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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해부학 또는 지형학?

Kant 2024. 8. 30. 12:10

슬퍼할 때 나는 무엇보다 먼저 ‘나의 훌륭한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명제를 냉정하게 받아들인 다음 슬퍼하기 시작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그처럼 끔찍한 사건에 대한 실제적인 완전한 인정이 격동이다. 앞에서 묘사하는 그대로 말이다. 즉, 가슴에 못을 박는 것 같은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현상(appearance)이 거기에 앉아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할 거니?’하고 묻는 것이다. 비록 여전히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건강을 회복한 엄마의 모습이 또한 거기에 앉아 있었다. 만약 죽음의 이미지를 수용하려고 가까이 가면, 만약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면, 바로 그 순간에, 바로 그러한 인지적 행위 자체 속에서 나는 세상의 못을 내 가슴에 박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음의 격동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격동 자체였다. 그렇게 동의하는 행위 자체가 자극적인 나의 조건을 갈갈이 찢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판단을 현상에 대한 동의라고 말해왔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즉, 감정은 동의하는 행위일까 아니면 그러한 행위로부터 유래하는 상태일까? 보다 일반적으로 믿음과 판단에 대해서도 동일한 쟁점이 제기된다. 둘 다 많은 종류의 상황이 지속되는 내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처음에는 수용 행위가 존재하고, 판단은 그러한 행위라는 관점에서 규정되지만, 그동안 이어지는 상태, 말하자면 그러한 내용을 내부에 갖고 있는 상태도 존재한다. 지속적으로 그러한 명제를 받아들이거나 그에 동의하는 것이다. 감정은 정확히 이러한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즉, 우리는 처음에는 어떤 명제에 동의하거나 인정하며, 그런 다음 우리의 인지적 구성의 일부로 그것이 존재하게 된다. 슬픔의 경우 이미 일어난 일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부정하려는 것이 인간의 성향인 이상 해당되는 명제가 확실하게 자리잡기 전에 여러 차례 받아들이는 행위를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감정의 삶의 일부이다. 마치 먼저 수용한 다음 뒤이어 유지해 가는 것이 모든 판단의 삶의 일부이듯이 말이다.

 감정은 에 대한, 가 세우고 있는 목표와 계획이라는 사실에 대한 제거 불가능한 참조를 포함하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 ‘문맥 의존성’(indexicality)에 대한 페리(John Perry)의 유명한 논의를 참조하라. 페리의 유명한 예를 보자. 그는 식료품점에 있다. 그는 설탕이 바닥으로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설탕의 흔적을 따라가 보기로 결심하는데, 그러면 가게 주인에게 봉지가 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흔적을 따라 가게를 빙빙 돈다. 그리고 마침내 설탕이 흘러나온 곳은 자신이 밀고 다니는 식료품점 카트임을 발견한다. 페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다. 즉, 그것이 그라는 발견은 단지 해당되는 사람의 이름의 발견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와는 다른 종류의 발견으로, 문맥 의존 지시어들 자체 없이는 그것을 묘사할 수 없다. 페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즉, 만약 그가 ‘존 페리가 가게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면, 더 이상 왜 자신이 멈추고 자기 카트를 살펴보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덧붙여야 할 것이다. 다시 맥락 의존성 지시어를 떠올려 “그리고 나는 내가 존 페리라고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페리를 따라 감정은 고전적 의미에서 명제적 태도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고전에서는 명제가 맥락으로부터 분리 가능하며, 단지 한 사람에게 한 번만 진리의 가치를 갖기보다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진리의 가치를 가진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감정은 분리 불가능한 몇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핵심은 그렇지 않다.]
 
감정은 세상을 의 관점에서 본다. 이 분이 엄마라는 사실은 단지 세상에 대한 다른 어떤 사실과 같은 게 아니다. 바로 그것이 전체 상황의 지형학의 구조를 결정하며, 이 요소를 포함하지 않고는 감정을 포착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베티 크레이븐이 죽었다는 사실과 같은 게 아니다. 그것은 베티 크레이븐이 엄마라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감정과 관련된 가치 평가는 어떤 비당파적 관점이 아니라 나의 관점에서의 평가이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제거 불가능한 참조를 포함한다.

