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랜 라하브, 플라톤의 동굴에서 벗어나기

Kant 2023. 7. 27. 15:26

철학의 임무는 사람들이 자신의 좁은 경계를 넘어서 더 큰 실재를 향해 나아가도록 돕는 일이다. ... 우리의 좁은 한계 너머에도 다른 인생이 있다는 가장 명백한 암시는 일반적인 불만감일 것이다. 불만감은 우리에게 ‘인생에는 나의 좁은 동굴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불만감이 나의 동굴 전체에 대한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다양한 불만감은 동굴 안의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 대한 것들이고, 그것들은 나의 평상시의 상황 안에서 지엽적인 변화를 향한 욕망을 표현한다. 예컨대 나는 더 많은 월급, 더 많은 휴가와 편안한 시간을 원하며, 나의 동료들이 내게 고마워하기를 바라고, 내 외모가 더 잘생겼으면 하고 바란다. … 그러나 때때로 불만감은 더욱 포괄적이고 더 근본적이다.

철학하는 과정은 항상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계의 포로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한다. 내 삶이 얼마나 제약되어 있는지를 깨달을 때, 세상에 관련된 좁은 울타리를 인식할 때, 나는 비로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수 있다. 오직 자신이 플라톤의 감옥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삶을 성장시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플라톤의 동굴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일까?

 

한계란 무엇인가?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다시 말해 주변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에, 그리고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과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에, 그리고 삶의 전반에 대한 이해에 끊임없이 의존한다. 우리가 만족해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어떤 상황을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이고, 근심하거나 희망을 품는 것, 또 이런저런 견해를 선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누군가 빙판길 운전을 두려워한다면, 그는 그 운전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이웃에게 화가 난다면, 그것은 이웃의 행동이 불공정하거나 공격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만일 우리가 슈퍼마켓이 식자재를 파는 곳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장소에서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환경에 대한 복잡한 이해의 얼개가 없다면, 우리는 적절하게 기능하고 느낄 수 없다. 보통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어떻게든 이해는 해야 한다.

 

내가 가진 이해 가운데 일부는 특정 가족, 이웃, 자동차 또는 집 등 특수한 사실에 관한 것이다. 좀 더 일반적인 다른 이해도 있다. 예를 들면 가게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등에 관한 것처럼. 하지만 좀 더 특별한 종류의 이해가 존재한다. 다른 이해의 유형들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서, 삶의 기초가 되는 기본 원리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그것들은 삶의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대답들이다. 삶의 기본 물음들이란 예컨대 ‘인생에서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은 무엇인가?’, ‘자유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공정, 책임, 죄책감의 의미는 무엇인가?’, ‘진리,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러한 기본적인 물음들을 접하고 그것에 반응한다. 추상적인 사상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주로 우리의 일상적인 감정, 생각, 행동을 통해 그렇게 한다. 우리의 계획, 선택, 질투, 분노, 희망, 욕구―이런 것들과 다른 많은 것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대하는 우리의 구체적인 방식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일 중독자라면, 내가 끊임없이 일해야 할 필요성 자체가, 내가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나의 표현이다. 일 중독에 빠진 나의 충동은 이렇게 말한다. 생산성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이 행동은 도덕적 책임에 대한, 즉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나의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이 같은 이해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이와 유사하게, 만약 내가 나의 배우자가 나의 정치적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불쾌감을 느낀다면, 이러한 태도는 사랑에는 동의가 필요하다는 내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간단한 코미디나 세련된 영화를 보는 것,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책을 읽는 것 등과 같은 나의 선택은, 삶에서 가치 있는 것에 대한 나의 이해를 표현한다. 이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타인을 끊임없이 해석하며, 삶의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반응한다. 보통 그것을 완전히 의식하지는 못한 채로 말이다. ...

 

리사와 엠마의 사례

 

리사와 엠마는 같은 지역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대학생들이다. 이들은 몇 달 전부터 그곳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즉시 서로에게 편안함을 느꼈다. 그들은 곧 친구가 되었고 함께 점심을 먹거나 강을 따라 산책하기 위해 식당 밖에서도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이 깊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부터 어느 정도의 긴장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너는 나한테 너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구나”라며 리사가 종종 불평한다. “뭐든 말해봐.”

“예를 들면? 난 네가 재미있어할만한 이야기가 없어.”

“예를 들면, 네가 오늘 무얼 했는지, 아니면 부모님이 어떤 분들이신지 같은 거 말이야.”

“저런, 리사 그런 건 지루하잖아.” 엠마는 늘 이런 식이었다. 이제 리사는 대부분 자기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녀는 엠마가 듣기 지칠 때까지 그녀에게 오늘 아침에 한 일이나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아주 자세히 이야기하곤 했다.

엠마는 자기가 개인적인 것을 리사에게 숨기려 한다고 여기지는 않았고, 단지 그것이 대화하기에 흥미롭지 않은 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함께 뭔가 재미있는 걸 하자!”라며 그녀가 말한다. “목도리를 사러 가는 건 어때? 아니면 탁구 한 게임을 하거나. 어릴 때 쳐봤다고 했잖아.”

어느 날 리사는 우연한 기회에 엠마가 그녀의 남자친구와 이 주 전에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리사는 엠마가 자신에게 그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상처받는다.

“넌 내가 너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괴로워하며 내뱉는다. “네게 일어난 일에 대해 굳이 말하려 들지 않으면서 어떻게 내 친구가 될 수 있지?”

 

우리가 이 두 젊은 여성들의 태도를 들여다보면, 그들이 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정에 관한 서로 다른 “이론들”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리사에게 우정은 세상을 공유하는 것을 뜻한다. 일상생활, 기쁨과 고통, 걱정과 희망 등에 관한 크고 작은 세부 사항을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엠마에게 우정은 즐거운 일을 함께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르게 말하면, 리사의 우정에 대한 “이론”에서 친구를 함께 묶어주는 “끈끈함”은 서로 나누는 것이고, 엠마의 말에 따르면 이 끈끈한 유대감은 재미를 뜻한다.

흥미롭게도 그 두 사람 중 아무도 우정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우정을 정의해 보라고 한다면, 그들 중 아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감정, 기대와 행동은 우정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표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