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5. 소크라테스라는 인물 (P. Hadot, Philosophy as a Way of Life, 3)

Kant 2022. 5. 14. 18:13

Eros

소크라테스는 서양 사상의 역사에서 최초의 개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베르너 예거의 지적, 즉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에 관한 자신들의 글에서 소크라테스의 문학적 초상화를 스케치하면서 독자들이 소크라테스의 독창성과 독특함을 느낄 수 있게 하고자 노력했다는 지적은 옳았다.

그들은 확실히 소크라테스가 누구와도 비교 불가능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특별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고 그러한 작업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같은 사실은 키르케고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 플라톤이 사용한 말뭉치에서 자주 반복되는 '아토포스'(atopos, 특정 범주에 한정되지 않는 것), '아토피아'(atopia, 규정할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는 것), '아토포타토스'(atopotatos, atopos의 최상급)라는 표현에 의해 잘 설명된다.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그들은 내가 아토포타토스이고,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포리아라고 말한다.” 어원적으로, 아토포스는 “제자리에 있지 않은”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상하고, 과장되고, 터무니없고, 분류할 수 없으며, 당황스럽다는 뜻이다. 향연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연설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계급이 있고, 개개인에 상응하는 이상적인, [분류 가능한] 유형이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고대 호메로스의 아킬레우스와 당대[알키비아데스 시대]의 인물로 스파르타의 지도자 브라지다스(Brasidas)로 대표되는 “위대한 장군, 고귀하고 용기 있는” 인물 유형이 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인 네스토르(Nestor)와 트로이아인 안테노르(Antenor), 그리고 동시대의 페리클레스(Pericles)가 대표했던 "영리하고 웅변적인 정치가"의 유형이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어떤 범주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알키비아데스는 그가 어떤 사람과도 비교될 수 없고 다만 실레노스들이나 사티로스에 비견될 뿐이라고 결론 내린다.

소크라테스는 실로 개인이었다. 마치 키르케고어가 “그는 단지 개인이었다”라는 비문을 갖고 싶다고 했을 때, 그가 그렇게나 소중하게 여겼던 바로 그 개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 어느 누구와도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제 그가 에로스라는 신화적 캐릭터를 지녔다는 사실을 보게될 것이다.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에 투영된 에로스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적 아이러니는 변증법적인 아이러니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후자에 의해 야기된 것과 매우 유사한, 상황의 반전을 초래한다. 분명히 해둘 점은, 여기서 문제가 되는 사랑은 동성애적인 사랑인데,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교육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에 동성애적인 것일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 시대의 그리스에서 남성적인 사랑은 귀족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과 남성미 넘치는 우정의 틀 안에서, 그리고 나이 든 남성의 지도 아래 귀족 청년을 훈련했던 고대 전사 교육의 잔재였다. 소피스트 시대에는 그러한 도제식 관계가 고대의 관계를 모델로 이루어졌고, 에로스적 용어로 자주 표현되었다. 물론 우리는 수사학과 문학적 허구가 이런 식의 표현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적인 아이러니는, 아이러니가 불러온 반전으로 인해 그가 애정적으로 관심을 가진 대상이 [오히려] 그를 사랑하게 될 때까지 사랑하는 척 연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연설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했던 수많은 사랑 선언의 진정성을 믿고 그를 유혹하기 위해 어느 날 밤 소크라테스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함께 침대로 들어가 그를 팔로 감쌌다. 그러나 매우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고 전혀 유혹되지 않았다. “그때부터죠”, 알키비아데스는 말한다.