 
‘어마어마하게 소중한 사람이자 내 삶의 중요한 일부였던 엄마가 돌아가셨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조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현실에서는 단일한 판단이 아니라 많은 수준의 일관성과 특수성을 가진 판단들―일부는 배경에 남아 있고, 일부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일부는 상황적 판단에 의해 좌절되고 무효화되는 기대들이다―의 망(a network)이 우리 손에 놓인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조야한 정식화는 슬픔이라는 특수한 에피소드가 가치에 대한 배경적 판단―이것은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을 주목한다―을 어떤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결합시키는 방식을,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와 애착을 지각된 현실과 결합시키는 방식을 드러낸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즉, 어쨌든 나는 단순히 ‘나의 삶의 엄청나게 소중한 분이 사라졌다’는 식의 일반적인 판단이 아니라 많은 구체적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나의 구체적 판단들은 그러한 일반적 판단을 함축하며, 나는 바로 그러한 판단의 관점에서 슬픔을 식별하고 규정하고 싶어 한다. ...
 
우리 견해는 감정이 절실함과 급박함을 가진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목표와 계획, 이 세상과 관련해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인지가 가치평가적인 동시에 행복주의적임을 강조하지 않은 채 감정을 인지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견해는 급박함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나의 견해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 나의 논적보다 급박함을 더 잘 설명한다. 만약 한바탕 부는 바람을 맞는 것에 어떤 급박함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비인지적 급박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급박함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생각 없는 힘이 아니라 나의 안녕이 그러한 힘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유래한다. 내 견해는 안녕에 대한 생각을 바로 감정의 구조 속에 끼워 넣음으로써 급박함과 절박함을 가진 것이 왜 어떤 감정에 대한 추가적 반응이 아니라 감정 자체인지를 보여준다.
 
둘째로, 감정에서의 수동성의 경험은 감정의 대상이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가진 사실에 의해 잘 설명된다. 즉, 어떠한 것이나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러한 대상의 행동과 안녕을 우리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지만 우리 자신의 압력의 상당 부분을 그것들에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것들은 우리 행운의 인질들이다. 어떤 감정을 가질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삶의 사건에 대해 우리 자신이 수동적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
 
감정을 우리에게 부딪히는 논리적 대상처럼 만드는 어떠한 견해도, 세상에 상처를 주거나 치유해 줄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과 함께 어떤 감정을 느끼는 자아 속으로 들어오는 방법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
감정이 종종 소중함을 평가하고 따지는 현재의 방식과는 연결되지 않은 외적 에너지처럼 느껴지는 두드러진 이유 중에 하나는 그것이 가끔 불완전하게 이해된 과거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대상 관계에서 유래하는 중대한 감정적 소재를 우리 안에 보존해둔다. 종종 우리는 그러한 내력을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으며, 거기에 어떤 감정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말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감정은 지속적으로 동기를 부여하며, 종종 표면으로 떠오르는데, 어떤 때는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강도로, 다른 때는 현재와 관련된 다른 평가나 감정과 갈등을 일으키면서 그렇게 한다. ... 우리는 대상에 특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지향적 태도로 생각하지 않고는 그러한 감정을, 그것이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 ...
 
실제로 애도의 경험은 대부분 반복적으로 인지적 좌절에 마주쳐 그 결과 어떤 사람의 인지적 구조를 다시 짜는 경험이다. 나는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엄마에게 말하기 위해 막 전화를 들려는 자신을 발견한다.―그러고는 코에 튜브를 꼽은 채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 모습을 눈앞에 떠올린다.―엄마가 일정한 역할을 한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는 엄마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그런 다음 나는 이 경험들을 중단하고 재배치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슬퍼하기의 이러한 특징을 프루스트는 아주 인상적으로 논하는데, 이제 그것은 애도에 관한 심리학적 문헌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아내 헬렌을 어떤 식으로 애도했는지를 설명하는 루이스의 일기에서 이에 대한 생생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왜 슬픔이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제는 습관적이 된 수많은 충동의 좌절로부터 유래한다. 모든 생각 하나하나마다, 모든 느낌 하나하나마다, 행동 하나마다 H를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이제 그것들의 과녁이 사라졌다. 나는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줄에 활을 메긴다. 그런 다음 ‘아, 그렇지’ 하고는 활을 내려놓아야 한다. 무수한 길이 H에게로 향해 있다. 나는 그러한 길 중의 하나에 들어선다. 하지만 이제 거기에는 통과 불가능한 국경―검문소가 존재한다. 한때는 무수한 길이 있었지만 이제는 무수한 막다른 골목만 있을 뿐이다.”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내가 잊어버려야 할 것은 한 사람의 알베르틴이 아니라 무수한 알베르틴이다."]

