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5. 소크라테스라는 인물 (P. Hadot, Philosophy as a Way of Life, 4)

Kant 2022. 5. 21. 18:25

3. 디오니소스

 

이제 소크라테스에 대한 니체의 이상스럽고 애정어린 증오로 돌아가 보자. 베르트람이 이미 그 점에 관해 본질적인 내용을 진술한 것은 맞지만, 아마도 니체의 복잡한 태도는 그가 향연의 소크라테스에 대해 언급했던, 덜 자주 주목받는 요소들 중 일부를 고려해 보면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기이한, 유혹하는 힘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이 조롱하고 현혹하는 괴물, 피리 부는 아테네인은 거만하기 이를데없는 젊은이들을 떨게 만들고 흐느껴울게 만들었다고 적었다. 니체는 이러한 유혹의 심리적 과정(mechanism)을 정의하려 한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반발을 야기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의 매력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니체는 다음과 같은 여러 설명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변증법으로 그리스인의 호전적인 취향을 자극했다. / 그는 대단히 에로틱한 사람이었다. / 그는 합리성을 수단으로 삼아 본능적인 퇴폐에 대항해야 하는 자신의 역사적인 역할을 이해하고 있었다. 진실은 그러나 이러한 설명들 중 어느 것도 특별히 매력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니체는 더 심오한 원인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가 모든 후세들에게 행사했던 유혹은 죽음을 직면하는 그의 태도에서 나왔다. 특히 그것은 그의 죽음이 지닌 절반 정도는 자발적인(semi-voluntary) 본성에서 나왔다. 그의 첫 작품인 비극의 탄생에서 일찍이 니체는 파이돈향연의 마지막 페이지들을 웅장한 이미지로 요약했다.

 

“그는 추방이 아니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완벽하게 자각하면서 또 죽음에 대한 그 어떤 자연스런 두려움도 없이 그 선고를 야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침착하게 죽었다. 플라톤의 묘사에 따르면, 그는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 새벽의 향연장과 마지막 술친구들을 떠난다. 한편 벤취와 바닥 위에서는 그와 같은 탁자에 앉았던 동료들이 뒤에 남아 졸면서 진정한 에로티스트인 소크라테스를 꿈꾸고 있다. 이제 죽어가는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의 고귀한 젊은이들에게 이전에는 결코 본 적이 없던 새로운 이상이 된다.”

 

니체는 플라톤의 향연의 결말 장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관한 상징을 감지했고 예견했다. 그 자체로 놓고 보면, 플라톤의 그 장면 묘사는 가능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묘사였다.

 

“아가톤, 아리스토파네스 그리고 소크라테스만이 여전히 깨어있었고, 그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큰 그릇을 전달하면서 그것을 마시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과 토론하고 있었다. … 그는 점차 그들에게 한 사람의 동일한 작가가 희극시와 비극시를 모두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가장 먼저 잠이 들었고, 그런 다음 태양이 이미 떠올랐을 때 아가톤이 잠들었다. 소크라테스는 … 그때 일어나서 떠났다. 그는 리케이온(Lyceum)으로 향해 거기서 씻은 다음 그날의 나머지를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보냈다.”

 

이 무미건조한 구절 속에 숨겨진 모호한 상징성은 근대 시인들에게서 잊혀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마이어(C.F. Meyer, 스위스 시인)는 소크라테스만이 아직 깨어 있는 그날 새벽 죽어가는 그 철학자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이 그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을 때

그리고 그들이 베개 위에 머리를 내려 놓았을 때

한 젊은이 들어왔지 ― 나는 잘 기억 해

두 명의 유연한 플륫 연주자와 함께였다는 걸.

우리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셨고,

우리의 입술, 너무 많은 이야기로 지쳐, 침묵에 빠졌지.

시든 화환 위로 길게 맴도는 선율 …

침묵하라! 졸린 듯 울리는 플륫들이 죽음을 알리느니!

