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일 | 2005/6/30 (17:51) |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인문학 필요하다”
저소득층에 사서삼경 가르치는 성공회대 고병헌 교수
“인문학 배우면 삶의 태도 달라져”
미디어다음 / 글, 사진 = 윤자영 통신원
올 초부터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의를 개설한 성공회대학교 교육학과 고병헌 교수.
“현수막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현수막은 주로 나무에 걸려있다. 학생들은 나무를 현수막 걸이로 밖에 보지 못한다. 또 ‘사람을 개 패듯 패면 되느냐’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럼 개는 ‘개 패듯’ 때려도 된다는 뜻인가. 내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나무와 개를 모두 하나의 생명으로 볼 수 있는 눈을 키워주는 것이다.”
성공회대학교 고병헌(43) 교수는 인권을 강의하는 교수로 잘 알려져 있다. 각 대학마다 취업률 올리기에 힘을 쏟고 취업관련 강좌를 앞 다투어 개설하고 있는 현실에서 고 교수의 강의는 그야말로 ‘생뚱맞은’ 강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공회대학교는 고 교수의 ‘인권과 평화’ 강의를 전교생의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고 인권 관련 강좌 수를 늘렸다.
올해 고 교수는 더욱 ‘생뚱맞은’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자신이 초대 원장을 역임했던 광명시 평생교육원에서 저소득층 시민들에게 논어, 사서삼경 등을 가르치는 인문학 강좌를 기획했다.
고 교수는 “인문학을 배우면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며 “논어, 사서삼경 등의 구절을 읽고 해석하다 보면 그 속에 들어있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고 판단력을 길러 장기적으로 저소득층에서 벗어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6일 저소득층에 대한 인문학 강의가 이뤄지고 있는 광명시 평생학습원에서 고 교수를 만났다.
- 올 초부터 광명시 평생학습원에서 저소득층을 대상 한 인문학강좌를 진행하고 있는데 다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취지로 강의를 기획했는지 궁금하다.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좌를 시도한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니다. 미국의 철학자 얼 쇼리스가 이미 10년 전에 시도한 적이 있다. 물론 그도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교도소를 방문했다가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끝에 그는 가난한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인문학 등의 강의를 접할 수 없고 그러다 보니 깊이 있게 사고하는 법, 현명하게 판단하는 법을 몰라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뒤 쇼리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인문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995년에 윤리철학, 예술, 역사, 문학, 논리학 등의 5과목 구성된 ‘클레멘테 인문학 과정’을 창설했다. 어려워 할 사람들을 위해 기존 강의식 수업 대신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을 이용해 강의를 진행했다.
강의는 성공적이었다. 참여자 31명 중 17명이 끝까지 강의에 참여했고 이 17명은 모두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직에 성공하는 성과를 거뒀다. 또한 이들은 삶에 대한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했고 언어표현 능력도 눈에 띄게 향상됐다.
결국 인문학은 당장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문학을 배우면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 지금 광명시 평생학습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인문학 강의도 같은 취지다. 논어, 사서삼경 등의 구절을 읽고 해석하고 그 속에 들어있는 삶의 지혜를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틀림없이 저소득층 사람들의 인문학적 안목을 높이고 판단력을 길러 장기적으로 저소득층에서 벗어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취지는 이해가 되지만 정작 수업을 듣는 저소득층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수업을 진행한 뒤 반응은 어땠나.
강의를 시작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힘든 삶에 치여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사람들의 인문학적 소양이 틈틈이 하는 교육만으로 쉽게 다시 깨어나기는 힘들다. 또 짧은 교육만으로 생활 전체를 쉽게 바꿀 수는 없다.
수업을 듣는 사람들의 학력이 높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한 쉽게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고전을 해석할 때도 고전에 담긴 삶의 지혜가 지금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반응은 다양하다. 이미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사람도 있고 제법 진지하게 강의를 듣는 사람도 있다.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내 경험담이 있다.
얼마 전 삼청동에 볼 일이 있어 찻집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 찻집의 이름은 ‘서울에서 둘째로 잘하는 집’이었다. 주인에게 간판의 의미를 묻자 주인은 ‘첫째로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집들이 많을 것이라며 그 첫째의 자리는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모두들 자기가 최고다 진짜다 자랑하는 사회인데 그렇게 말하는 주인을 보니 느껴지는 것이 많았다.
저소득층 사람들에게 강조하는 것도 이거다. 그렇게 작은 찻집을 하더라고 삶에 대한 안목이 있고 이런 지혜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저소득층 사람들도 철학, 문학, 글쓰기, 화법 등을 배울 필요가 있다.
-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의미로 문해(文解)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의미인가.
표현이 조금 어려운데 문해교육이라는 것은 글자 뜻 그래도 글자를 해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 넓은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글자를 포함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양한 ‘코드’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 중 한글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한글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다. 지난 2002년 광명시 조사에 따르면 19세 이상 성인 광명시 인구 중 22.6%가 일상생활에서 읽기, 쓰기, 셈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난 4월에는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실질문맹률’이 최하위 수준이라는 발표도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글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문서해독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언뜻 이해가 안 될지 모르지만 자신을 한번 뒤돌아봐라. 은행이나 법원에 가서 은행 상품 설명서나 법원의 공고문을 보고 해석의 어려움을 느꼈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21세기는 코드와 상징의 사회, 지식이 가치의 원천인 사회라고 말한다. 이렇게 세상이 변할수록 새로운 단어가 끊임없이 생겨나고 여기에 적응하려면 꾸준히 문해교육을 해야 한다. 이런 능력을 기르기 위해 인문학적인 교육이 바탕이 돼야 함은 물론이다.
