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에우다이모니아에 필요한 것?

Kant 2024. 1. 26. 16:37

"에우다이모니아에 philoi(친구)가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말하길,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과 자족적인 사람들은 그것이 필요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람들이 이미 좋은 것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

그러나 에우다이몬을 누리는 사람에게 좋은 모두 것을 주면서 필로이를 제외하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 또한 복을 누리는 사람을 고독하게 놔두는 것도 분명 기이한 일이다. 세상에서 좋은 모든 것을 홀로 다 가지기를 선택하려는 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고 본성상 함께 사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에우다이모니아를 누리는 사람에게도 참이다. ... 그러므로 에우다이모니아는 필로이를 필요로 한다."(NE 1169b3-10, 16-19, 22)

 

"우리가 이미 보았듯, 에우다이모니아는 분명 외부적인 좋은 것들을 필요로 한다. 많은 일들은 필로이, 부, 정치적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 중 일부가 박탈될 경우, 복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훼손된다. 훌륭한 가문, 착한 자녀, 준수한 외모 등도 그런 예들이다. 보기에 역겨운 외모를 지녔거나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거나, 고독하기도 하고 자녀까지 없다면, 그러한 사람의 에우다이모니아가 온전할 수는 없다. 더구나 자식들이 못됐거나 필로이가 끔찍하다면, 또는 자식들이나 친구들이 착했으나 사망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에우다이모니아에게는 이러한 종류의 좋은 환경이 추가로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에우다이모니아를 행운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반면에 또 어떤 자들은 탁월함[덕]과 동일시하기도 한다."(NE 1099a33-b8)

 

 

도덕적 인간의 자족적인 성격과 가치를 주장했던 플라톤[중기 이전?], 스토아, 칸트 등과는 정면으로 대립하는 입장 같아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솔직한 성격은 알겠는데 ... 개인적으로는 동의하기가 쉽지 않은 주장 같네. 인간적인 좋음이나 행복을 인간에게 가능한 것의 범주에 묶어두는 것도 오류 아닐까? 자기 능력에 대한 일종의 부당한 한계설정의 오류 같은?

"고문대에서 고문을 당하는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 넌센스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NE 1153b21)라는 표현에 주목당한(?) 너스바움은 James Bond Stockdale 같은 전쟁 베테랑이 거짓말한다고 생각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