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생명)은 당신에게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이 질문으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만일 당신이 죽는다면 무엇을 잃게 되는가 하는 것이고, 이것은 다시 뒤집어 말하면 당신이 계속해서 살 경우에는 무엇을 얻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이 “모든 것”(everything)이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생명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셈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정반대로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라고 대답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믿음에 익숙해지도록 하라.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 있는데, 죽으면 감각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우리를 가장 겁나게 만드는 죽음은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또 죽음이 도달했을 때에는 우리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따라서 살아있는 자나 죽은 자와 무관하다. 전자에게 그것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 후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당신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가 옳다면, 계속해서 삶을 이어가는 것도 역시 당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 셈이 된다.
나는 “모든 것”이라는 대답이나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대답 모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의 대답은 중간에 놓여 있다. 나는 일단 두 극단적인 대답들을 거부하면서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얼핏 보기에 두 대답 중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대답이 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흥미로운 논증이라는 장점을 가진다. ...
우리들은 대부분 죽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무서운 일이라고 당연시하기 때문에 그 대답이 설득력이 없다고 여긴다. 물론 에피쿠로스 자신이 그러한 관점의 대답을 제시하고자 의도한 것 같지는 않다. ... 어쨌든 그는, 우리가 죽음이 우리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관점에 해당하는 사례를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소재를 제공했다.
삶의 이로움에는 두 가지 요소들이 있다. 삶의 질과 삶의 양이다. 당신은 어쩌면 삶의 양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질만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 우리는 삶의 양을 증가시키는 한 가지 방법으로 더 많은 아기들을 출산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그러한 방식으로 양을 증가시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질에는 관심을 두지만 그러한 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를 증가시키는 데에는 무관심하다. 중국 정부가 한 자녀 정책을 제도화 했을 때 그 목적은 중국인들의 삶의 질을 증가시키는 데에 있었다. 그 정책은 그러나 동시에 삶의 양을 감소시킨다. 그 정책이 없었을 경우를 상상하여 비교해 본다면 현재 그 정책으로 인해 더 적은 수의 중국인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러한 양의 감축을 질의 성장을 얻기 위해 도입하기에 나쁜[부적절한] 정책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우리들도 거기에 동의할 것이다. ...
자녀를 갖는 문제로 고민하다가 결국 자녀를 갖지 않기로 한 한 커플이 있다고 치자. 그들의 결정의 결과로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있었을 생명이 하나 줄어든 셈이다. 그런데 이 양의 감소는 나쁜 일일까? 누가 그 결과로 인해 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나? 아무도 아니다.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게 된 존재로 해를 입지는 않았다.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불행을 겪는 어떤 아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아이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고, 따라서 아무도 해를 입지 않았다. ...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삶의 양을 감소시키는 것은 나쁜 일일 수 없다고 결론내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논증은 약간 개선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그 아이의 비존재로 인해 불이익을 당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이의 잠재적인 부모가 아이를 갖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아이가 자라서 인류문명에 위대한 기여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그 아이의 비존재로 인해 해를 입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간접적인 결과이므로 우리는 논의의 단순화를 위해 그러한 상황을 제거해 버릴 수 있다. ... 그와 같은 종류의 간접적인 결과가 없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그러한 가정에서 논증은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세상에 더 많은 인간들을 탄생시키는 것 말고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도 삶의 양을 증가시키는 한 방법이다. 에피쿠로스는 이 맥락에서도 유사한 논증이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한 사람의 삶의 양에 대해서도 위에서와 같은 종류의 물음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우리는 아이가 창조되지 않음에 의해 누가 해를 입게 되는가를 물었다. 이제 어떤 사람이 어느 시점에서 삶을 지속하지 않음에 의해 해를 입게 되는지를 물어보기로 하자. 당신이 더 살 수 있는데 실제로는 지금 죽는다고 상정해 보자. 그것은 당신에게 나쁜 일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이른 죽음에 의해 언제 해를 입게 되는가? 그런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 말처럼 당신은 당신의 죽음이 오기 전 어느 때라도 해를 입을 수 없다. 당신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 “죽음은 당신과 함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죽음 뒤 어느 때라도 해를 입지 않는다. 당신이 죽은 뒤 어느 때에도 당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해를 당하는 어떠한 시간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쩌면 당신은 전혀 해를 입지 않는다고 결론 내릴 수도 있겠다.
