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지식전문가와 지식인의 구별

Kant 2025. 4. 25. 23:55

나는 내 아들이 말솜씨를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차라리 선술집에서 말하기를 배웠으면 좋겠다. 교양과목 선생을 모시고서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라. 그는 왜 우리에게 자신이 갈고 닦은 기예의 탁월성을 느끼게 해주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어째서 우리 같은 무지랭이나 여성들로 하여금 그의 추론의 확고함과 조리 정연함을 찬탄하여 넋이 나가게 하지 않는 것일까? 왜 자기 뜻대로 우리를 지배하고 설복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이야기 소재나 전개 방법을 두고 그토록 유리한 자가 어째서 자신의 검술에 욕설과 무절제와 격노를 뒤섞는 것일까?

그가 쓰고 있는 교수님네들의 가발이며 가운, 라틴어를 벗어놓게 해보라. 당신은 그가 원문 그대로인 날것의 아리스토텔레스로 우리 귀를 두드리지 못하게 해보라. 당신은 그가 그저 우리 중 한 사람이라고 혹은 그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는 저 얼크러지고 설크러지게 엮은 언어로 우리를 밀어붙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야바위꾼이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작이다. 그들의 유연함은 우리 감각을 공격하고 압도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확신을 조금도 흔들지 못한다. 이 야뱌위짓 말고는 그들이 하는 일 중 평범하고 비루하지 않은 것이 없다. 배운 것이 더 많다고 해서 그들이 덜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학식을 소유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 나도 지식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리고 참되게 쓰이기만 한다면 지식이란 인간이 획득한 가장 고귀하고 강력한 것이다. 그러나 지식을 자신의 근본 능력과 가치로 삼는 이들, 자신들의 분별력을 기억력에 의존하게 하는 자들, "타인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는 자들"(세네카), 그리고 책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의 경우 (이런 종류의 사람들의 수는 무한대다),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나는 그 지식을 얼뜨기 짓보다 더 혐오하는 바이다. 내 나라 그리고 내 시대에서 학식이 호주머니 사정을 크게 개선시켜 주는 일은 있어도 영혼을 더 낫게 해주는 일은 드물다. 무딘 영혼을 만나면 학식은 소화되지 않은 날것의 덩어리처럼 그 영혼을 더 무겁게 하고 숨막히게 한다. 예리한 영혼이라면 학식은 쉽사리 그것을 정화시키며, 명석하게 하고, 소멸에 이를 만큼 정련시킨다.

 

학식은 중립에 가까운 속성을 가진 어떤 것이다. 잘 타고난 영혼에게는 아주 유용한 부속물이지만 어떤 종류의 영혼에게는 위험하고 해로운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너무나 귀한 곳에 쓰이는 것이라서 헐값에 자신을 소유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어떤 손안에서 그것은 임금의 왕홀이다. 다른 손안에 있으면 그것은 어릿광대의 지팡이다. ...

 

당신과는 맞서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당신 적수에게 가르쳐주는 것보다 더 큰 승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주장하는 내용이 우세하다면 이기는 것은 진리이다. 당신의 차분함과 의젓함이 우세하다면 이기는 것은 당신 자신이다.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저서를  보며 내게 드는 생각은, 소크라테스가 자신과 논쟁하는 이들을 위해 논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우티데모스와 프로타고라스에게는 그들 논쟁술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려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최초의 소재를 붙드는 것은 단순히 그 소재를 밝히기보다 더 유용한 어떤 목적을 위해, 다시 말해 이끌어주고 단련시킴으로써 사람들의 정신을 밝히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미셸 드 몽테뉴(최권행 역), 에세 3 중에서 (번역 일부 수정)
 

[이 부분을 읽다 보니, 사르트르의 지식인론은 프랑스식 전통의 산물이었음이 분명한 듯하다. 탐구와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자들을 급 겸손하게 만들고 쥐구멍을 찾게 만드는 일갈이다. 하지만 직업인으로서의 선생에게서 영혼을 고양시켜주는 일까지 주문한다면 과연 그게 어느 정도나 합당한 일일까? 물론 AI 교사와 생물학적 인간 교사는 달라야 할 테지만 말이다.

By the way, 몽테뉴가 자기 자신을 감히 예외적인 지식인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쓰는 모습은 왠지 서양의 지식인답지 않아 보이며 오히려 동양인의 처세술을 떠올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