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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대(對) 비난 ― 스토아 철학자들의 치료법

Kant 2023. 7. 13. 12:30

철학적 공감은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을 제공한다. 그것은 모욕에 대해 강력한 면역작용으로 작용한다. 뒤부아는 분노를 완화하는 데 결정론이 할 수 있는 이 같은 역할을 분명히 인식했다.

 

우리가 분노에 우리 자신을 내맡길 경우, 그 정념은 책임의 정신에 크게 대립하며, 분노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보다 그 정념에 자신을 내맡긴 사람에게 피해가 더 커진다. 이 경우에도 도덕적 결정론의 개념이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준다. 우리의 동료 인간들은 실제로 자신들의 정신적 표상에 따라 행동한다. 대부분 그들은 옳은 일을 하고자 하며 선한 의도에 의해 움직인다. 그들이 자신의 행위가 지닌 비도덕적인 성격을 인식하거나, 자신이 복수하고자 할 때, 또 의도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려고 할 때에도,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뒤부아, 1909, 241-242).

 

마찬가지로, 스토아철학자는 적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그래서 그들의 자신에 대한 비판이 적절하다고 깨달으면, 그들에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한다. 또 만약 그들이 오해나 편견의 결과로 비난을 퍼부은 것이라고 파악하면, 그들을 무시하고 그들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스토아철학에서 이 같은 인지 전략이 지니는 중요성은 명상록에 나오는 다음의 명언들로 잘 설명된다.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라, 그러면 너는 네가 그렇게도 두려워하는 판사들을 [그들이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나 명민하게 심판하는가를(명상록, 9.18).

 

네가 누군가의 모욕, 증오, 그 밖의 어떤 것에 직면할 때 ... 그의 영혼을 바라봐라. 그 안으로 들어가라.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보라. 그러면 너는 그를 감동시키기 위해 애써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명상록, 9.27).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 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그들의 사랑과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 그들의 영혼을 벗겨낸다고 상상하라. 그리고 그들의 허영심을 보라. 그들의 경멸이 누구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을지―또 그들의 칭찬이 자신들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명상록, 9.34).

 

다른 사람들의 무례한 발언에 의해 영향을 받는지를 묻는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그런 일은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네”하며 확신 있게 대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희극 작가들의 조롱을 환영했으며, 그들이 들어야 할 가치 있는 말을 한다면 자신의 행동을 바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말을 관계없는 것으로 무시할 것이라고 말했다(Lives, 2.5). 누군가가 소크라테스에게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험담한다고 전하자, 그는 그것은 그들이 옳게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농담으로 응수했다(ibid.). 사실, 전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장에서 이야기할 때 자주 야유와 폭행을 당했지만,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그는 이 모든 것을 매우 평온하게 감당했다"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래서 언젠가, 걷어차이고 농락당했을 때, 그가 이 모든 것을 인내하며 참았고, 어떤 사람이 그러한 그의 태도가 놀랍다고 하자, 그는 "만약 당나귀가 나를 때렸다면, 자네는 나보고 그 당나귀를 고소하라고 했을까?"라고 말했다.(ibid.)

 

이 이야기, 그리고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 밖의 일화들에서 나타나는 교훈은, 비난하는 대상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의 비난을 모욕으로 받아들여 화를 내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픽테토스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할 때면, 자신은 그 사람들이 분명 자신들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모른다고 항상 불평할 수 있고, 또 만약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스스로 알고 있었다면, 에픽테토스 자신의 다른 약점들도 언급했을 것이라고 농담했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의 악명높고 심술궂은 아내 크산티페에 대한 여러 가지 농담이 존재한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그녀의 통제되지 않는 행동을 전형적으로 스토아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도덕적인 강인함을 강화하는 기회로 간주했다.

 

그는, 남자는 온순하지 않은 여자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기수들이 성질이 거친 말들을 다루는 것처럼.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그런 말들을 한 번 조련한 후에는 다른 말들도 쉽게 다룰 수 있듯이, 나도 크산티페를 다룰 줄 알게 된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과도, 그들이 누구든 쉽게 어울릴 수 있다네”(ibid.)

