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힐링 마케팅 시대, 상담을 다시 생각하다

Kant 2013. 2. 12. 14:59

요즘처럼 출판계나 대중매체에서 이른바 “힐링”이나 정서적 치유, “멘토링” 같은 주제가 대세를 구가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언제부터인가 마치 우리 주변에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celebrity들로 넘쳐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TV 앞에 있다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유명인들이 눈물을 쏟으며 아픔을 호소하고, 심지어 자살 소식도 너무 자주 접하게 된다. 어디 그들뿐인가? 주변의 평범한 아이나 부모, 학생이나 선생, 남편이나 아내 들의 남모를 아픔, 고민, 무능력이 거의 아무런 여과 없이 전파를 타기도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으레 상담전문가 내지 유능한 멘토들이 등장하여 전문 상담이론에 입각한 진단을 제시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즉문즉답”과 같은 신비롭고 명쾌한 쾌도난마식 조언이 베풀어지기도 한다. 한동안 “웰빙”이란 말이 느닷없이 유행하더니 몇 년 전부턴 힐링이 그야말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젠 “healing marketing”이란 표현이 생소하지 않을 정도니…….

 

 

 

 

일반적으로 상담이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겨지기 쉽다. 맘에 맞는 벗이나 지인과 오랜만에 만나 나누는 대화처럼 그 긍정적인 치유 효과가 확실한 경우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꼭 주변에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함께 바람직한 해결책을 모색해 주었으면 하는 친구나 아는 이가 없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들도 나름 그러한 시도를 해보았으나 무위에 그친 사례도 많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담은 일상적인 대화나 수다처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나름대로 그 분야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전문성인가?

 

 

먼저 이 물음을 ‘기존의 심리(정신과)상담 이론들과 방법론, 실천적 기법들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입장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으로 간주한다면 그때 고려될 수 있는 전문성이란 바로 그 전문성으로 인해 상담에 대한 접근과 상담과정 자체를 크게 제한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이론적 관점은 그것이 전제하거나 선호하는 특정 가치관, 인간관이나 세계관 등에 의해 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담자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상담사는 매사에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큰 비중을 두는 내담자를 성숙하지 못한, 따라서 꾸준한 치료를 필요로 하는 유형의 환자로 간주할 공산이 크다. 반대로 관계적 사고를 우선시하는 이론적 배경에 뿌리를 두는 상담사라면 자신의 독자적인 결정을 과감하게 추진하려는 일반적인 성향을 지닌 내담자를 일종의 과대망상 증후군에 사로잡힌, 그래서 역시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 교정 받아 마땅한 환자로 분류하려는 유혹에 직면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현대의 심리상담 이론의 연구 수준, 축적된 데이터와 노하우, 절충적 방향의 시도 등을 무시하는 발상처럼 들릴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불행히도 심리(정신과)상담이 따르는 치료 모델은 전문가 조합이 타협에 의해 개발한 것인 만큼 그 집단 그리고 그 집단과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는 세력들의 정치적, 행정적, 재정적, 법적 의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철학적인 배경을 갖춘 상담사들의 판단이다. 그 모델은 상황을 과도하게 단순화시키고, 병리학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때 환자의 사고 능력, 대처 기술, 인격 패턴 등과 같은 요소들이 가지는 상대적인 장단점은 간과되기 쉽고, 이에 비해 내담자들에게 ‘비정상적인 머리’라든가 ‘정신 질환’을 함축하는 기술적인 용어들로 서술된 진단 꼬리표를 달아줌으로써 치료사나 환자 모두 성급한 결론에 이르게 하여 그들이 지각하는 내용을 그 범주에 일치하도록 구성하게 만든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 진단 기준 자체가 문화에 종속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절대 다수 사람들의 경우 예컨대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일 자체가 우울함과 스트레스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진단 꼬리표를 다는 일 또한 인생사의 정상적인 경험들을 실제로는 어떤 무시무시한 불행의 증상인 것처럼 믿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환자의 상담사에 대한 의존 관계는 점점 심화되어 길게는 평생 지속되기도 한다. 더욱이 환자로 진단된 당사자는 당사자대로 해로운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그 진단을 사(악?)용할 수도 있다.(피터 라베, 철학상담의 이론과 실제, 304 이하.)

 

 

제대로 된 상담은 분명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필요로 하는 작업임에 틀림없다. 고도의 종교적인 수행을 통해 탁월한 혜안을 획득한 지도자라면 또 모를까 - 범부의 관점으로 보면 이 수준에 도달한 정신적 지도자는 조우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그 공력(功力) 또한 그때그때의 상황과 조건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 싶다. 판단실수, 말실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 단순한 호기심과 열정 그리고 약간의 공부만으로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고 그것에 영향을 주는 작업에 섣불리 덤벼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전문 상담가나 종교 지도자가 마치 내담자의 문제 상황을 대번에 간파하여 충격요법처럼 단번에 치유하거나 수회의 상담 회기를 갖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듯 내보내는 우리 매스컴의 태도는 자칫 상담에 대한 오해를 유발할 수 있지 싶다. 자신에 대해 그리고 남에 대해 섣부른 진단을 내리고 치유를 갈망하게 하거나 강요하게 만드는, 상담과 힐링이 대세인 세태는 그 자체가 유사-병리적인 현상일 수 있다. 상담은 통상 우리가 살아가며 특정한 시기에 제한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이긴 하다. 무엇보다 제3자인 상담사의 시각은 나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성공적인 상담이란 전문가에게조차 평생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나 드물게 주어질 있는 선물 같은 것인지 모른다. 적어도 마케팅이나 시청률 차원에서 다뤄질 일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