“나는 노예로 전락한 사람이고, 나는 독사에게 물린 사람의 상태에 있습니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에 의해 심장 또는 마음을, 혹은 당신이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것을 물린겁니다. … 그가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나는 넋을 잃고 어떤 코리반트(Corybant, 대지의 여신 Cybele의 시종)보다도 더 심한 일종의 성스러운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제 심장은 제 입으로 뛰어 들고 제 눈에서는 눈물이 나기 시작합니다. … 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카르미데스, 에우튀데모스, 그리고 더 여럿이 있어요. 소크라테스는 마치 자신이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인 것처럼 그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키르케고어 다음 표현보다 더 나은 해설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가 젊은이들을 속이고 결코 만족시키지 못한 갈망을 일깨웠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유혹하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 소크라테스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대신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고 보고한 알키비아데스를 속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는 그들 모두를 속였다. … 그는 젊은이들을 유혹하였으나 그들이 그를 우러러보고, 그들이 그에게서 쉴 곳을 찾았을 때, 그들이 그의 사랑 안에 안식처를 찾고, 그들이 스스로 존재하기를 멈추고 오직 그에게 사랑받으며 살았을 때, 그는 사라져 버렸고, 마법은 끝났다. 그들은 짝사랑의 깊은 고통, 그리고 속았다고 느꼈는데, 소크라테스가 그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소크라테스를 사랑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적인 아이러니는 사랑에 빠진 척하는 데 있었다. 변증술적인 아이러니에서,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진정한 소원은 대화자가 그의 지식이나 지혜를 소크라테스 자신에게 전해주는 것인양 행동했다.

그러나 사실 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게임은, 대화자가 소크라테스의 무지를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결과를 낳았다. 왜냐하면 사실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줄 지혜도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야 그 대화자가 정말로 원하게 되었던 것은 소크라테스의 학교, 즉 아무 것도 모른다는 의식을 배우는 학교에 등록하는 일이었다.

에로스적인 아이러니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척한 애인이, 지식이 아니라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소크라테스에게 나눠주기를 바라는 체하며 정욕에 관한 선언을 사용했다. 이러한 상황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젊은이들은 매력적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경우 사랑받는 사람, 혹은 사랑받는 것으로 상정된 사람은,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통해 결국 자신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에 그의 사랑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결점을 발견하자마자 사랑받는 사람은 소크라테스와 사랑에 빠져든다.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하게 된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다―소크라테스는 어떤 아름다움도 가지지 않았다―오히려 그 자는 향연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정의에 따르면, 사랑과, 즉 우리 모두가 결여하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인 사랑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사랑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향연의 의미다. 이 대화편 전체는 독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여러 모습들과 에로스 사이의 유사점을 추측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플라톤은 손님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서 에로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순서에 따라 파이드로스와 파우사니아스, 의사 에리시마코스,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극 시인 아리스톤의 연설이 이어진다. 소크라테스의 차례가 왔을 때, 그는 사랑을 찬양하는 직설적인 연설을 하지 않는데, 이는 그것이 자신의 방법에 대립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에로스의 탄생 신화를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만티네이아 출신의 여사제 디오티마(Diotima)와 과거에 나누었던 대화를 소개한다. 이론적으로는 그때 알키비아데스가 갑자기 연회장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대화는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제비꽃과 담쟁이덩굴잎으로 만든 왕관을 쓰고 다소 취한 알키비아데스는 연회의 규칙에는 따르지만 에로스를 찬양하는 대신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게 된다.

향연에서 이루어지는 소크라테스와 에로스의 동일시는 몇 가지 방식들로 강조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연설이 에로스를 찬양하며 행해진 일련의 연설들 가운데 하나로 행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디오티마가 묘사한 에로스의 초상화와 알키비아데스가 제시한 소크라테스의 초상화 사이에도 중요한 공통점이 여러 개 있다.

디오티마는 신들이 아프로디테(Aphrodite)의 생일에 연회를 열었다고 말한다. 페니아(Penia), 즉 “가난함” 또는 “궁핍”은 식사가 끝날 때 구걸하러 왔다. 그곳에서 그녀는 “수단”, “변통”, 또는 “재물”인 포로스(Poros)가 과즙에 취해 제우스의 정원에서 잠든 모습을 보게 된다. 페니아는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포로스의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고, 그가 잠든 사이 옆에 누워 에로스를 임신한다.

