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판사가 페이스북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올린 정치적[?] 발언들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기사를 보면서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아주 자연스럽게 …
내 대답은 이렇다.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언제나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만이 인류에게 계몽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자주 매우 좁게 제한되는 것이 허용된다. 그것 때문에 계몽의 진보가 특별히 방해받지 않고도 말이다. 그런데 내가 이해하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란 어떤 사람이 배운 자로서 이성을 전체 독자 앞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내가 이성의 사적인 사용이라 부르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맡겨진 어떤 시민사회적인 지위나 공직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공동체의 이해가 걸려있는 다수의 사안들은 어떤 메커니즘을 필요로 하는데, 이때 그 공동체 일부 구성원[=공복]들은 이 메커니즘에 의해 그저 수동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그들로 하여금 공공의 목적을 수행하게 하고, 또는 적어도 그 목적을 파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들의 부자연스런 동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당연히 이성적으로 따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복종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메커니즘의 일부분이 동시에 전체 공동체의 일부분 내지 세계시민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간주되는 한에 있어서는, 그러니까 다시 말해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저작물을 통해 본래적인 의미의 독자층에게 다가갈 경우에는 분명 이성적으로 따질 수 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가 수동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사안들이 해를 입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근무 중의 장교가 상관으로부터 어떤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이 적합한지 혹은 유용한지에 대해 시끄럽게 논란을 벌인다면 이는 매우 해로운 일이 될 것이다. 그는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전시 근무의 잘못에 대해 토를 달고 독자의 판단에 호소한다면 이는 정당하게 금지될 수는 없는 일이다.”
“계몽을 위해서는 자유만이 필요하다. 이때의 자유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 가운데에서도 가장 해가 없는 자유인데, 모든 분야에서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곳에서 ‘이성적으로 따지지 말라!’(räsonniert nicht!)는 소리를 듣는다. 장교는 ‘따지지 말고 훈련이나 하라!’고 말하고, 세무공무원은 ‘따지지 말고 세금이나 납부하라!’고 한다. 또 성직자는 ‘따지지 말고 그저 믿기만 하라!’고 소리친다. … 도처에 자유에 대한 제한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제한이 계몽에 장애가 되고, 어떤 제한이 계몽을 방해하지 않고 도리어 촉진하는가?
칸트가 이성의 사적 사용과 공적 사용을 그 당시나 오늘날의 관용적인 의미와 의도적으로 반대로 쓰고 있다는 사실은 “Ich verstehe aber … ”, “nenne ich …” (그런데 내가 이해하는 …, 내가 부르는 …) 등의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아마도 그는 인간 이성의 한계와 동시에 그 보편성을 강한 어조로 피력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성은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으며 특정인이나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 개인의 그것은 비록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모든 사람들의 이성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 따라서 이성을 공식적인 사안과 관련해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오히려 개인의 사적인 판단과 의사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
그나저나 페이스북 공간은 대개 사적인 용도로만 쓰이는 공간이니 맘만 먹는다면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 가능한 장소일 거 같다마는 - 물론 우리 영감님들이 아마추어 정객(政客)으로서의 객기를 자제하고 논객으로서의 진지성을 보여주었는가는 별문제이지만 - , 수업 보조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는 이 블로그는 어떻게 봐야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