 

이와 대조적으로 횔덜린이 그 일화에서 보았던 것은 삶의 연인 소크라테스였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만의 도량을 가질 뿐이니.

[보통 사람에게] 견디기 어려운 건

불운이지만, [소크라테스에게] 그보다 더 힘든 건 행운이다.

그렇지만 어떤 현자는 할 수 있었다

정오부터 자정까지, 그리고 계속

아침이 하늘을 밝힐 때까지

향연장에서 멀쩡히 깨어있기를.

 

여기에 소크라테스가 니체에게 제기했던 수수께끼가 있다. 소크라테스처럼 삶을 그렇게도 사랑했던 사람이 어떻게 죽겠다는 의지로 존재를 증오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을까? 니체에게는 삶을 사랑했던 소크라테스가 꽤 친숙했기 때문이다; 정말 니체는 그를 사랑했다.

 

“만약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우리는 도덕과 이성에 대한 지침서로 성경책보다는 소크라테스 회상기를 채택할 때가 올 것이고, 몽테뉴와 호라티우스가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해의 선구자와 길잡이로서 고용될 때가 올 것이다. 가장 단순하고 불멸적인 중재자였던 소크라테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다양한, 철학적 삶의 방식들에 이르는 통로들은 그에게로 되돌아온다. … 소크라테스는 유쾌한 종류의 진지함과,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한 상태를 이루는 악동 같은 성질로 가득 찬 지혜를 소유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창시자를 능가한다.”

 

우리는 크세노폰이 춤추는 소크라테스을 묘사할 때 소크라테스의 악동 같은 성질로 가득찬 지혜를 볼 수 있고,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농담 잘하고 아이로니컬한 소크라테스에게서 또 횔덜린의 시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가 묘사하는 삶을 사랑하는 철학자의 모습에서도 그러한 지혜를 볼 수 있다.

 

“성스런 소크라테스여, 왜 당신은 항상

이 젊은이에게 구애한답니까?

당신은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모르는가봐요?

왜 당신의 눈은 그를 사랑스럽게 응시하죠?

마치 신을 응시하듯?”

 

가장 깊이 생각해본 자는

가장 생기 있는 것을 사랑한다.

세상을 보아온 자는

고귀한 젊음을 이해할 수 있는 법.

그리고 자주, 마지막 순간엔,

현자들이 공정한 자들(the fair) 앞에서 절한다.”

 

니체의 수필, 교육자로서 쇼펜하우어에서, 쇼펜하우어의 인물상은 삶을 사랑하는 자 소크라테스의 인물상과 하나가 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은 기이한 구절에서 현자의 유쾌함을 묘사하기 위해 횔덜린의 싯구에 호소한다.

 

저 승리자들 중 한 명과 가까이 있는 것보다 더 좋고 행복한 일은 그 자에게 일어날 수 없다. 그 승리자들은 분명, 가장 깊이 생각했고, 가장 생명력 넘치는 것을 사랑함에 틀림없고, 또 현자들처럼 결국엔 아름다운 것을 지향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 그들은 활동적이며 진실로 살아있다. … 그것이 그들과 가까이 있을 때 우리가 한번쯤 인간적이고 자연스럽다고 느끼며, 괴테처럼 이렇게 외치고 싶어지는 이유다: “생명을 지닌 존재는 얼마나 영광스럽고 소중한가! 그것은 삶의 조건에 얼마나 잘 적응하였고, 얼마나 진실하며, 얼마나 충만된 존재인가!”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음악적인 소크라테스의 도래를 예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음악가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 자신의 꿈속에서, 그 철학자를 음악에 헌신하도록 초대했던 부름에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합리적인 의식의 아이로니한 명쾌함과 악령 같은 열정을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니체는 출판하지 않은 글들에서, 그러한 인물이야말로 비극적 인간의 진정한 예가 될 거라고 말한다. 니체는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사이의 조화에 관한 자신의 꿈을 음악가로서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에 투사했다.