- 평화와 인권을 강의하는 교수님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인권강의는 주로 어떤 내용으로 이뤄지고 있나.
인권이라고 해서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만 가르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상생활 속의 인권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는 편이다.
인권이라는 것은 사람의 권리를 뜻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권리라는 것이 인간만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굳이 그 앞에 ‘사람 인’자를 붙여 인권이라는 단어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권리는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도 있는 것이다.
대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수막을 생각해 보자. 현수막을 주로 나무에 걸려있다. 학생들은 나무를 현수막 걸이로 밖에 보지 못한다. 현수막을 걸기 위해서라면 나무쯤은 희생이 되도 괜찮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나무를 하나의 생명으로 볼 수 있는 눈을 키워주는 것이다.
이런 예도 있다. ‘사람을 개 패듯 패면 되느냐’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럼 개는 ‘개 패듯’ 때려도 된다는 뜻인가.
많은 사람은 우리, 특정 집단, 인간 등 어떤 울타리를 쳐 놓고 그 안에 포함된 것들에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너는 나와 다른 집단에 속해 있으니 무시당해도 된다는 식이다. 인권은 모든 생명체의 권리까지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삶의 고귀한 가치인 진리는 내 안에 있는 것도 상대방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서로 관계가 이뤄질 때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인권 역시 관계 속에서 정의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생명체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인권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 자연, 우주에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 광명시 평생학습원에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인문강 강의가 열리고 있다. (한재훈 한학자가 강의를 하고 있는 모습.)
인권 강의를 해오신지 이제 10년이 다되어 간다. 그동안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반응은 어땠나.
학생들의 반응도 다양하다. 오랫동안 강의를 하다 보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학생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인권이다 평화다 하는 그럴듯한 강의 이름만 보고 거창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온 학생 들 중에는 실망을 하고 돌아간 학생들도 있다. 대단한 것을 기대했는데 막상 강의실에 들어와 보니 ‘나무’와 ‘개’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황당했을 것이다. 끝까지 내 인권 강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을 보면 참 안타깝다.
- 우리나라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해마다 끊이지 않고 있다. 교육학자로서 우리나라교육의 가장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나.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입시 위주의 교육, 획일화된 교육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교육철학의 부재(不在)다. 입시 위주의 교육, 획일화된 교육은 모두 교육 철학이 없는 원인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의 교육은 국가경쟁력 향상을 위한 수단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학생은 하나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교육은 인권 모독일 뿐 아니라 인간성 상실을 가져왔지만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간디는 지식이 무기와 같아서 누구 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약도 될 수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급한 마음에 일단 지식을 전달하는데 열중했을 뿐 그 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가르치지 않았다.
- 그렇다면 교육이 어떻게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나.
교육은 삶을 위한 것이다. 삶을 위한 교육이 이뤄지려면 먼저 교사와 학부모가 철학을 갖고 살아야 한다. 아이들이 바르게살기를 바란다면 철학으로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배려는 더 이상 덕목이 아니다. 21세기는 남을 위한 배려가 능력으로 평가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 배운 지식을 모두에게 이롭게 쓸 줄 알아야 하고 모두가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서로를 위한 배려가 필수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참살이(웰빙)에 관심이 많다. 참살이(웰빙)는 말 그대로 ‘잘 사는 것’일 텐데 배려야 말로 참살이의 기본 조건이다.
그리고 모든 교육에는 항상 희망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율곡 선생의 표현에 빌리자면 우리의 본성은 모두 같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훌륭한 선생의 가르침에 감동할 줄 알고, 이러한 감동을 나눌 줄 아는 본성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당신도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줘야 한다.
- 젊은 대학생들에게 직접 강의하고 있지만 요즘 신세대들이 개인주의적 성향이나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성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요즘 신세대들이 자유로운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스스로 자유인이 되는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자유(自由)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이유(自己理由)를 말할 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신세대들의 모든 질문에 ‘그냥’, ‘좋잖아’ 등으로 대답하는 발상을 무척 위험하다.
이렇게 개개인이 판단을 정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다양한 사람들이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더 큰 획일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겉으로만 자유롭게 포장돼 있을 뿐 상업 자본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 자동차도 없고 휴대전화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나.
특별한 철학이 있어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지 나와 함께 있는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각종 통신 기기가 발달하면서 관계가 인스턴트로 바뀌는 것 같다.
만남은 조금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모든 만남을 만남으로 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 안에서 공명이 필요하다. 즉 함께 울려야한다. 그러나 각종 통신 기기로는 울림을 만들 수 없다.
또 휴대전화로 오는 연락들은 대부분 급한 연락들이다. 그렇게 급하게 살고 싶지 않다. 느리게 사는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느리게 사는 것도 생각해 보면 휴대전화를 버리는 작은 실천을 통해 이룰 수 있다.
(http://feature.media.daum.net/interview/deepen0120.shtm?_right_special=R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