어쩌면 당신은 실제로 당신이 죽을 때 그 죽음이 당신에게 해를 입힌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하면서 말이다. 첫째는 죽음의 과정이 자주 끔찍하다는 점이다. 물론 맞는 말이고, 이 점에서 당신의 죽음은 어떤 방식으로는 당신에게 해를 입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제기하고 있는 물음과는 무관하다. 나는 삶을 지속하는 것이 당신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오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당신이 삶을 유지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해를 입게 되는가를 의미한다. 당신의 삶이 중단됨으로 해서 당신은 어떤 해를 입게 되는가? 나는 때때로 그 물음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당신의 죽음이 당신에게 어떤 해를 주는가? 이것은 도식적이기는 하지만 정확히 표현된 질문 방식은 아니다. ...
죽음의 과정이 주는 끔찍함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않는다. 당신의 삶이 중단되는 것이 꼭 그런 방식으로 당신에게 해를 주지는 않는다. 당신이 장수를 누린 후 죽음을 맞이하거나 단기간의 생애 후 맞이하거나 어차피 그 죽음은 끔찍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의 이러한 나쁜 측면을 문제에서 제외시킬 수 있다.
당신이 제시할 수 있는 두 번째 논점은 이렇다. 질문은 죽음이 당신에게 해를 입히는가였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해가 언제 발생하는지를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해를 입히는 것은 바로 당신의 죽음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신이 죽음을 맞는 순간에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해가 야기되는 시간(the time when a harm is caused)을 그 해를 당하는 시간(the time when it is suffered)으로부터 구분해야만 한다. 만일 내가 바나나 껍질을 길바닥에 버렸고, 당신이 나중에 그것을 밟고 넘어져 다쳤다면, 우리는 당신의 해는 내가 껍질을 버렸을 때 야기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넘어졌을 때 비로소 당신은 해를 당한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으로 인한 해를 언제 당하는가를 물었지, 그것이 언제 야기되는가를 묻지는 않았다. 그는 아무 때에도 해를 당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만일 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죽음을 맞는 어느 시간에 야기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다른 문제이니 그것도 여기서 제외시키기로 하자. ...
에피쿠로스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당신이 어떤 시간 속에서 해를 입지 않는다면 당신은 해를 당할 수 없다’라는 또 하나의 가정을 필요로 해야만 한다. 이것은 좋은 가정일까? 에피쿠로스는 일단 그것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재 역시 제공했다. 그는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 있다”며,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좋음은 좋은 감각이요, 유일한 나쁨은 나쁜 감각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오늘날 “쾌락주의”라고 일컬어지는 것의 한 버전이다. ... 나는 우리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당신이 어느 특정한 시간 속에서 해를 당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해를 당할 수 없다는 주장을 진정으로 지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이고자 한다. ...
