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직장, 특히 학계를 배경으로 한 시트콤 대본

Kant 2024. 4. 21. 15:22

직장동료나 자신이 업으로 삼고 있는 분야의 협력 파트너들이 주는 (서로에게 가하는) 스트레스나 (법에 호소해야 할만큼 과하지는 않은) 피해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일시적이거나 우연히 조우하는 짜증스런 사람들이라면 세네카의 조언대로 피하면 되겠지만, 위와 같은 경우에서는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거의 주어져 있지 않으므로 나름 충분히 대처 전략을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M. Nussbaum의 조언을 들어보자.  [이 분의 조언은, 조별 발표 수업 준비를 함께 해야 하는 다른 조원들과의 인간 관계에서도 참고할 수 있을만하니]

 

[짜증을 선사하는] 사람들과 매일 마주해야 한다면, 지나치게 예민하지 않은 성격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모욕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운 말을 아량있게 이해해주는 습관을 들인다면 더 좋다. 하지만 직장동료들이 하는 행동 중에는 진정으로 문제적인 것들이 많이 있다. 말이 너무 많거나, 말버릇이 무례하고, 협동 프로젝트를 자기 멋대로 끌어가려고 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맡은 몫을 하지 않으려 들고, 중요한 약속을 어기고, 다른 누구도 받지 않는 특별한 대접을 받으려 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노상 일어나기 마련이다. 세네카는 그런 일들에 매번 화를 내기 시작하면 머리가 돌아버릴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 혼자야 명예와 지위에 대한 모욕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타인의 잘못된 가치관이나 거기에서 나오는 행동에 계속 대처해야만 한다. 즉,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나갈 방법을 알아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일시적 관계를 맺는 경우와 달리 그냥 떠나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분노가 적절한 반응일까? ... 내가 살면서 실제로 겪은 네 가지 사례를 활용해 이 문제를 탐구해보자. ... 나는 루이즈라는 가상의 분신을 도입하여 허구성의 막을 하나 더 드리우고, 허구적인 인물들로서 이 사례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치부에도 나뭇잎을 한 장씩 덧대주도록 하겠다.

 

사례 1

루이즈는 자신과 지위나 학문적 성과가 모두 비슷한 직장동료와 함께 수업을 하게 되었다. 이 수업을 들으려면 학생들이 일단 지원서를 넣어야 했다. 학생들의 지원 서류를 잠시 동안 함께 검토한 다음, 루이즈의 직장동료는 루이즈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결정은 기꺼이 교수님에게 넘겨드리겠습니다. 지금 제가 너무 바빠서요."

 

사례 2

루이즈는 중요한 학술대회를 조직하는 중이다. 다른 학부 출신의 직장동료로 루이즈가 상당히 잘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논문을 제출해주기로 했다. 확실히, 명백하게, 서면으로 말이다. ... 9개월이 지나 학회가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그가 쾌활한 메시지를 보내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해야 하기에 루이즈의 학회에는 못 온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가 자기 행동의 문제점을 알고 있다는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루이즈가 그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사례 3

루이즈에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단히 훌륭한 동료가 있다. 매우 명석하고 아량이 넘치며 타인에 대한 선의로 가득찬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몸만 어른인 아기이기도 하다. 언제 봐도 맨날 무슨 말을 하고 있고, 다른 사람이 말을 끊지 않으면 절대 말을 멈추지 않는다. 그룹 토론을 할 때면 그는 결국 자기보다 어린 교수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야 만다. 악의는 조금도 없지만, 그저 자신의 행동이 미치는 효과를 민감하게 느끼는 능력이 없는 거다. 자기를 표현하고 싶다는, 떠들썩한 무절제가 거기에 결합되어 있다.

