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관련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은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놓고 일갈하는 유시민 전 장관을 보니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의 논쟁, 그리고 새삼 “potentia”의 의미 이해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일이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도 potentia이지만 그렇게 할 수 있으면서 안 하는 것도 potentia라는 …
적극적-소극적 안락사 논쟁
<첫 사례. 스미스는 여섯 살짜리 조카에게 어떤 변고가 생길 경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조카가 목욕을 하고 있을 때 스미스는 욕실로 들어가 조카를 익사시키고 모든 게 사고였던 것처럼 꾸몄다.
둘째 사례. 존스 역시 여섯 살짜리 조카에게 어떤 변고가 생길 경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스미스처럼 존스도 조카를 욕실에서 익사시킬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존스가 욕실에 들어갔을 때 그는 아이가 미끄러져 머리를 벽에 부딪고 물속에 처박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존스는 기뻐하며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아이의 머리를 다시 물속에 처박을 준비를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저 조금 버둥거리다가 어린 조카는 혼자 “우연한 사고로” 익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존스가 지켜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가운데.
스미스는 아이를 살해했고 반면에 존스는 “그저” 아이가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이것이 그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다. 둘 중 누가 더 나은 방식으로 행동했다고 할 수 있을까? … 존스의 [아무것도 안 한] 행동이? …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임스 레이첼즈,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