에로스의 계보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디오티마가 그를 아주 미묘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다양한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신화의 설명을 말 그대로 따르면, 우리는 에로스 안에서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특징을 모두 인식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 쪽에서는 현명하고, 창의적인 정신(그리스어로 에우포리아 eurporia)을 얻는다. 어머니로부터는 가난에 찌든 거지 상태, 아포리아(aporia)를 물려받는다. 이런 묘사의 배경에서 우리는 아주 특별한 사랑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손님들은 에로스를 이상화된 방식으로 묘사했던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사랑에 대한 시각에 약간의 사실주의를 도입하기 위해 디오티마와의 대화를 소개한 것이다. 나머지 손님들이 가정했던 것과는 반대로 소크라테스는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아름다운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에로스는 근본적으로 욕구이며, 욕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그러므로 아름다울 수 없다. 페니아의 아들로서 그는 아름다움을 결여하지만, 포로스의 아들로서 그는 자신의 결핍을 치유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이 점에서] 아가톤은 사랑을 사랑의 대상인 사랑하는 사람과 혼동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사랑은 사랑하는 자(a lover)다. 그러므로 사랑은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신이 아니라 단지 다이몬일뿐이며, 인간과 신 사이의 중간 존재다.

이것이 디오티마의 에로스 묘사에 희극적인 면이 있는 이유다. 거기에서 우리는 사랑이 우리를 거지 같은 존재로 저주할 수 있다는 점을 감지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랑하는 자들은 군인처럼 행동한다”(Militat omnis amans)라는 친숙한 주제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문간에서 보초를 서거나 또는 땅 바닥에서 잠자면서 밤을 보낸다. 에로스는 거지, 군인이며 또 발명가, 마법사, 마술사, 그리고 영리한 화술가다. 왜냐하면 사랑은 에로스를 기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에게 삶은 사랑이 성공하느냐 패배하느냐에 따라 계기적으로 나타나는 좌절과 희망, 필요와 만족의 멈출 줄 모르는 모음곡이다.

이것이 에로스가 지닌 무익하고, 뻔뻔하고, 고집불통이고, 시끄럽고, 야만적이고, 괴물적인 측면이다. 그의 악행은 그리스 시에서부터 비잔티움 시대에 이르기까지 아주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놀라운 기술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자”적 특성들을 사냥꾼 에로스의 형상으로 묘사한다. 아가톤은 에로스가 섬세하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디오티마는 에로스가 현실에서 항상 가난하고, 거칠고, 더러웠으며 맨발로 다녔다고 단정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알키비아데스도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그의 연설에서 소크라테스가 겨울 추위만을 가까스로 막아주는 거친 외투만 걸친 맨발 상태로 다녔다고 묘사한다.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향연 장소에 오기 전에 예외적으로 목욕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희극 시인들 역시 소크라테스의 맨발과 낡은 망토를 제물 삼아 그를 크게 비웃었다.

소크라테스의 거지 에로스 같은 모습은 나중에 견유학파의 철학자들, 특히 디오게네스(Diogenes)로 이어졌다. 자신을 “분개한 소크라테스”로 자칭하는 듯한 디오게네스는 난로와 집을 버리고 망토와 배낭만 든 채 떠돌아 다녔다. 프리들렌더(Friedländer)가 지적했듯이, 맨발의 에로스는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스(Protagoras)(321c5)와 정치가(the Stateman)(272a5)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원시인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문화와 문명보다는 원시적 야만의 힘을 가진 순수한 자연적 존재인 실레노스(Silenus)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요소가 소크라테스/에로스의 복합적인 초상화에 끼어든다는 사실은 무관심할 문제가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의식이 가져온 가치의 전도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자신의 영혼을 염려하는 사람에게 필수적인 것은 외모, , 또는 편안함이 아니라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오티마는 에로스가 그의 아버지로부터도 몇 가지 특징들을 물려받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상한 영혼들에 덫을 놓는다. 왜냐하면 그는 대범하고, 고집이 세며 인내심이 넘치기 때문이다. 그는 위험한 사냥꾼으로서 항상 어떤 속임수를 고안해 낸다; 영리함을 쫓는 그의 탐욕은 자원들로 넘쳐나며 늘 어떤 계략을 생각해 낸다. 그는 끔찍한 마법사, 마술사, 그리고 소피스트다.” 우리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구름들(Clouds)에서 스트렙시아데스(Strepsiades)가 소크라테스식 교육을 받은 후에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묘사하는 장면을 아주 잘 경청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담하고, 말솜씨 좋고, 용감하고 그리고 고집쎈 … 결코 말문이 막히지 않는 진짜 여우”. 소크라테스를 칭송하는 연설에서 알키비아데스는 그를 염치없는 실레노스라고 불렀고, 아가톤은 소크라테스에게 잡종(hybristes)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알키비아데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마술사이고 말을 잘하며 예쁜 소년들을 유혹하는 데 능숙하다.

