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개요】
칸트는 악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변신론에서 분리하여 그 핵심을 도덕적 책임의 문제로 설명한 첫 철학자로 여겨진다. 하지만 악의 문제는 칸트철학의 체계 전반에 관여된 주제이기 때문에 칸트연구에서 다양한 해석의 대상이었다. 이 논문은 ‘악에의 성향’을 ‘선에의 소질’과 대비시키면서도 그것을 보편적인 인간 본성으로 간주하고, 더 나아가 악행의 책임까지 말하는 칸트 악이론이 지니는 설득력을 검토한다. 이를 위해 그의 악이론을 칸트철학 내재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먼저 칸트철학의 ‘악’ 개념에 관한 기존의 논의를 소개하고, 그의 ‘악’ 또는 ‘근본악’ 개념이 『이성의 오롯한 한계 안의 종교』(이하 『종교론』)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졌지만, 그 토대는 도덕철학의 핵심개념들이라는 점에 주목한다(1). 따라서 『종교론』의 악에 관한 논의가 과연 『도덕형이상학 정초』, 『실천이성비판』 같은 윤리학 주저들의 논의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는지를 따져본다(2). 다음으로 ‘소질’, ‘본능’, ‘성향’ 등의 개념을 분석하여 칸트가 본성적 악과 그 악에 대한 책임성을 동시에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재구성한다(3). 마지막 단락에서는 칸트 도덕철학의 마지막 저서임에도 연구에서 많이 소외되어온 『도덕형이상학-덕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이하 『덕론』)의 관점을 고려하여 ‘악의 압도 가능성’이 곧 덕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밝힌다(4).
주제어: 악에의 성향, 선에의 소질, 근본악, 덕론, 종교론
1. 들어가기
회페에 따르면, 고대부터 근대까지 ‘악’이 서양철학의 중요 테마 중 하나였던 점을 고려할 때, 악에 대한 본격적 담론이 더 이상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대철학의 실상은 놀랄만한 일이라고 한다. 현대의 철학자들이 악을 직접 거론하기 꺼리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겠다. 먼저 악은 통상 신앙 또는 신학의 문제이거나 기껏해야 실제의 인간 삶과 많이 동떨어진 형이상학의 고리타분한 주제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또 현대철학이 그 주제나 철학함의 스타일 측면에서 근대철학과 달리 상당한 정도로 “파편화”(fragmentation) 경향을 보이는 데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우리가 경험하는 부정적인 현상들은, 예컨대 그것이 정의에 대립하는 인권침해의 사례이든 아니면 법이 정한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이든, 대체로 다른 경험들과 관계 지어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반면, 어떤 행위를 ‘악하다’고 할 때는 사실상 그 같은 설명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이먼은, 악의 문제는 “방향 설정을 필요로 하는 세계에 대한 신뢰를 위협하는” 문제이며,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가능성”에 관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악의 문제를 도외시하는 것은 결국 세계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에 대한 “깊고, 풍부하고, 섬세한” 이해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악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변신론에서 분리하여 그 핵심을 “도덕적 … 책임”의 문제로 설명한 첫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칸트철학에서 ‘악’, ‘악에의 성향’, ‘근본악’ 등은 그의 도덕철학의 다른 주요 개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개념들이라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악’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은 ‘선’의 가능성, ‘자유’, ‘도덕적 책임’ 등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며, 특히 ‘근본악’ 개념의 경우에는 ‘셋째 이율배반’의 문제, 또 『인간학』, 역사철학 등이 다루는 인간 본성이나 ‘인간의 사명’ 등과 같은 주제와도 연결된다. 따라서 악의 문제는 칸트철학에 대한 체계적 해석의 문제와 분리하기 어렵다. 또한 체계 전반에 관여된 주제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은 칸트연구에서 명료한 결론으로 수렴되기 어려운, 다양한 해석의 대상이었다. 한편 전통적으로 칸트철학의 ‘악’과 관련해 다루어진 이슈들로는 ①칸트의 악이론과 기독교 원죄설의 관계 ②악을 인간본성으로 간주하여 야기되는 도덕적 책임의 문제 ③악의 보편성 증명의 논리적 결함 또는 그 증명의 경험적 성격 여부의 문제 ④『종교론』의 악이론과 실천철학의 ‘자유’(또는 ‘자율’) 개념의 조화 가능성 ⑤악의 극복 가능성이나 불가능성, 그리고 이때 종교공동체가 수행하는 역할 등이 비교적 잘 알려진 것들이다.
이 논문은 칸트가 ‘악에의 성향’을 ‘선에의 소질’과 대비시키면서도 보편적인 인간 본성으로 간주하고, 더 나아가 악행의 책임까지 말하는 논거를 검토한다. 이를 위해 먼저 그의 악이론이 그 자신의 도덕철학과 조화하기 어려운 논의라는 해석을 칸트철학 내재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칸트의 ‘악’은 『종교론』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지만, 주지하다시피 그 이론의 토대는 ‘자유’, ‘의지’, ‘자의’, ‘준칙’, ‘도덕명령’ 등과 같은 도덕철학의 핵심개념들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악’ 또는 ‘근본악’ 개념은 『도덕형이상학 정초』, 『실천이성비판』 같은 윤리학의 주저들의 논의와 결부해 이해해야 하고 또 그런 시도들이 실제로 이루어져왔다. 주로 악에 관한 칸트 증명의 선험적 연원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수행된 그 같은 시도가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과연 그의 악이론을 윤리학적 논의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2). 그리고 칸트가 악을 본성에 귀속시키면서도 동시에 그 악에 대한 책임성을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재구성하기 위해 그가 ‘소질’(Anlage)과 ‘성향’(Hang) 개념, 나아가 ‘선에의 소질’과 ‘악에의 성향’으로 의미한 것을 분석한다(3). 논문 마지막 단락에서는 칸트 도덕철학의 마지막 저서임에도 연구에서 많이 소외되어온 『덕론』의 관점을 고려하여 이른바 ‘악의 압도 가능성’이 곧 덕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밝힐 것이다(4). 그 결과 지금까지 ‘악에의 성향’과 자유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핍되었던 하나의 연결고리를 제공하게 된다.
2. 칸트의 악 이론은 자기비판인가?―도덕철학과의 연속성 문제
계몽의 아이콘으로 여겨졌던 칸트가 1792년 발표한 에세이 「선과 더불어 내재하는 악의 원리에 관하여: 또는 인간본성에 있는 근본악에 대하여」를 접한 괴테와 실러가 크게 실망하여 그를 “변절자” 취급한 이래, 그의 악이론은 대체로 찬사보다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정초』나 『실천이성비판』에 따르면 도덕적 인간은 자신의 본성적 경향이나 충동에서 자유롭게 도덕법칙의 명령을 따라 행동해야 하며 또 행동할 수 있다. 만일 인간이 경향성의 준칙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며, 설령 그 행동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도덕적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위의 에세이에서 칸트는 모든 인간이 “생래적인” 악에의 성향―이것은 ‘본성’으로까지 간주된다―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악하다고 주장한다. 세부 논의를 도외시하고 큰 주장만 보면 인간은 본성적 경향에서 자유롭게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마땅하며 또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는 입장과, 모든 인간에게는 생래적인 악에의 성향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인류는 불가피하게 악하다는 주장이 상충하는 모습이다. …
출처: 칸트연구 제 40집(2017), 1-26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