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고단한 아버지
조선일보 오태진 논설위원
입력 : 2004.11.25
어느 작가가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라는 존재를 만들었다”고 했다. 아무도 이 말이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삶의 근원이자 안식처다. 그 이름을 되뇌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영국문화협회가 영어를 쓰지 않는 102개 나라, 4만여명에게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를 고르라고 했다. 1위는 ‘Mother’(어머니)였다. ‘Father’(아버지)는 이 영국 홍보기구가 발표한 단어목록 70위에도 끼지 못했다. 하긴 요즘 아버지만큼 고단하고 썰렁한 존재도 드물다.
▶마종기의 시에서 멸치는 영락없는 아버지 신세다. ‘(아내는 맛있게 끓는 국물에서 며루치를 집어내 버렸다. 국물을 다 낸 며루치는 버려야지요. 볼썽도 없고 맛도 없으니까요)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남성성(性)과 부성(父性)이 스러져가는 시대에 아버지는 혼도 진도 다 빠지도록 돈 버는 기계일 뿐이다. 자식이 보호막을 벗고 제 힘으로 서는 순간, 아버지는 그나마 존재이유마저 잃어버린다.
▶자식에게 아버지는 흔히 넘지 못할 장벽이거나 원망의 대상이다. 작가 조정래는 아버지가 대처승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중학교 졸업 후 30여 년 만에야 아버지의 고향 절집을 찾아간 뒤 승려의 아들임을 처음 글로 고백한다. 그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식에 눈뜨면서 아버지와 화해하게 됐다고 했다. 나아가 그는 아버지의 수난에 얽힌 의문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다. 그 결실이 ‘태백산맥’이다.
▶‘함께 덮고 자던 이불을 내 아이가/ 돌돌 감고 혼자 잔다 잠결에/ 나는 또 아버지 이불을 뺏어 칭칭/ 몸에 감고 잔다// 아버지는 혼자 아버지를 덮고 주무신다/ 아버지라는 이불이 추우신지 몸을 웅크리고/ 가끔 마른기침을 하신다….’ 이기윤의 ‘섣달 그믐밤’도 아버지가 돼 비로소 아버지 마음을 알게 된 아들의 이야기다. 덮고 자던 이불을 아들에게 빼앗기고도 아무 말 못하는 아버지. 아들은 그 춥고 속 깊은 고독을 체감한다.
▶자식 특히 아들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야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볼 눈을 뜨게 된다. 아들도 아버지처럼 실수도 실패도 해보고 후회도 하는 동안 아버지가 결코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었음을 깨닫는다. 그 연민은 아버지를 극복하는 디딤돌이 된다. 그러고도 많은 자식들이 아버지의 손 붙잡기를 머뭇거리다 떠나보내고 만다. 미완의 화해는 그 다음 대(代)에도 물림하기 십상이다. 외로움은 아버지의 운명인 모양이다.
조선일보 오태진 논설위원
입력 : 2004.11.25
어느 작가가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라는 존재를 만들었다”고 했다. 아무도 이 말이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삶의 근원이자 안식처다. 그 이름을 되뇌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영국문화협회가 영어를 쓰지 않는 102개 나라, 4만여명에게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를 고르라고 했다. 1위는 ‘Mother’(어머니)였다. ‘Father’(아버지)는 이 영국 홍보기구가 발표한 단어목록 70위에도 끼지 못했다. 하긴 요즘 아버지만큼 고단하고 썰렁한 존재도 드물다.
▶마종기의 시에서 멸치는 영락없는 아버지 신세다. ‘(아내는 맛있게 끓는 국물에서 며루치를 집어내 버렸다. 국물을 다 낸 며루치는 버려야지요. 볼썽도 없고 맛도 없으니까요)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남성성(性)과 부성(父性)이 스러져가는 시대에 아버지는 혼도 진도 다 빠지도록 돈 버는 기계일 뿐이다. 자식이 보호막을 벗고 제 힘으로 서는 순간, 아버지는 그나마 존재이유마저 잃어버린다.
▶자식에게 아버지는 흔히 넘지 못할 장벽이거나 원망의 대상이다. 작가 조정래는 아버지가 대처승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중학교 졸업 후 30여 년 만에야 아버지의 고향 절집을 찾아간 뒤 승려의 아들임을 처음 글로 고백한다. 그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식에 눈뜨면서 아버지와 화해하게 됐다고 했다. 나아가 그는 아버지의 수난에 얽힌 의문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다. 그 결실이 ‘태백산맥’이다.
▶‘함께 덮고 자던 이불을 내 아이가/ 돌돌 감고 혼자 잔다 잠결에/ 나는 또 아버지 이불을 뺏어 칭칭/ 몸에 감고 잔다// 아버지는 혼자 아버지를 덮고 주무신다/ 아버지라는 이불이 추우신지 몸을 웅크리고/ 가끔 마른기침을 하신다….’ 이기윤의 ‘섣달 그믐밤’도 아버지가 돼 비로소 아버지 마음을 알게 된 아들의 이야기다. 덮고 자던 이불을 아들에게 빼앗기고도 아무 말 못하는 아버지. 아들은 그 춥고 속 깊은 고독을 체감한다.
▶자식 특히 아들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야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볼 눈을 뜨게 된다. 아들도 아버지처럼 실수도 실패도 해보고 후회도 하는 동안 아버지가 결코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었음을 깨닫는다. 그 연민은 아버지를 극복하는 디딤돌이 된다. 그러고도 많은 자식들이 아버지의 손 붙잡기를 머뭇거리다 떠나보내고 만다. 미완의 화해는 그 다음 대(代)에도 물림하기 십상이다. 외로움은 아버지의 운명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