에로스의 강인함은 알키비아데스가 군사작전 중인 소크라테스를 묘사한 초상화에서 다시 한번 부각된다. 알키비아데스는 그가 추위, 배고픔, 그리고 두려움을 참을 수 있었고 오랜 시간의 명상을 견뎌냈을뿐만 아니라 포도주를 아무리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델리온(Delion)에서 후퇴할 때 마치 아테네 거리에 있는 것처럼 침착하게 걸었다고 전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당시를 묘사하며, 소크라테스가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이리저리 살피면서 맨발로 엄숙하게 걸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에로스에 대한 이러한 인물 묘사가 아첨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적인 아이러니는 아닐지 몰라도 플라톤적인 아이러니는 확실하게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이미지에는 심오한 심리적인 진실이 담겨 있다.

디오티마는 에로스가 다이몬이라고 말한다. 즉, 에로스는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간적 존재다. 다시 한번 우리는 중간적 상태가 갖는 문제를 고려하도록 강요당하며, 다시 한번 그 상황이 얼마나 불편한지를 깨닫는다. 디오티마가 묘사하듯이, 다이몬, 즉 에로스는 정의할 수도 분류할 수도 없다. 그도 역시 소크라테스처럼 아토포스하다. 그는 신도 사람도 아니고,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았으며, 현명하지도 어리석지도 않고, 선하지도 사악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이 잘생기지도 현명하지도 않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욕구를 체현한다. 이것이 그가 철학자, 즉 애-지자(a philo-sopher)인 이유이다. 다시 말해, 그는 신적인 완벽함을 지닌 존재의 수준에 이르기를 원한다. 그래서 디오티마의 묘사에 따르면, 에로스는 자기 자신의 완벽함, 말하자면, 자신의 참된 자아에 대한 욕구다. 그는 존재의 충만함을 빼앗기는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다른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로스와 사랑에 빠질 때면, 즉, 그들이 소크라테스가 그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바와 같은 사랑과 사랑에 빠질 때면, 그들이 소크라테스에게서 사랑한 것은 아름다움 그리고 존재의 완벽함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그것들에 대한 그의 열망이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서 자신들의 완벽함을 향한 길을 발견한다.

에로스는 소크라테스처럼 단지 하나의 소명이고 가능성일 뿐이다. 에로스는 지혜나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니다. 물론 만약 누군가가 알키비아데스가 말한 조그마한 실레노스들(Sileni)을 연다면, 그 내부가 신의 조각상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실레니 자신들은 조각상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한 사람이 그것들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열릴 뿐이다. 에로스의 아버지인 포로스의 어원적 의미는 “접근 수단” 또는 “탈출구”다. 소크라테스는 단지 실레노스일 뿐이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개방되어 있을 뿐이다.