이 특징은 애도 과정이 내게서 엄마가 매일의 정상적인 일부였던 여동생에게서와는 다른 형태를 띤 이유를 설명해 준다. 비록 우리 둘은 똑같이 엄마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했지만, 당신을 둘러싸고 형성해 온 기대 구조는 동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 즉 인지적 차이가 그 분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비율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
 
2000년 8월인 지금 ‘내가 잘 사는 데에서 엄마가 중요한 요소이다’라는 판단은 1992년만큼은 더 이상 사실이지 않다. 나는 지금 이전보다 더 ‘죽은 사람이 나의 삶의 중심적인 일부였다는’ 명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러한 판단의 변화 자체는 슬픔의 감소의 큰 부분을 이룬다. 몇 가지 것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즉, 엄마의 내재적 가치, 당신에게 일어난 일이 유감이라는 사실, 당신이 내 내력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판단이 그러하다. 심지어 엄마를 현재의 나의 삶에서 전적으로 없애버리지는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결국 엄마에 관해 글을 쓰고 생각하는 것을 좀체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측면에서 나의 경험은 여전히 상실의 경험이다. 하지만 당신을 나의 삶의 다른 장소에, 당신이 돌아가셨다는 사실과 양립 가능한, 따라서 대화와 사랑과 지원의 지속적으로 적극적인 상대방은 되지 않는 장소에 모시게 되었다. 나의 믿음의 행복주의적 요소들은 바뀌었으며, 이와 함께 상실을 겪었다는 믿음의 행복주의적 측면도 바뀌었다. (정상적 애도를 병리적 애도로부터 구분해주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긴장의 이러한 변화라고 덧붙일 수 있다. 병리적 애도자는 망자를 계속해서 자신의 목표와 기대들의 핵심 자체에 놓는데, 그것이 삶을 마비시킨다.)

 
이것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데, 프루스트는 그것을 감동적으로 논한다. 상실 이후에 우리는 삶의 직조물을 다시 짜고, 우리 목표와 열망을 중심적으로 규정했던 생각들의 시제가 바뀔 때 그만큼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동 자체가 투쟁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것은 자아의 상실이며, 자아는 망각과 진정을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우리를 안아주고 위안을 준 것을 원초적으로 그리워한다. 심지어 잠옷 같은 특수한 세부사항에만 매달릴 때도 그것은 위안과 지지의 복합적인 행복주의적 상징들이다. 그것은 감각적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위안과 지지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기 때문이지 단순히 기억 자체가 그 자체로 사라져 그로 인해 위안과 지지에 대한 욕구가 줄어들도록 만듦으로써가 아님을 암시한다. ... 무엇인가를 촉발시키는 어떤 지각이 엄마의 가을 코트나 ‘마사’하고 부르는 당신의 방식, 또는 당신의 헤어스타일을 연상시키면―이 기억들은 그 자체가 중요해서보다는 위안과 사랑의 부재를 상기시키기 때문에 고통을 자아낸다. 나의 엄마가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과 결부되었다면 그러한 기억들은 내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무수히 많다. 이러한 기억들이 나를 삶에 생긴 빈자리를 메우지 못한 사람, 필사적으로 그러한 위험과 지지의 원천을 필요로 하는 사람, 그리고 당신이 사랑했던 바로 그 사람의 상태로 다시 던져버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
 