 

... 첫 사례에서 루이즈의 동료는 아마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겠지만, 자기 시간이 루이즈의 시간보다 더 가치 있다는 식의 암시를 남김으로써 실제로 모욕을 했고, 학계라는 직업세계에서는 부적절한(물론 학계가 원래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 곳이긴 하다) 뻐기는 듯한 태도를 나타냈던 것이다. 조금 더 심각한 둘째 경우에서, 루이즈의 또 다른 동료는 학회의 성공 여부를 위험에 빠뜨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학회에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했던 사람들의 복지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이미 확립되어 있는 규범도 침해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학회에 오라는 초대를 나중에 받았는데 거기 가고 싶어서 예전에 루이즈와 했던 약속을 취소한 것이든, 과거에 오스트레일리아의 학회에 가기로 약속한 상황에서 루이즈의 초청을 받아들여놓고 그랬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것이든 간에 말이다. 전혀 뉘우치지도 않고 사과를 하지도 않으면서 이 일 전체를 태연하게 대하는 그의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부담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나 자기가 어긴 규범에 대해 그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쯤이야 충분히 알 만큼 이 업계에 오래 몸 담고 있었던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셋째 사례는 이 중에서 심각한 문제로 비화할 잠재력이 가장 높은 사례로, 아무런 악의가 없는 사람이 절제력의 결핍으로 공동체 전체를 방해할지 모르는 위협이 되어버렸다. ...

 

첫 사례에서 루이즈는 자기도 동료만큼이나 바쁘며, 그가 한 말은 루이즈가 상대적으로 게으르고 비생산적이라는 듯한 암시를 전해준 만큼 부적절해 보인다는 점을 이메일로 알려주었다. 그렇긴 하지만 지원서 검토는 기쁘게 하겠다고. ... 동료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이 지적인 면모에서 그렇듯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멋진 성격을 많이 갖고 있기는 하지만,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본인에 대한 이해력이 좀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걸 벌써 여러 해 동안 알고 있었으므로 루이즈는 그냥 내버려두기로 결정했다. 그가 모욕적인 말을 했음을 알려주겠다는 결정도 여러 가지 목적을 신중히 고려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미래의 상호작용에까지 영향을 주는 지긋지긋한 짜증을 유발하지 않겠다는 목적, 다른 사람들이 가끔씩 그러듯 그 동료를 아이 취급하지 않겠다는 목적, 앞으로 다시는 그런 경솔한 말을 하지 않겠다면 사과하는 게 적절하다는 신호를 주려는 목적 등이 있었다. 하지만 동료가 그 신호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이제는 결정의 배경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사과를 받자면 루이즈는 판돈을 올려서 그에게 직접 요구하는 형식으로 사과를 뽑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행위는 성공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 보통, 사람들은 사과를 요구받았다는 이유로 바뀌지는 않는다. 

 

둘째 사례도 실은 비슷하다. 둘 다 자기들이 틀렸다고 말하기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니까. 루이즈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함께 계획해온 학회를 그토록 태연히 날려버리는 행위가 왜 충격적일 만큼 부적절하게 느껴졌는지를 두 차례나 설명하려 애썼다. 하지만 루이즈가 돌려받은 것은 (이 메일로 날라온) 퉁명스러운 대답뿐이었다. "저로서는, 제 사정을 교수님께 설명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는 거였다. 그 사람을 다시 보거나 그 사람과 함께 수업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이 시점에서 루이즈에게는 실제로 관계를 정리할 힘이 있었다. 하지만 루이즈는 좀더 고민을 해보았다. 그가 방금 아마도 엄청난 기억 상실을 경험해 수치심을 느꼈으며 노화를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루이즈는 뿐만 아니라 정말 그가 쓴 논문을 원했다. 그래서 더 이상 사과를 얻어내려는 행동은 미래의 상호작용을 파멸로 몰아가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모두의 복지를 위하여(!), 루이즈는 그럼 논문을 써주고 다른 사람이 대신 읽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리고 술이나 한잔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고 그를 초대했다.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다른 학회에는 루이즈가 이 사람을 다시 초청하지 않을 수도 있다). ...