 

니체는 죽어가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자신의 희곡에 관한 또 다른 성찰을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죽기를 원했고이것은 니체에게 너무 충격적이었다또 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던 것이다: “, 이보게 크리토,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졌네.” 이는 마치 소크라테스가 어떤 질병에서 치유되어 치유의 신에게 빚을 지게 되었다는 의미로 들린다.

 

귀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 엉뚱하고 끔찍한 마지막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렇다: “오 크리토여, 삶은 질병이라네.”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이 비관론자였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란 말인가? 그는 그저 즐거운 표정을 지어 보였던 것뿐이다. 평생 동안 줄곧 자신의 궁극적인 판단, 가장 깊은 내면의 감정을 숨기면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가 삶을 고통스러워했다니!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복수하고 있었다―이 베일에 싸여 있을뿐만 아니라, 섬뜩하고, 경건하며, 신성모독적인 말로써. … 그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잠자코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그는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영혼에 속할 수 있었을 텐데.

 

베르트람이 잘 보여주었듯이, 여기서 니체는 자기 자신의 비밀, 친밀한 의심, 그리고 그의 존재 전체를 보여주는 드라마의 실마리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니체는 삶과 존재의 기쁨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결국 삶이 그저 질병에 불과할까 봐 두려워했던 건 아닐까?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지상의 존재에 관해서 생각했던 것을 공개함으로써 자신의 비밀을 폭로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이 무시무시한 비밀에 대해 침묵을 지킬 수 있는 더 높은 차원의 영혼에 속하기를 원했다. 베르트람의 말에 따르면, “삶에 대한 찬가 그리고 오로지 삶만을 위한 그의 극단적인 디오니소스적 찬가는 그저 일종의 침묵이었을 뿐, 그 침묵 아래에서 삶에 관한 이 위대한 교육자는 삶을 믿지 않았던 것 아닐까?”

 

우리는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가 재해석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이 가져온 하나의 마지막 반전을 발견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치료 받아야 할 병은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종류의 삶이다. “‘소크라테스는 의사가 아니야라고 그는 자신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여기서 의사는 죽음뿐이지. 소크라테스 자신이 단지 오랫동안 아팠을 뿐이야’.” 이 같은 해석에서 소크라테스의 명료함과 소크라테스의 도덕성은 삶을 계속 갉아먹는 질병에 상응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소크라테스의 질병은 니체 자신의 그것과 같은 것 아니었을까? 신화를 해체하는 이러한 명료함과 냉혹한 의식, 이런 것들은 니체 자신의 것 아니었을까? 소크라테스에 대한 니체의 애정 어린 증오심은 결국, 니체가 자신에게서 느꼈던 애정어린 증오와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니체에게서 보이는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지닌 모호함은, 니체적 신화의 중심 인물이 지닌 모호함에 뿌리를 둔 것이었으리라. 디오니소스, 즉 죽음과 생명의 신 말이다.

 

