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슈미트: 철학과 삶2

Kant 2007. 7. 6. 16:52
 
등록일 2004/11/5 (13:37)

Wilhelm Schmid: 철학이 삶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Kann die Philosophie eine Hilfe für das Leben sein? (2)

철학은 삶의 문제들을 [직접]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명료화(Klärung)에 기여한다. 명료화는 철학을 통해서(durch)가 아니라 철학의 도움에 의해(mit Hilfe) 가능한 것이다. 명료화 작업은 결정적인 명석성(Klarheit)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다시 가능하게 해줄 작업상의(operative) 명석성을 지향한다. 철학이 제공하는 명료화는 소크라테스 이래 대화를 통해 이뤄져 왔는데, 독자적인 생각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일종의 산파술(maieutike)에서 성립한다. 그것은 대화 상대자로 하여금 스스로, 일상적 삶의 숲 가운데에서 잃어버렸거나 아직 한번도 발견하지 못한 삶의 좌표(Orientierung)를 발견하게 해준다. 철학자는 이러한 삶의 대화에서 대화 상대가 되어줄 수 있다. 대화가 실제로 일어나든, 상상으로만(사유함을 통해) 일어나든 상관없다. 이때 철학의 장점은 실제로는 철학 자신의 약점, 즉 아주 버거운 문제들에 대하여 궁극적인 명석성에는 도달하지 못하며, 또 삶과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명석성에도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성립한다. (...) 바로 이 약점이 철학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철학은 다른 곳에서는 결코 다루어지지 않는 물음들을 규명하기 위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철학은 이제껏 한번도 그것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이 주어진 일이 없는 그러한 물음들이 존재한다는 경험을 매개해 준다. 또 그것은 삶의 기술이란 것이 이러한 사태의 상황에 만족해야 한다는 점에 크게 의존한다는 통찰을 자극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스런 형태의 [이른바] “삶에 대한 도움”의 제공을 약속하고, 명료화 대신 혼란을 가져다주는 자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만든다.

이 같은 대화가 오늘날과 같은 여건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알아보자. 나는 1998년 이래 취리히 근교의 한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강연과 세미나, 스터디 그룹 등을 주도해 오고 있는데, 그 대상은 환자들뿐 아니라 직원들, 의사들을 포함한다. 이 대화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스펙터클한 무엇을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대화, 거의 두드러지지 않은 내용의 대화가 이뤄진다. 대화라고 하는 단순한 사실이 이미 [대화 상대자의] 부담을 덜어주고, 고무시켜주고, 자극하고, 무언가를 해명하고, 순화시키며, 해방시키기 위해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철학의 위안”은 생각할 기회를 마련해주고 그렇게 하여 삶의 가능성을 더 잘 바라보게 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지평을 확장시키는 데에 존립한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것들에 대한 욕구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에 대해 더 많은 명료성을 얻는 것이고, “삶” 자체를 꾸려나가는 것이다.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병원의 상황 가운데에서 더 자주 등장하는 물음들이지만, 일반적으로 아무도 대화의 상대자가 되어주지 않는, 그러한 종류의 삶의 물음들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생리학적 병리학이나 심리학적 병리학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또 다른 사례는, 1997년 이래 그루지아(Georgia)의 티플리스에 있는 국립대학의 초빙교수로서 내가 체험한 사실들이다. 이때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실업률이 60%이고 사회보장 시스템이라고는 거의 없는 국가의 사람들이 어떻게 철학, 다시 말해 빵과 무관한 기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학문을 공부할 생각을 하는가이다.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의 삶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가능한 한 그 삶에, 즉 개인의 삶뿐 아니라, 그 개인의 삶이 의존하고 있는 사회적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이다. 삶의 조건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현[근]대화가 필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대화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지배적인 권력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예컨대 그루지아 사람들 대다수가 급진적인 반-현대화를 옹호하는 그루지아 정교를 믿는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철학 수업에서] 과거 기독교 교부들이 남긴 저서들을 분석함으로써, 종교가 무엇인지를 묻는데,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종교를 무조건 교리의 경직된 체계와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해석학적인 이해와 좀더 자유로운 종교관의 도움으로 현대화를 가능하게 해줄 교량을 마련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의 취약점들과 그것에 대한 가능한 해법 역시 독일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근대 비판을 통해 잘 가시화될 수 있다. 독일 낭만주의에 대한 그루지아인들의 평가는 사실 대단히 높다.

이상의 것들은 단지 약간의 [개인적인] 사례들에 불과하다. 요즘 곳곳에서는 다른 종류의 철학함이 출현하기 시작하고 있다. 많은 철학자들이 “철학적 [의료]개업”(philosophische Praxis)을 시작했으며, 도처에 “철학카페”가 존재한다. 비판적 저널학이나 기업의 윤리자문에도 수많은 철학자들이 종사하고 있다. 물론 이제 막 시작된 이러한 자유로운 철학을 아카데미즘에 구속되어 있는 철학에 대항시키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카데미적인 철학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있듯이 철학도 후학을 역사적으로나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고 학문적으로 형성해 내는 일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주 다양한 실천의 영역들을 서로 연결짓는 교량을 건설하는 일은, 자유로운 철학이 삶에 대한 반성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당연한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