의한 선언, 즉 "나는 오직 한 가지만 알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가 의미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에 다가선 셈이다.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전달 가능한 아무런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자신의 마음에서 다른 이들의 마음으로 생각을 전달할 수도 없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친애하는 아가톤이여, ... 나는 그저 지혜라는 것이 가득 찬 그릇에서 빈 그릇으로 흘러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록에서 히피아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정의에 대해 항상 질문만 하지 말고 정의가 무엇인지 단 한 번만이라도 간단히 답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만약 내가 말로 정의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밝히지 않는다면, 나는 내 행동으로 그렇게 하겠네"라고 답한다.

 

분명 소크라테스는 말과 대화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똑같은 열정으로 그는 우리에게 언어의 한계를 보여주고자 애썼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한 것은, 우리가 정의롭게 살지 않으면 결코 정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진정한 실재가 그렇듯 정의는 정의하기 힘들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대화자에게 정의롭게 "살 것을" 촉구하기 위해 이해시키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대화 담론에서 질문은 개인적인 질문으로 이어지는데, 개인은 그가 자신의 양심과 이성에 따라 살기를 다짐할지 말지를 결단해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 중 한 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쉽게 논쟁에 휘말립니다. 그 사람이 어떤 주제로 시작하든 계속해서 소크라테스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마침내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삶에 대해 전부 설명해야 하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말이죠."

따라서 개인은 자신의 행동의 가장 근본적인 기반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스스로 자신에게 표현하고 있는 삶의 문제를 인식하게 된다. 결국 모든 가치는 전도되고, 이전에 그것에 부여되었던 중요성도 마찬가지다. 플라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일: 돈벌이, 재산 관리, 장군직책, 공개 토론에서의 성공, 행정관, 당파연합, 그리고 정치적 파벌 형성 ... 나는 그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 각자가 가장 큰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길을 택했다. 당신들이 가진 것보다는 당신들이 누구인지를 걱정하도록 설득하려 함으로써 당신들 각자가 자신을 가능한 한 훌륭하고 합리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요."

 

소크라테스의 기획은 개인에게 호소한다는 점에서 실존적이다. 이것이 니체와 키르케고어가 각각 나름대로 그것을 반복해서 따라하려 했던 이유다. 니체는 다음 글에서 동시대 사람들의 한 가운데에서 고립된 "쇼펜하우어적 인간"을 묘사하고 있는데, 독자는 "너 자신을 돌보라"는 소크라테스의 끊임없는 호소, 그리고 개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끊임없는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동료들은 젊은이들, 노인들, 아버지들, 시민들, 사제들, 관리들, 상인들 할 것없이 모두 백 가지 가장무도회를 으스대며 거닐면서 오로지 자신들의 희극에만 신경을 쓰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떤 목표를 향해 사십니까?'라는 질문에 그들은 모두 재빨리 자랑스럽게 대답할 것이다: “훌륭한 시민, 학자, 정치가가 되겠소!”

 

"인간의 모든 제도의 목표는 생각을 산만하게 분산시켜서 삶에 대한 의식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서두름은 보편적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플라톤의 향연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는 내가 많은 면에서 부족함에도 계속 나 자신을 돌보는 대신 아테네인들의 일[공직]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도록 만든다"고 말했다.

이 표현에서 우리는 그러한 가치관의 전복과 삶에 대한 지도적 규범의 전복이 가져올 정치적 결과를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의 개인적 운명에 대한 우려는 국가와의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죽음이 지닌 가장 깊은 의미다. ...

 

키르케고어에게 소크라테스의 장점은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의 의미를 망각한 사변적 철학자가 아니라 실존하는 사상가였다는 점이다. 키르케고어의 실존의 근본 범주는 실존적 책임의 고독 속에 고립된 개인, 즉 유일무이한 개인이다. 키르케고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가 그것의 발견자였다.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에 관한 가장 심오한 이유들 중 하나를 발견한다: 직접적인 언어는 실존의 경험, 존재의 진정한 의식,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의 진지함, 또는 의사결정의 고독함을 전달하기에 부적절하다.

말한다는 것은 진부함(banality)과 관련해 이중으로 저주받게 되어 있다. 일단 실존적 경험에 대한 직접적인 의사소통은 있을 수 없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언어 행위는 "비정상"이다. 둘째, 그럼에도 아이러니의 형태가 간접적인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까닭은 이 같은 진부함 때문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심오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아이러니는 무엇보다 그가 일단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기 위해 반드시 천박한 척 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실존적 사상가에게 진부함과 피상성[천박함]은 필수적 요소다. 실존주의자는 비록 동료 인간들이 적절한 의식 수준보다 낮은 상태에 있더라도 그들과 계속 접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교육학적인 전략과도 관계가 있다. 아이러니의 우회 방식 그리고 아포리아의 충격은 독자가 실존적 의식의 심각성에 도달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

 

소크라테스는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줄곧 그의 철학은 영성 훈련, 새로운 삶의 방식에로의 초대, 능동적인 성찰과 살아있는 의식이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공식, 즉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에는 더 깊은 의미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출발 지점, 즉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현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사실로 돌아가 보자. 개인적으로 그의 양심은 완벽하지 않고 불완전하다는 느낌에 의해 분발되고 자극되었다.

 

이 점에서 키르케고어는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키르케고어는 오직 한 가지, 즉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가 매우 확신했던 것은 이렇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진정한 개인적, 실존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것은 자아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결단으로 그리스도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화는 너무도 어렵기 때문에 누구든 진정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유일한 진짜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였다. 어쨌든 적어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최고의 기독교인은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만큼 자기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의식하는 자다.

 

모든 실존적 의식과 마찬가지로 키르케고어의 의식도 나뉘었다. 그것은 오직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식 속에서만 존재했다. 키르케고어의 의식은 소크라테스의 의식과 동일하다.

 

"소크라테스여, 당신은 당신의 무지를 수단으로 삼아 다른 사람들이 심지어 당신보다 더 현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드러내도록 만드는 저주받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소. 그들은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지요. 당신의 모험은 나의 것과 같구려. 사람들은 내가 그들이 심지어 나보다 덜 기독교적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내게 격분하게 되지요; 기독교를 너무도 경외하기에 나는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인정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의식 또한 찢어지고 나뉘어 진다. 그리스도의 형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자의 형상에 대한 초월적인 기준에 의해서 말이다.

 

정의란 우리가 보았듯이 정의될 수 없다. 정의롭게 살아야만 한다. 세상의 모든 인간 담론은 정의롭고자 하는 한 인간의 결단이 지닌 깊이를 결코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결정은 또한 취약하고 불안정하다.

 

어떤 인간이 특정한 행동의 맥락 속에서 정의롭기를 선택했을 때, 그는 그 정의라는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정의로울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암시를 발견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완전히 정의로운 존재는 현자(sage)이겠으나 지혜로운 사람(sophos, wise man)은 아니며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지혜를 욕구하는 사람, 즉 애지자(philo-sophos)다. ...

 

키르케고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한에 있어서만 기독교인이었던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는 한에 있어서만 현자였다. 부족함에 대한 이 같은 인식에서 엄청난 욕구가 생겨나고, 이것이 바로 서양 의식의 역사에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영원한 방랑자로서 에로스적 특징을 지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