‘이득’(Benefit)과 ‘손해’(harm)라는 개념은 ‘좋음’(good)과 ‘나쁨’(bad)이라는 개념과 다르다. 그리고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특정한 시간 가운데 발생한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모든 이득과 손해도 그렇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득과 손해는 비교적인 개념들이다. 만일 어떤 것이 당신에게 이득을 준다면, 그것은 그것이 없었을 때보다 당신의 삶을 더 좋게 만든다. 그리고 만일 어떤 것이 당신에게 손해를 준다면 그것은 그것이 없었을 때보다 당신의 삶을 더 나쁘게 만든다. 어떤 사건이 당신에게 이득을 주는지 손해를 주는지를 결정하려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당신의 삶의 좋음을 그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주어질 수 있는 좋음과 비교해야 한다. 이 비교는 있는 그대로의 당신의 삶 전체와, 살아갈 수도 있을 삶 전체 사이의 비교이다. 한 삶 가운데의 특정한 시간과 다른 삶 가운데의 동일한 시간을 비교하는 것과 같이 특정 기간을 매번 따로 비교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비록 당신의 삶 가운데의 좋음이 모두 특정한 시간 가운데 발생하는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로 이뤄진다 해도, 삶들 사이의 비교가 모두 특정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이득과 손해들로 이뤄질 필요는 없다.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자. 어느 책의 텍스트 일부가 출판되기 전에 삭제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마지막 장이 잘려 나갔다고 말이다. 그 책은 예컨대 6천개의 단어가 줄어들었지만 앞 장들은 모두 그대로 출판되었다. 그러면 6천개의 단어들이 그 책으로부터 제거된 셈이지만 실제로 한 단어조차도 그 책의 어느 페이지로부터 제거된 것은 아니다. 모든 단어들이 특정한 페이지 위에 나타나 있다 해도 이 같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더욱이 만일 그 책이 줄어들지 않은 상태로, 더 긴 분량으로 출판되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각각의 단어들은 그 더 긴 분량의 책의 어느 특정 페이지 위에 나타나 있을 것이다. 잘려 나간 단어들의 수는, 실제 모습 그대로의 책 전체와, 길이를 줄이지 않았을 경우의 책 전체를 비교함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어느 특정 페이지를, 길이가 줄어들지 않은 책에 포함되었을 특정 페이지와 비교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유사하게 당신의 삶을 단축시키는 것은, 그것이 당신에게 해를 입힐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당신에게 손해를 입힐 수 있다. 그것이 당신에게 손해를 입히는가를 결정하려면, 우리는 당신이 사는 짧은 삶의 좋음 전체와, 당신이 그때 죽지 않는다면 누릴 수 있을 더 긴 삶의 좋음 전체를 비교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믿는다면, 짧은 삶의 좋음은 그 삶 가운데 일어나는 좋거나 나쁜 감각들로 이뤄진다. 더 긴 삶의 좋음은, 바로 그 동일한 모든 감각들에, 당신이 죽지 않고 살게 되는 나중 기간의 삶 가운데 당신이 갖게 될 좋거나 나쁜 감각들까지 보탠 것으로 이뤄진다. 만일 당신의 삶이 잘 진행된다면, 아마도 이 나중의 감각들은 주로 좋은 감각들로 이뤄질 것이다. 따라서 그 경우 더 긴 삶은 짧은 삶보다 더 나은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 경우 당신은 당신 삶의 단축으로 인해 해를 입게 된다. 하지만 앞에서 예로 든 책의 길이가 줄어들었을 때 그 책의 어느 페이지도 단어들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그러한 해를 당하게 되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실제로는 죽음이 정상적인 경우라면 당신에게 해를 준다는 점을 함축한다. 하지만 그는 죽음이 반대를 의미한다고 생각했고 잘못을 범했다.
그의 논증은 실패했다. 그는 죽음이 당신에게 해를 입히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점에서는 옳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죽음이 당신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
나는 위에서 “에피쿠로스의 논증”에 대해 말했다. 헌데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당신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려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는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그저 당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죽는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해를 입힐 수 있더라도 당신이 그 죽는다는 사실을 염려하지 말아야 할 수는 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에피쿠로스가 생각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만일 죽는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해를 입히게 된다면, 당신은 당연히 그것을 염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당신이 무엇을 염려하는가에 달렸다. 죽는다는 사실은 당신에게 해를 입히게 될 것이지만, 당신은 당신에게, 그러니까 당신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염려하지 말아야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동안 이어지는 삶을 사는 인격체이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염려한다는 것은, 그 삶 전체를 염려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것을 염려해야 하는가? 또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왜 현재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가? 물론 당신이 염려하는 일은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다. ...
