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와] 병 덕택에 갖게 되는 영혼의 건강이라니, 치사한 치료법 아닌가! ... 기쁨을 맛볼 때보다는 고통을 소화시켜야 할 때 나의 이성은 더 산만해지고 힘들어 한다. 맑은 날 나는 더 또렷하게 세상을 본다. 건강은 질병보다 나를 더 유쾌하게, 그러므로 더 유익하게 깨우쳐 준다. 즐길 수 있는 건강이 있을 때야말로 나는 가장 많이 개선과 절제 쪽으로 나아갔다. 건강하고 발랄하며 활력 넘치던 시절보다 노쇠의 비참과 역경이 더 나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생각할 때 그 동안의 [즉, 젊고 건강하던 시절의] 내 모습이 아니라 그 상태가 멈춘 모습으로 기억한다면, 나는 부끄럽고 분할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인간의 행복을 만드는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 [견유학파의 창시자] 안티스테네스가 말한 것처럼 행복하게 죽는 것이 아니다. 다 끝난 사람의 머리와 몸에 철학자의 꼬리를 기괴하게 달아 매려는 노력을 나는 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초라한 끝자락이 내 삶의 가장 아름답고 완전하며 긴 부분을 취소하고 부인하게 하려는 짓도 말이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내보이고 또 그렇게 비치기를 바란다. ...
나는 과거를 한탄하지도 않으며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내 삶은 속에서도 겉에서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내 몸 상태의 변화가 하나씩 모두 제 시절을 따라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 내가 나의 운수에게서 받은 중요한 덕 중 하나이다. 나는 그 잎과 꽃과 열매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이 말라 가는 상태를 보는 중이다. 다행이다. 자연의 순리대로이니 말이다. 나는 지금 내가 가진 병들을 훨씬 더 순하게 견딘다. 그것이 제때에 온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 지난 삶의 긴 행복을 더 애틋하게 추억하게 해 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내 지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크기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때가 지금보다는 더 빛나고 더 우아하고 더 싱싱하며 명랑하고 천진했을 것이다. 지금은 콜록거리고 투덜거리며 굼뜨기만 하다. 그러므로 나는 노년의 고통 때문에 어쩌다 해 보려 드는 저 쇄신이라는 것을 단념하는 바이다. ...
[노년에 겪게 되는] 우리 기질의 까다로움과 현재의 것에 대한 싫증을 우리는 [종종] 지혜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우리의 악덕을 버리기보다는 바꾸는 것이며 그것도 내 생각에는 더 나쁜 쪽으로 바꿔 놓는 것이다. 어리석고 노쇠한 우쭐대기, 따분한 수다, 까칠하고 비사교적인 성미, 미신, 이제는 쓸 일도 없는 재물에 대한 우스꽝스런 근심, 이런 것 말고도 노년에는 더 많은 시기심과 불공정, 더 많은 악의가 깃든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년은 우리의 얼굴보다는 정신에 더 많은 주름을 새긴다. 늙어 가면서 시큼하고 눅눅한 냄새가 나지 않는 영혼은 하나도, 혹은 거의 없다. 사람은 그 전체로서 성장해 가고 또 쇄락해 간다.
소크라테스의 지혜나 그가 형을 선고받던 몇 가지 정황들을 보면, 일흔 살이 되니 조만간 자기 정신의 풍요로운 활동이 점차 둔해지고 익숙하던 그 총기가 흐려지는 것을 견뎌야 할 판이라, 얼마간은 일부러 얼버무리면서 스스로 자기를 내놓은 것이 아닌지 감히 생각해 본다.
내가 아는 많은 이들에게 노년이 매일 행하는 것이 내 눈에 보이는 저 변모라니! 그것은 강력한 병이며 그 병은 자연의 이치대로 그리고 지각할 수 없게 천천히 진행해 간다. 노년이 우리에게 지우는 결함들을 피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 진행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대단한 노력의 온축과 깊고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내가 느끼기로는 내가 구축한 온갖 방어 진지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한발 한발 나를 침식해 들어오고 있다.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버티는 중이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것이 나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가 없다. 어떻거나 간에 나는 내가 어디서 쓰러졌을지를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미셸 드 몽테뉴(최권행 역), 에세 3, 민음사 중에서 (번역문 일부 수정, 보충)
[까칠한 드 보부아르가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했던, 몽테뉴의 노화에 대한 진솔한 서술. 키케로의 De Senectute 같은 노년 예찬론과는 거리가 좀 있는, 철학자 다운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자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회의가 지나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 도처에서 자신이 얼마나 후카시가 없는 사람인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솔직함을 부각시키려는 태도가 그러하다. 또 시간의 경과와 Lebenserfahrung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관점의 확대 또는 심화 가능성을 무시하려는 경향은 아쉽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stereotypisch한 우리의 노인 문화가 참고해야 할 부분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