 

셋째 경우로 돌아가 보자. 이 사례는 다루기가 좀더 까다롭다. 한 집단 전체가 관련된 문제라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전혀 통하지 않을 한 가지 방법은 눈에 띄게 그 사람에게 화를 내며 그를 무례하게 대하는 것이다. ... 보통 그런 반응은 집단 안에 긴장을 고조시킬 뿐이다. 그에게 문제를 직접 이야기하는 방법도 있다. 효과는 있겠지만 별로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문제의 행동은 그의 정체성에서 너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는 자기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모르는데, 실은 이게 진짜 문제다. 실제로 자주 통하는 또 다른 방법은 단호하게, 빈번히 끼어들어 그의 말을 끊는 것이다. ... 하지만 가장 창의력 있는, 모두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해법은 학사과 직원에 의해 고안되었는데, 그의 강의 시간표를 변경해 점심 시간의 토론이 시작되고 몇 분이 지난 다음에야 그의 수업이 끝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늦게 도착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대화 주제를 정할 수 없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을 덜 방해하게 되었다.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미래지향적 사고가 만사라는 걸 알 수 있다. 그에게 화를 낸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건 두 살배기 천재에게 화를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번엔 또 다른 사례인 넷째 사례를 짧게나마 비교해보자. 이 사례는 그다지 착하지 않은 두 살짜리 천재의 사례이다. 불행히도 학계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 대단하신 학자님께서는 루이즈가 속해 있는 대학이 개발도상국에 열고자 하는 새 연구소의 개소식 토론회 패널로 초청되었다. 이 큰 이벤트의 패널 조직을 루이즈가 맡게 되었는데 ... 노벨상을 통해 인정받은 그의 연구업적에 독특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참석이 확정될 경우에만 다른 고품격 참가자들도 초청을 받아들일 게 거의 확실했다. 이 사람은 특유의 지연전술을 쓰더니 1등석 항공권을 요구했다. 동시에 자기 아내에게는 비즈니스 항공권을 제공해달라고 했다(!). 이런 일은 일반적인 대학 규칙에 어긋난다. 유아적인 자기애의 징후였다. ...

 

성질을 내야만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은, 일시적 상호작용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보다는 위와 같은 여건에서 더 치명적이다. 네 가지 사례 모두에서 의분은 느껴질 수 있고, 그런 감정이 다소 '정당화'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의분의 결과는 도처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직장동료와의 관계에서는 사과가 제한적으로나마 현실적인 유용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을 내려놓고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사과는 미래에 일이 더 잘 풀리리라는 증거가 되고, 따라서 가까운 협력적 관계를 추구하는 편이 유익할 거라는 증거도 된다. 하지만 사과를 받는 것과 그것을 억지로 받아내려는 것은 대단히 다르다. 후자는 보통 실수에 해당한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격적 결함은 대단히 흔한 결함이기도 하거니와, 그런 결함이 있는 사람과는 이 세상이 멸망하는 날까지 언쟁을 벌이며 감정의 판돈을 올리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점점 더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 말고는 아무 진전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나에 관한 것, 내가 받아 마땅한 '내 몫'에 관한 것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상대방이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싫어하지만, 동시에 가치 있고 심지어 좋아할 만한 성격적 특질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그냥 깨닫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또 하나 있다. 상상력과 역지사지를 통해 상황을 바라보면,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고 거기서 나오는 복수의 필요에만 자기애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태도를 해독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사과를 뽑아내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복수를 실현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는 있겠지만, 실은 유용한 방식으로 사태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각 사례에서는 [오히려]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이(첫째와 둘째 사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유난히 유치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둘째 사례의 주인공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자기 자신에게 짜증이 나서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자 한다. 또 셋째 사례의 주인공은 선의로 가득차 있으나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른다) 유용한 반응을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인간관계는 풀어야 할 수많은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문제를 잘 해결하려면 공감 능력이 있어야 하고 유머 감각도 필요하다. 나 같은 경우, 이런 상황을 학계를 배경으로 한 시트콤의 대본이라고 생각하니까 도움이 되었다. 

 
 
 
M. 너스바움(강동혁 역, 일부 수정), 분노와 용서. 적개심, 아량, 정의 중에서
 

 

두 살배기 정신 연령이라도 천재라면 노벨상-병 걸린 우리나라에선 무조건 용서될 듯.
근데 “시트콤"이라니 🫠

데모크리토스(the Laughing Philosopher)를 떠올리게 만드는 표현이네. 그러고보니 우리나라 학계의 코미디 같은 현실을 비꼰 김훈의 단편소설 “뼈”도 생각난다. ㅎ