우리에게 결국 다소 신비스러운 것으로 남아있는 이유들은, 플라톤이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를 디오니소스적 상징들의 집합물 전체로 둘러싼 것에서 기인한다. 사실 모든 대화에 디오니소스의 판단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도 있었다. 그 이유는 아가톤이 소크라테스에게 자신과 소크라테스 중에서 누가 더 현명한지 알아내고자 할 때, 그들은 디오니소스에게 그 질문을 남겨 놓을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술을 가장 많이 마시는 사람은 이 소피아지혜와 지식의 경연대회에서 우승할 것인바, 지혜란 포도주 신의 표시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키비아데스가 느닷없이 연회장에 뛰어들 때, 그는 디오니소스처럼 제비꽃과 담쟁이덩굴 잎으로 만든 왕관을 쓰고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들어오자마자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그 머리띠 모양의 왕관을 놓는다. 그것은 시 경연에서 승리자를 위해 행하는 관습이다. 우리는 디오니소스가 비극과 희극 모두의 신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연설에서 소크라테스가 나중에 사티로스와 실레니의 희곡이라 부르는 것을 창작하는데, 알키비아데스가 그들을 소크라테스와 비교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사티로스와 실레니가 디오니소스의 수행단을 이룬다는 것 그리고 사티로스 희곡의 중심 테마가 원래 디오니소스의 정념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향연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오로지 비극 시인 아가톤과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소크라테스는 차츰 그들에게 동일한 한 사람이 비극과 희극 모두의 시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아가톤은 에로스를 찬양하면서, 사랑은 시인들 중에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에로스 분야에서 탁월한 소크라테스는 디오니소스의 분야에서도 뛰어나다. 결국, 그는 포도주를 마시는 데 있어 적수가 없으며, 만약 그가 디오니소스의 판단의 결과로 지혜 경연대회에서 승리한다면, 그것은 그가 연회가 끝날 때까지 깨어있는 유일한 자이기 때문이다. 이 대화에서 소크라테스의 오래 지속된 황홀함과 도취가 두 번 언급되는데, 여기서도 우리가 그의 또 다른 디오니소스적 특징을 구별해 낼 수 있을까?

 

이처럼 우리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지닌 디오니소스적 본성을 암시하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앙상블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한다. 이 앙상블은 소크라테스가 디오니소스의 심판에서 최고의 술꾼이자 최고의 시인으로 등극하는 대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우리는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니체에게서 역설적이고 비밀스럽고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디오니소스의 모습과 일치하게 된다고 해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선악의 피안 마지막 부분에서 니체는 디오니소스에게 마음의 정령”(genius of the heart)이라는 비범한 찬사를 바친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에서도 심리학적 통제력에 관한 디오니소스적 기술에 대한 증거로서 마음의 정령이라는 표현을 반복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를 밝히기 거부하기로 한다. 이 찬가에서 우리는 마치 성령(하만이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이 그것의 원형이라고 생각했던)에 관한 오래된 중세의 찬가 오소서 성령이시어(Veni Sancte Spiritus)의 메아리를 듣는 것 같다: “뻣뻣한 것을 굽히게 하고, 차가운 것을 따뜻하게 하며, 휘어진 것은 바로 잡으라.”(Flecte quod est rigidum, fove quod est frigidum, rege quod est devium.) 니체는 마음의 정령이 이와 똑같이 부드럽게 하고, 따뜻하게 하며 바로 잡게 하는, 놀랍고도 섬세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초상화를 악령과도 같은 힘을 지닌 영적 안내자로 그리면서 그의 행동을 기술하고자 했다. 하지만 베르트람이 암시했듯, 니체 또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소크라테스를 상상해 내고 있던 것 아닐까?

 

니체의 찬사는 우리가 논의한 모든 주제를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니체의 찬사로 결론을 대신할 것이다.

 

마음의 정령, 저 위대한 은둔자가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그것은, 유혹의 신, 그리고 양심을 유괴하도록 태어난 피리부는 사람이다. 그 자의 목소리는 모든 영혼의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법을 알고 있다. 유혹하려는 비밀스런 의도의 흔적조차 없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 … 시끄럽고 자기 만족적인 모든 것을 침묵시키고 복종하도록 가르치는 마음의 정령 … 거친 영혼을 부드럽게 하고 새로운 욕구를 맛보게 하는 자―거울처럼 가만히 누워 있으니 깊은 하늘이 그 위에 비칠 수도 있으리라. … 마음의 정령, 그의 손길로 모든 사람들은 더 부유해져서 떠나가지만, 은혜를 입거나 놀라지 않는다. 남의 재화로 행복해 하거나 침울해 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전보다 스스로 더 부유해지고, 더 새로워지며, 해빙풍이 불어와 갈라지고 이리저리 떠다니듯, 아마도 더 불확실하고, 더 부드러워지고, 더 망가지기 쉽고, 더 부서지기 쉽겠지만, 그럼에도 아직 이름이 없는 희망으로 가득 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