이 철학자는 또 존재[실존]에 대한 호출(a summons)과도 다르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내용을 잘생긴 알키비아데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약 자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자네가 내 안에서 자네의 신체적인 아름다움을 닮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일 것일세. … 그러나 나에 관해서나 진정으로 아무것도 아닌 나의 것과 관련해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문제를 더 신중히 고려하게.” 소크라테스를 사랑할 때, 그는 정말 에로스만 사랑할 뿐이다. 아프로디테의 아들이 아니라, 포로스와 페니아의 아들말이다. 사랑하게 되는 원인은 소크라테스가 모든 지상의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비범한 아름다움을 향한 길을 그 자에게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미덕들아이러니컬한 실레노스 안에 숨겨진 신들의 조각상들은 알키비아데스가 아주 동경해 마지않던 것인데, 소크라테스가 욕구하고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통하여 욕구했던, 완벽한 지혜에 대한 성찰과 맛보기(foretaste)일 뿐이다.

소크라테스적 에로스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와 동일한 기본 구조를 발견한다. 그것은 분리된 의식으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어떤 것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열정적인 의식이다. 분리와 부족에 관한 이러한 감정들로부터 사랑이 탄생한다.

플라톤의 가장 위대한 장점 중 하나는 그가 소크라테스/에로스의 신화를 통해 철학적인 삶에 사랑의 차원, 즉 욕구와 비합리적인 것의 차원을 도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것을 이루어 냈다. 첫째, 두 대화자가 대화 과정 자체를 통해 함께 문제를 명확히 하려는 열정적인 의지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로고스의 변증법적인 움직임과는 별개로 소크라테스와 그의 대화 상대자가 함께 여행하는 길 그리고 합의에 이르고자 하는 그들의 공통 의지는 이미 일종의 사랑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와 같은 영성 훈련에는 철학적 체계의 구조물보다 훨씬 더 많은 철학이 들어 있다. 대화의 과제는 본질적으로 언어의 한계 그리고 도덕적이고 실존적인 경험을 소통하지 못하는 능력을 지적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대화 자체는 사건과 영성 활동을 통해 이미 도덕적이고 실존적인 경험을 구성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고독하고 정교한 하나의 체계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만 도달 가능한 존재의 수준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고 그것에 접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치 아이러니컬한 소크라테스처럼 에로스도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을 더 현명하게 만들어 주지도 않는다. 그는 그들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 뿐이다. 그 역시 산파술적이다(maieutic). 영혼들이 그들 자신을 분만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소크라테스적 에로스가 남긴 영향력의 흔적을 추적하는 작업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 작가인 그레고리 타우마투르고스(Greogry Thaumaturgus)는 스승 오리게네스(Origen)를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혼에 불을 켜는 불씨처럼, 사랑이 우리 안에서 타올랐고 화염을 터뜨렸다―로고스에 대한 사랑이 한꺼번에 … 그리고 이 사람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친구이자 옹호자에 대한 사랑이 [타올랐다]. … 때때로 그는 진정한 소크라테스식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으며, 우리가 그의 아래에서 마치 길들지 않은 수많은 말떼처럼 저항하는 것을 볼 때마다 논증을 통해 우리를 넘어뜨리곤 했다.”