 

인지 행동 치료(CBT)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비합리적인 자기 비난 또는 타인에 대한 비난을 반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사고에 연루된 사람이 실제로 사고에 대한 책임이 없더라도 사고에 대해 비참하게 후회하거나 자신을 비난하는 일은 매우 흔하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화나게 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괴물"이나 "짐승"으로 분류하는 것도 매우 흔한 일이다. 마치 그들이 악의를 갖고 일부러 그렇게 행동하고, 그 행위에 대해 완전한 인식과 통제력을 갖고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악을 의도적으로 행하는 사람은 없다는, 즉 우리가 남들에게서 악의나 악덕으로 여기는 것은 실제로는 무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일도 또한 마찬가지로 의도 없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 약탈자와 간통자를 처형해야 할까요?"

그런 것을 묻지 말고, 대신 이렇게 물어보라.

“가장 중요한 일에서 헤매고 잘못한 사람은 처형되어야 하는가? 시각으로는 검은색과 흰색을 구분하되, 지능으로는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한 사람을?”

네가 이렇게 이해하면, 그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마치 "시각 장애인이나 청각 장애인이 처형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가장 중요한 것을 상실하는 것이 가장 큰 해악인데, 각 개인에게 있어서 그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올바른 의지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것을 박탈당했는데, 넌 어째서 그에게 분노하는가? 친구여, 타인의 곤경상황에 대한 너의 대응이 자연과 대립해야만 한다면, 그를 증오하는 대신 차라리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라. 그 보복하려는 마음과 적대감을 접어라(담론집, 1.18.5–9).

 

고의로 악을 행하는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이 합리적인지, 아니면 그 사람를 오해하고 혼란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으로서 용서하는 것이 더 타당한지 결정할 수 없다고 잠시 가정해 보자. 상대방을 비난하는 전략은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으며, 건강하지 않은 감정을 유발할 뿐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해를 더 많이 입히기만 한다. 상대방의 행동을 혼란스럽고 깨달음이 없는 것으로 보는 전략은 감정적인 대응을 완화시킬 것이고, 또 행운이 따른다면,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변화시킬 만한 재교육 방법을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것이 더 정확한지를 결정할 수 없는 경우에도, 소크라테스의 입장, 즉 '사람은 악을 알고서 일부러 행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더 건강하고 실용적인 태도로서 선호될 수 있다.

그러나 스토아주의자들은 이 실용적인 이점 외에도, 소크라테스의 견해가 철학적 일관성이 더 크며 타인을 비난하는 철학보다 더 건강하며 정확하다고 말할 근거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토아주의와 기독교 윤리 사이의 차이를 기억해야 한다. 스토아주의자에게 좋음과 나쁨의 차이는 계몽된 자기 이익을 참조함으로써 결정된다. 좋은 행동은 장기적인 건강과 웰빙에 기여하며, 정서적 자유 및 지적인 계몽과 일치한다. 그들은 아무도 악을 일부러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주장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일부러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려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더라도, 그 자는 아마도 응어리진 어떤 것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고, 혼란스럽고 비이성적인 가정에 의해 그렇게 행동하게 된 것이리라. 다시 말해, 어떤 식으로든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충동을 따르는 것이 그것을 억제하는 것보다 낫다고 오해한 것이다. 따라서 에픽테토스는 무지로 인해 도덕적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사형으로 처벌하는 것은, 신체적으로 시각 또는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적들과 공감하는 이 같은 이상적인 태도가 이상주의적이라거나 어떤 면에서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린다면,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다시 한 번 제임스 스톡데일의 이야기에서 인용하겠다. 북베트남 하노이 감옥에서 겪은 "밧줄 채찍질"에 대해 기술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도가니 같은 고문실 속에서 당신은 깊이 생각하며, 당신 주변에서 사람들이 부산하게 무엇을 하는지를 조용히 관찰한다. 내 고문 담당관의 키를 어림잡아보고, 그의 눈동자를 관찰하고, 그가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가 나의 고꾸라진 어깨를 밟고서서 움직이는 것, 또 로프를 당기어 나의 어깨를 끌어올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의 내면에 선량함이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 그는 명령에 따라 몇 년 동안 15 번이나 나를 로프에 걸었는데, 그가 나의 고장난 다리를 또 다시 부러뜨린 것은 실수였다고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스톡데일, 1995, 231-232쪽).