나의 의도는 에피쿠로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나의 관심은 삶을 계속 살아가는 것이 당신에게 무슨 좋음을 주는가 하는 물음에 있다. 이것은 당신의 좋음에 관한 물음이다. 삶 전체를 살아가는 당신이라는 인격체에 관한 물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특정 시간에 당신이 무엇을 염려해야 하는가에 관한 물음이 아니다. ...
나의 물음은, 죽는다는 것 - 살기를 중단하는 것 - 그것이 당신에게 해를 주는가이다. 나는 에피쿠로스의 언급 속에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만한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지를 문제 삼아 보았다. 그의 발언들은 논증을 위한 소재를 제공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논증은 실패했다. 그렇다고 해서 죽는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실제로 해를 입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아직까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만한 근거를 발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이제는 그 질문, “당신의 삶은 당신에게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에 대한 반대 입장의 대답을 생각해 보자. 그 대답은 “모든 것”이었다. 당신이 죽고 나면 당신은 아무것도 갖지 않게 된다. 따라서 죽는다는 사실에 의해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것이 그 대답의 배후에 놓인 생각이다. ...
넬슨 장군의 팔(arms)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자. 그는 테네리페의 산타 크루즈(Santa Cruz de Tenerife)를 공격하기 전에는 오른 팔을 갖고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그 공격에서 자신의 오른팔을 잃었다고 올바로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는 또 트라팔가 해전에서 전사하기 전에 왼팔을 갖고 있었다. 그 이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는 트라팔가 해전에서 자신의 왼팔을 잃었다고 결론 내린다면 이는 올바른 결론일 수 없다. 그는 그것을 거기서 잃지 않았다. 그의 왼팔은 그의 몸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트라팔가에서 일어난 일은 넬슨이 존재하기를 멈추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사실로 인해 만일 내가, 그 전쟁 이후 그는 왼팔을 갖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이는 특수한 의미에서는 참이 된다. 하지만 그의 왼팔이 비록 그 소유자를 잃어버렸지만, 그 소유자가 자신의 왼팔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특정한 시간에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보통 당신이 그 시간 이전과 이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당신의 죽음 이전과 이후에 모두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에, 당신이 죽음에 의해 모든 것을 잃는다고 말하는 것은 참이 아니다. “모든 것”이라는 대답은, 당신의 삶이 당신에게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올바른 대답이 아니다. ...
그 대신 우리는 당신이 특정한 시점에 죽는다고 가정했을 때 당신이 가진 것과, 그때 당신이 죽지 않을 경우 가질 수 있을 것을 비교할 수는 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당신이 가진 것”은 당신이 특정한 시간에 가진 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삶 전체를 통해 당신이 가진 것을 의미하게 된다. 당신이 죽음으로 인해 잃는 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모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당신이 죽을 수도 있을 때 죽지 않는다면 누리게 될 더 긴 삶의 일부일 뿐이다. 죽음은 당신의 삶을 종료시키는 것이지 그것을 빼앗아 가버리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라는 대답은 당신의 삶이 당신에게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는 생각을 부추긴다. 하지만 당신은 그 생각을 믿지 말아야 한다. 어느 누구의 삶도 무한한 가치를 가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인간은 오로지 유한한 길이의 삶만을 누린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오로지 유한한 수의 일들만을 경험하고 성취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이 죽음으로 잃는 것은 좀 더 긴 삶과 좀 더 짧은 삶 사이의 유한한 차이이다.
삶을 계속 유지함으로 해서 당신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역으로 표현하면, 죽음에 의해 당신이 잃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당신이 계속 살아갈 때 당신이 가지는 삶의 가치와, 당신이 죽게 될 경우 그 짧은 삶에서 가지는 가치 사이의 차이이다. 그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모든 것”과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또는 “무한대”와 “제로”라는 양 극단 사이에 놓여 있다. 그것은 “어떤 것”(something)이다.
하지만 “어떤 것”이라는 대답도 부족하다. 우리는 그것이 얼마 만큼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