내가 엄마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또한 세네카를 읽으며 훌륭한 스토아주의자가 되려고 힘써 행복을 위해서는 덕행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슬픔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애쓴다고 가정해보자. 우리 논적의 견해에 따르면, 나의 무심한 감정적 부분이 슬퍼하는 일을 하는 한편, 나의 이성은 철학적 사유를 생각하며, 또한 어쨌든 내가 슬퍼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대신 신스토아학파적 견해라면 이 갈등을 앞서 일어난 손실의 중요성을 인정하려는 태도와 부인하려는 태도 사이의 논쟁으로 간주하도록 촉구할 것이다. 한때 나는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중요한 사람이 내 삶에서 떠났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다른 때는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인간 존재도 그렇게 소중하지 않아’. 또는 ‘그는 그저 다른 많은 사람처럼 언젠가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 불과할 뿐이지 뭐.’ 또는 (만약 내가 그럴 정도로 도덕적으로 잘난 체 한다면) ‘넌 아직도 훌륭한 성격을 갖고 있어,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바로 그거야.’ 그런 다음 그렇게 자주 집에서 본 대로 병원 침대에 누워 계신 엄마 생각이 돌아왔다.―그리고 나는 당신이 다른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으며, 내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걸 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내 삶에서 떠났다는 데 동의한다.(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감각의 세부 사항은 중요성을 상기시키며, 가치에 대한 스토아학파적 그림에 반대하며 무대에 등장한다.)

슬픔이 지속된 것은 내가 희망에서 슬픔으로 마음을 바꾸기로 선택해서가 아니라 나의 통제를 벗어난 사건이 … 나를 슬픔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 이 감정은 기저에 깔린 가치 평가 자체와 관련해 … 삶에 의해 제공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감정을 기준으로 바라본 세계의 지형학은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다. 통제 불가능한 움직임, 그리고 높이와 깊이의 차이들이 그것이다. ...
 
감정에 대한 모든 인지적 견해는 감정은 어떤 사람이 대상을 평가하는 방식의 변화에 의해 수정될 수 있음을 함축한다. 그것은 이 견해에서 미덕은 (칸트처럼) 힘의 문제로 구성되고, 또 의지가 단순히 인격의 야수 같은 충동적 요소를 억제하는 것으로 이해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대신 우리는 그것이 인격의 깊숙이까지 파고들어 그것을 속속들이 조명해 주는 이유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성 혐오적 분노와 증오를 품고 있다면, 생각의 변화는 행동뿐만 아니라 또한 감정 자체의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은 가치 판단에 따라 세상을 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

분명히 스토학파는 이미 감정적 삶은 바뀌기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이 학파의 인지적 견해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오직 수행해야 할 과제가 존재한다는 것이었을 뿐, 그것이 쉽게 완수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그것은 전혀 완료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미덕에 대해 쓴 현대 작가 중 머독은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증오하는 또는 싫어하는 사람을 보는 방식을 바꾸려면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끈질기게 바꾸려는 노력과 함께 고통스러운 내적인 도덕적 작업이 요구되는지를 강조한 바 있다. 다름 아니라 그것들이 습관적이고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변화가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견해는 앞의 견해들보다 더 멀리 나가는데, 나는 감정이 바뀌기 어려운 것은 습관,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인지의 초창기 뿌리 때문인 것으로 본다. 나의 견해는 우리는 감정-생각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를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바꾸지 않는 것에 많은 것을 투자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M. Nussbaum (조형준 옮김), 『감정의 격동』(Upheavals of Thought: The Intelligence of Emotions) 중에서. 번역 일부 수정.

 
[대체적으로 너스바움은 탁월한 감정 분석(특히 슬픔의 감정 분석) 에도 불구하고, 정신 분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특히 감정적 삶에서 무의식적 메커니즘의 영향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을 보여주는 것 같다. 또 분노의 감정은 인지적 변화를 통해 통제 가능하고 비교적 수월하게 극복될 수 있는데 비해, 혐오의 감정 조절에서는 인지적 변화가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고 보는 듯하다. 행복주의를 배제하고서는 망자와 관련된 슬픔의 감정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주장도 글쎄 … 절반의 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