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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로스쿨 유감

Kant 2009. 4. 16. 20:48

로스쿨이 출범했다. 말도 많고 반대도 많았던 로스쿨이. 인문학에 종사하는 사람 입장에서야 쌍수를 들고 환영할만한 제도라고 여겼고, 로스쿨 선정에 대비, 학과 차원에서 나름 준비한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출범하고 보니, 첫 학기부터 실망감을 금하기 어렵다. 본래의 도입 취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이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현재도 한시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사법고시제도 하에서는 일반적으로 법조인에게서 기대되는 소양을 갖춘 법률가를 양성하기 어렵다는 인식에서 도입된 제도가 로스쿨일터, 그러한 고려의 핵심은 법률가에게 필요한 조건들, 예컨대 다양한 전공 분야에 대한 지식이나 안목, 사회적 경험, 응용력 내지는 사고의 유연성 등에 있다고 생각된다. - 도덕적 감수성을 거론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전관예우란 용어만 봐서도 우리의 율사들에게 꼭 필요한 소양 같은데... . 간단히 말해 사시제도가 두세 차례의 시험 성적만으로 그러한 조건을 갖춘 인재를 선발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고안된 대책이 로스쿨일 것이다.


여러 가지 실망의 이유들이 눈에 띤다. 고비용의 문제, 합격자 출신 대학이나 심지어 출신(거주?) 지역의 편중 현상, 특정 스펙만을 집중 고려하는 선발 기준 등 ...


그러나 아직까지 상당수 로스쿨 설치 대학들이(서울대부터!) 학부의 법학과를 폐지하는 대신 자유전공제(자유전공학부)라는 시스템을 채택한 사실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사례는 그리 흔치 않아 보인다. 물론 일부 로스쿨 탈락 대학 관계자들이 “자유전공제가 결국 로스쿨 준비과정으로 변질할 우려”가 매우 크므로 “이를 방치하면 전국의 로스쿨이 상위 몇 개 대학 출신들로만 채워지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는 했다.1) 자유전공학부는 “사실상 프리로스쿨”이라 것인데, 표면상으로는 “글로벌 인재 양성”, “다빈치식” 교육 등을 목표로 내세우기는 하지만 인문학이나 기타 광범위한 기초학문들에 대한 다양한 학습 기회 제공보다는 인문학 강좌를 핑계로(논리적 글쓰기나 논리학 관련 강좌) 법학적성시험에 필요한 테크닉 전수에 치중하리라는 지적이다. 사실상 학부 과정에서 두 개의 복수 전공을 제대로 공부하기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향후 법대를 로스쿨 진학생들을 위한 커리큘럼으로 운영해야할 로스쿨 탈락 대학들의 입장에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위기감”도 감지된다.


자유전공학부의 도입 취지가 주로 법학전문대학원이나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할 학생들을 확보하여 집중 훈련시키는 데 있다는 사실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특히 모교출신 입학생 수가 법정 제한 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로스쿨 설치 대학들의 경우 과감한 장학금 지급을 비롯한 각종 혜택을 약속하며 자유전공학부에 조금이라도 수능 성적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려 안간힘을 쓰는 것은 어쩌면 이미 예상되었던 일인지 모른다. 스카이 출신자들 선발해 기껏 법조인으로 만들어 놓으니 법학전문대학원에 대한 의리(학연?) 지키기보다는 서울 올라가 버릴 공산이 더 크고, 결국 ‘닭 쫓던 개’ 되는 꼴 아니냐는 논리다. (근데 변호사 개업하는 사람이야 그럴 수 있지만 판검사들은 순환근무하지 않나?) 암튼 유치한 발상 같다. 우리 사회를 여전히 학연과 지연으로 묶고자 하는 발상.


더 큰 문제는 기존의 학부 전공 소속 학생으로서 자기 전공에 애정을 갖고 공부하는 인재가 바로 자신의 학교에 의해 버림 받는 꼴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등록금이 일부라도 옥상옥(屋上屋) 구조 속의 동급생들을 특별 관리하고 대우하는 데 쓰인다면, 어떻게 이해를 구할 수 있을까? (Who brought owls to Athens?) 스스로 길러낸 인재는 어차피 자격 미달이니 이미 될 성싶은 자질을 지닌 소수를 따로 선발하자? - 교육자로서의 자신의 자격 미달을 자인하는 꼴 아닌가?


그래, 그리 불만이면 니들도 똑똑한(?) 제자들 키워서 로스쿨 보내면 되지 않냐? 맞는 말이다. 단,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사실상의 프리로스쿨을 폐지하고, 전문대학원에 뜻을 두고 있는 일반 학부생들에게 적절한 배려를 해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leet 시험의 문제 성격도 한두 해 동안 문제 맞춤형 기술을 습득한 사람보다는 장기간에 걸쳐 고민하며 공부한 사람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최소한 지문만에라도 법철학 관련서들을 비롯한 고전을 많이 포함시켰으면 좋겠다. 중고생 수준 수학 문제들로 도배하지 말고!) 다양한 스펙의 인재들에 걸맞은 다양한 선발 기준을 도입하자는 의견도 경청되어야 하리라 본다. 지식도 지식이지만 인간학적 경험이야말로 법률가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 즉 판단력을 키우는 수단 아닌가. “국가시험 합격률 낮아질까봐 스카이 출신 어린애들만 뽑았다”는 얘기를 그저 인터넷에 떠도는 악플 정도로 무시해도 좋을까?


인문학적 기초가 무시되고 효율성만 강조되는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아니 아예 관심조차 없는 인간들만 사는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혹자는 묻는다. 그럼 철학은 이제껏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문제에 무슨 해결책을 주었냐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접근하려는 자세의 중요성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한 경제학도 - 이번 사태를 기회로 경제학의 학문적 진정성에 대한 반성을 하는 경제학자가 아직 희귀하다는 사실이 참 희귀한 일 같다 - 따지고 보면 문제가 잠재한 상황을 문제시 하지 못한 (외면한?) 경직된 사고에서 기인한다. 아마도 지난 수십년 동안 세계 경제 질서를 지배해 온 정치적 논리에 휘둘려 권력자들의 구미에 맞는 경제 이론이나 정책들을 쏟아내 온 경제학만이 경제학으로 대접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어떤 학문 분야에서든 기존의 주도적 흐름에 - 그게 예컨대 ‘신자유주의’로 불리든 뭐라 불리든 - 순응하지 못하는, 아니 그런 흐름을 약삭빠르게 선도해 나가지 못하는 학문 작업은 연구지원에서부터 원천 소외되고 배제되는 학계 상황도, 결국은 결과만을 바라보고 효율만을 사모하는 비양심적 학문 풍토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 인문학 주제의 연구 지원 신청 계획서에서까지 “기대되는 학문적 사회적 효과”를 쥐나는 머리를 쥐어짜서라도 채워야만 한다는 “연구윤리”는 대체 누구 작품인지 아직도 궁금하다.


작금의 금융위기에도 여전히 전문가들이 그의 훈수(예언?)에 주목하는 George Soros는 LSE에서 칼 포퍼의 제자로 철학을 공부했고 지금도 철학자로 자처하고 있다 한다. 또 영혼이 있는 투자의 대가로 불렸던 André Kostolany(99년 사망)도 철학과 예술사를 전공했으며, 이제는 별로 매스컴에 오르내리지 않지만 한때 HP의 실세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던 Carly Fiorina도 철학과 중세사를 전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무얼 시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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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률신문 2008년 6월 28일자 기사 참고. 
    (‘http://www.lawtimes.co.kr/LawNews/News/NewsContents.aspx?kind=&serial=40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