 

스톡데일은 에픽테토스의 스토아철학 저서 엥케이리디온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을 고문하는 사람과 공감함으로써 7년 반에 걸친 감옥 생활 내내 겪었던 "톱날처럼 날카로운" 고통에 대처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세월 동안, 아마도 우리가 1대1로 함께 보낸 시간은 스무 시간도 채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중 아무도 언제나 엄격한 의무 관계의 규칙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는 나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고 항상 정직하게 대해주었으며, 나도 자비를 구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그러한 면을 칭찬했고, 그도 나를 그렇게 대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고문 담당자였잖아요, 그를 미워하지 않았어요?’하고 사람들이 물을 때, 나는 솔제니친처럼 주변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아니요, 그는 좋은 병사였고, 자신의 의무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어요'라고 대답한다(스톡데일, 232쪽).

 

더 나아가 적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시도는, 허영심에 대항하는데 필요한 백신 역할을 제공하고, 우리의 결점을 인식하고 대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안티스테네스의 유명한 준칙 중 하나는, "자신의 적들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실수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였다(Lives, 6.1). 스토아주의자들 역시 자만심, 허영심, 그리고 명예와 평판에 대한 탐욕 등의 위험성을 일관되게 경고했다. 에픽테토스는 이 점을 매우 강력하게 주장했다. 노예 출신이었던 그는 여러 명의 부유한 귀족 출신 제자들에게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노예들!"라고 엄하게 책망했다. 유명한 스토아주의의 역설에서 에픽테토스는, 오직 부와 명예에 대한 탐욕을 극복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왕이며, 자기 자신의 통치자로서 굴종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만약 누군가가 네 몸을 길에서 만난 아무에게나 [노예로] 넘긴다면, 너는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너 자신의 판단을 우연히 어울리게 된 사람에게 넘겨서, 그가 너를 모욕할 때, 네 판단이 혼란스러워지고 어수선해진다는 사실에는 어째서 부끄러워하지 않는가?(엥케이리디온, 28).

 

타인에 대한 공감은 분노를 줄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촌격인 허영심을 깨뜨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 둘의 근본 원인이 같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과 행동에 너무 많은 가치를 두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칭찬하면 우리는 아부감을 느끼며, 그들이 우리를 비판하면 우리는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이러한 감정적인 의존성[집착]을 근본적으로 공격한다. 사람들을 결함이 있는 존재로 바라본다. 달리 말해, 아부나 꾸중으로 일어나는 자기중심적인 쾌감이나 고통을 모두 완화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자신을 자신의 한계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바라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스토아철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그들 자신의 일이며 우리의 직접적인 통제 범위를 벗어난다고 강조하고 싶어한다. 다시 한 번,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물 자체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판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좌절하거나 괴롭거나 화가 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오직 우리 자신, 그러니까 우리 자신의 판단을 탓해야 한다. 자신의 나쁜 상태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철학적으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의 행동이며, 교육받기를 시작한 사람은 자신을 탓해야 하고, 완전히 교육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든 자신이든 탓하지 말아야 한다.(엥케이리디온, 5)

 

타인의 행동이나 의견은 우리가 그것들에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의 판단 때문이다. 그는 다른 장소에서도 같은 점을 강조하며, 분노에 찬 판단을 조기에 발견하고자 애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하면 그것들을 조기에 좌절시키고 사고하기 위한 시간을 얻어 우리의 감정을 조절하기가 더 수월해지기 때문이다(엥케이리디온, 20). 그러나 에픽테토스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자신을 탓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의 과거의 행동이 아니라, 현재의 판단이 우리의 괴로움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모든 비난은,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판단된 사물에 너무 많은 중요성을 두고, 판단 자체에는 충분한 중요성을 두지 않아서 잘못된 것이다.

 

Donald Robertson, The Philosophy of Cognitive-Behavioural Therapy (CBT): Stoic Philosophy as Rational and Cognitive Psychotherapy, 2020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