베르트람(E. Bertram)이 여러 장의 유려한 문장으로 보여주었듯이, 우리는 니체에서 소크라테스적 에로스의 전통과 교육적인 다이몬을 만난다. 베르트람에 따르면, 세 개의 격언이 교육학의 이 에로틱한 차원을 완벽하게 요약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니체의 것이다: “가장 깊이 있는 통찰력은 사랑에서만 솟아 나온다.” 또 다른 것은 괴테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배운다.” 마지막은 휠덜린의 격언이다: “가사적인 인간은 사랑할 때 자신의 최선을 다한다.” 이 세 가지 격언은, 우리가 참된 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서로의 사랑을 통하는 길뿐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괴테의 용어를 빌면, 우리는 사랑, 욕구, 비이성적인 것의 이 같은 차원을 신들린 것”(demonic, 악령 같은)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라는 인간에게서 이런 차원과 맞닥뜨렸다. 잘 알려진 것처럼,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은 때때로 그에게 전적으로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다가왔던 일종의 영감(inspiration)의 방식이었으며, 그에게 이러저러한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해 주는 부정적인 신호였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실재 “성격” 즉, 진정한 자아였다. 더욱이 소크라테스의 의식에서 이러한 비이성적인 요소는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와도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은 어떤 것도 알고 있지 않다고 단언한 까닭은, 행동할 때가 되면, 자신이 대화 상대자들의 다이몬을 신뢰했듯 아마도 자기 자신의 다이몬을 믿었기 때문일 수 있다. 어쨌든 1996년에 제임스 힐맨(James Hilman)이 지적했듯이, 만약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게 위대한 다이몬 에로스의 형상을 부여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소크라테스에게서 그가 신들린 인간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신들림의 차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서 괴테보다 더 좋은 안내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괴테는 그의 생애 내내 “악령적인 것”의 신비에 매료되었고 힘들어 했다. 하만(Hamann)이 소크라테스 언행록(Socratic Memorabilia)에서 묘사한 것처럼, 괴테가 처음 만난 악령 같은 존재는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이었을 것이다. 1772년 헤르더(Herder)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비범한 감탄사를 터뜨릴 만큼 괴테는 소크라테스에게 매료되었다. “만약 내가 한 날 한 밤에 알키비아데스가 되어 죽을 수만 있다면!” 괴테에게 악령적인 존재는 소크라테스적 에로스의 모호하고 양면적인 특징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가 시와 진실 20권에서 썼듯이, 그것은 신적인 것도 인간적인 것도 악마적인 것도 천사적인 것도 아닌 힘, 모든 존재를 동시에 결합하고 분리하는 힘이다. 향연에서의 에로스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동시적이고 모순적인 부정을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을 소유한 자들에게 존재와 사물에 대한 믿을 수 없는 권한(power)을 주는 힘(force)이다. 악령적인 존재는 비이성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차원에서 일종의 자연적 마법을 표현한다. 이 비이성적인 요소는 모든 창조에 없어서는 안 될 원동력이다.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가 그 사용법을 배워야만 하는 맹목적이고 굽힐 줄 모르는 역동적인 것이다. 자신의 원어(Urworte)에서, 괴테는 개인들의 다이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렇게 너는 존재해야만 하지; 너는 너 자신을 벗어날 수 없거든.

… 어떠한 시간도 어떠한 권력도 파괴할 수 없을 거야

살아가면서 자신을 발전시켜 나아가는 봉인된 형식을.

괴테에게서 이 악령적 요소를 가장 충실하게 보여주는 피조물들은 향연에서의 에로스적 특징을 취하고 있다. 라베(Raabe)가 증명했듯이, 이것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도제 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 1796)에 등장하는 인물] 미뇽(Mignon)의 경우에 특히 참이다. 미뇽은 에로스처럼 가난하지만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갈망한다. 비록 그녀의 옷차림새는 가난하고 거칠지만, 그녀의 음악적 재능은 풍요로운 내면을 드러낸다. 에로스처럼 그녀도는 맨 바닥이나 빌헬름 마이스터의 문간에서 잠을 잔다. 마침내 그녀도 에로스처럼 더 높은 형태의 삶에 대한 빌헬름 마이스터의 향수의 투영이고 화신이다.

괴테의 또 다른 악령적 인물은 선택적 친화력(Wahlverwandtschaften)의 여주인공 오틸리아(Ottilia)다. 그녀는 자연스런 힘을 지닌, 강력하고, 이상하고, 매혹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에로스와 그녀의 심오한 관계는 미뇽의 경우보다 더 신중하게 드러나지만, 거기 못지않게 현실적이다. 우리는 괴테가 파우스트 2부 2막에서 암수한몸인 호문쿨루스(Homunculus)와 에로스의 관계도 아주 분명하게 강조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악령적인 존재는 애매하고 양면적이며 우유부단한 요소로서 선도 악도 아니다. 오직 인류의 도덕적 결단만이 그것에게 결정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비합리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요소는 존재[실존]와 분리될 수 없다. 악령적 존재와의 만남, 그리고 에로스와의 위험한 게임은 불가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